주간동아 851

2012.08.20

날 죽이고 이야기를 살려줘!

연극 ‘필로우맨’

  • 현수정 공연칼럼니스트 eliza@paran.com

    입력2012-08-20 11: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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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날 죽이고 이야기를 살려줘!
    문화 중심에는 스토리텔링이 있다. 사회에서 벌어지는 사건도, 역사도 스토리텔링으로 재구성된다. 어떻게 보면 모든 일의 승패가 스토리텔링에 달려 있는지도. ‘필로우맨’(변정주 연출)은 스토리텔링의 묘미를 느끼게 하는 연극이다. 몇 건의 살인사건에 대해 경찰과 용의자들이 공방을 벌이는데, 작품의 초점은 진실이냐 거짓이냐가 아닌 이야기다.

    카투리안은 아동학대를 소재로 잔혹한 글을 많이 써온 작가다. 어느 날 그는 영문도 모른 채 형사들에게 끌려와 취조를 받는다. 자신의 소설 속 사건대로 살인을 저지른 혐의다. 카투리안과 함께 형 마이클도 붙잡혀 왔다.

    형제를 취조하는 투폴스키와 에리얼 두 형사는 카투리안의 소설 속 이야기와 실제로 일어난 범행이 어떻게 일치하는지 설명하는 방식으로 조사를 진행한다. 그러다 보니 조사 과정이 마치 문학작품을 검열하는 모습을 연상케 한다. 아닌 게 아니라 이 연극의 공간과 인물들은 사실적이라기보다 상징적으로 보인다.

    삭막한 공간은 취조실 같으면서도 묘하게 비현실적이다. 외부와 고립돼 있고 단 두 명의 형사만 드나든다. 그리고 형사들은 사건과 크게 상관없어 보이는 카투리안의 작품들에도 필요 이상의 관심을 기울인다. 극중 투폴스키가 ‘전체주의 국가’라는 말을 언급하는데, 국민의 생각과 말을 통제하려 드는 국가와 진실을 조작하고 조종하려는 정치인을 떠올리게 한다.

    작품의 전체 흐름을 형성하는 것은 형사들이 카투리안을 취조하는 과정이지만, 중간 중간 잔혹한 이야기가 쉴 새 없이 끼어든다. 대부분 살인과 아동학대로 점철돼 있는데, 카투리안이 쓴 소설 내용들이다. 전체주의적 사회에서 뒤틀린 채 억압된 스토리텔링으로 작품에 어두운 환상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 폭력적인 환상이 현실의 이면을 바라보게 한다.



    작품에서 주조를 이루는 몇 가지 이야기 중 제목이기도 한 ‘필로우맨’은 머리, 몸통, 팔다리, 손가락과 치아까지 모두 베개로 이루어진 존재다. 그는 나중에 불행한 삶을 살게 될 아이들을 설득해 죽음으로 인도한다. 아이들이 동의하면 그가 직접 베개로 얼굴을 눌러 죽인다. 필로우맨은 카투리안의 내면을 반영한 존재다. 카투리안은 어릴 때 부모를 베개로 눌러 살해했다. 부모에게 학대받는 형 마이클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마이클은 어릴 때 부모에게서 지속적으로 학대받아 뇌손상을 입었다. 카투리안은 이 이야기를 ‘작가와 작가의 형제’라는 작품에 담았다.

    극 중반부까지는 여러 이야기가 엮이면서 흐름이 잘 잡히지 않는다. 그러나 마지막 부분에서 작품 주제와 결론 등이 정리된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결말 부분이 백미다. 결국 마이클도 카투리안도 거짓 증언을 하는데, 형사들의 고문 때문이 아니라 스토리텔링에 대한 집착 때문이다. 마이클은 독자로서, 카투리안은 작가로서 이야기에 집착한다. 카투리안은 자신을 죽이고 이야기를 남겨달라고 형사들에게 애원한다.

    날 죽이고 이야기를 살려줘!
    이 작품은 국내에서 2007년 박근형 연출로 대극장에서 초연됐다. 당시 최민식이 카투리안으로 출연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번엔 소극장에 맞춰 연출과 각색을 새롭게 했다. 행동으로 보여주기보다 말로 들려주고, 극중극 대신 영상을 많이 활용한다. 음악도 강렬하고 극적이기보다 잔잔하면서도 미스터리한 느낌으로 흐른다.

    한편 배우들이 길고 긴 대사로 긴장감을 유지하기란 쉬운 일이 아닌 만큼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 번역투가 아닌 좀 더 입에 맞는 대사로 집중력을 높여도 좋을 것 같다. 김준원, 손종학, 이현철, 조운 출연. 9월 15일까지, 서울 두산아트센터 스페이트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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