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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전범과 독재자 심판 정의는 시퍼렇게 살아 있다

유엔 국제형사재판소 구속영장엔 시효 없어 죽을 때까지 추적

전범과 독재자 심판 정의는 시퍼렇게 살아 있다

전범과 독재자 심판 정의는 시퍼렇게 살아 있다
‘피의 다이아몬드(Blood Diamond)’는 아프리카 등 분쟁지역에서 정부군이나 반군이 무기 구입 등 전쟁비용으로 사용하기 위해 채굴하는 다이아몬드를 말한다.

찰스 테일러(64) 전(前) 라이베리아 대통령은 1991년부터 10년간 세계 최대 다이아몬드 생산지인 이웃나라 시에라리온의 내전에 개입해 반군(反軍)인 혁명연합전선(RUF)에 무기를 지원했고, 그 대가로 주민들을 노예처럼 학대해 채굴한 다이아몬드를 받았다. 당시 RUF는 민간인의 팔다리를 자르는 등 학살을 자행했고, 소년병을 징집해 내전에 투입하는 등 반인륜적 만행을 저질렀다. 시에라리온 내전 기간에 12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피의 다이아몬드’ 50년형 선고

테일러는 라이베리아에서 반군단체인 라이베리아 애국전선(NPFL)을 이끌던 군벌 지도자 출신이다. 그는 내전이 종결되면서 1997년 대통령이 됐다. 총으로 권좌에 앉았던 그도 2003년 또다시 내전이 벌어지면서 반군들의 공세가 거세지자 나이지리아로 망명했다. 유엔과 시에라리온 특별재판소(SCSL)는 같은 해 테일러에 대한 체포영장을 발부했다.

테일러는 2006년 3월 체포된 후 11개 반인도적 범죄와 전쟁범죄 혐의로 기소됐다. 2010년 재판 과정에서 그가 세계적인 슈퍼모델 나오미 캠벨에게 다이아몬드를 선물했던 사실이 드러나 화제가 되기도 했다.



시에라리온 특별재판소는 5월 31일 테일러에 대해 징역 50년형을 선고했다. 전 세계 전·현직 국가원수 가운데 국제법정에서 사법적 단죄를 받은 것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독일 나치 전범에 대한 뉘른베르크 법정의 판결 이래 이번이 처음이다. 시에라리온 특별재판소는 2002년 시에라리온 정부가 내전 과정에서 밝혀진 국내외 전범들을 처벌하려고 유엔에 요청해 안전보장이사회(이하 안보리) 결의 1315호에 따라 설립한 법원이다. 테일러에 대한 판결은 국제사회가 시간이 걸리더라도 반인도적 범죄를 엄격히 단죄하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테일러에 대한 판결을 계기로 국제사회의 관심이 전범과 독재자들의 처벌 여부에 쏠리고 있다. 전범은 통상적으로 침략전쟁을 벌였거나, 전쟁수행 과정에서 국제법상 전투 법규와 관례를 위반하는 등 전쟁범죄를 저지른 사람을 말한다.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일과 일본 전범은 각기 독일 뉘른베르크와 일본 도쿄에서 국제군사법정의 재판을 받았다.

이후 전범이 쟁점으로 떠오른 것은 1990년대 들어 르완다 내전과 옛 유고연방 내전을 계기로 인종청소와 반인도적 범죄를 국제사회가 처벌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면서부터다. 원래 주권국가 내에서 발생하는 각종 범죄는 그 나라의 사법시스템이 수사와 재판을 통해 국내법 규정에 따라 정의를 구현하는 것이 원칙이다.

하지만 권력을 장악한 독재자가 무고한 국민을 대량학살하거나 내전으로 몰아가는 등 천인공노할 범죄를 저지르는 경우 주권국가의 내부 문제라는 이유로 그것을 수수방관한다면 인류의 보편적 양심이나 국제사회의 정의에 어긋난다. 현재 반인도적 범죄를 저지른 전범을 처벌하는 곳은 유엔 국제형사재판소(ICC)와 특별재판소 5개가 있다. ICC는 상설기관이고 5개 특별재판소는 유엔 안보리 결의에 따라 임시로 세워졌다.

체포영장 17명, 검거 5명

ICC는 집단살해죄, 인도에 반한 죄, 전쟁범죄 및 침략범죄 등 가장 중대한 국제인도법을 위반한 개인을 처벌할 수 있는 상설 국제재판소다. 국제사회는 1998년 로마에서 열린 국제회의에서 ICC 설치에 관한 조약에 합의했고, 2002년 66개국이 이 조약을 비준하면서 ICC가 창설됐다. 로마조약은 현재 121개국이 비준했다. ICC는 네덜란드 헤이그에 본부를 두고 있으며 재판부는 재판관(판사) 18명으로 구성돼 있다. ICC 소장은 우리나라의 송상현 전 서울대 법대 교수다.

ICC는 지금까지 모두 28명을 기소했으나 2명은 사망하고 4명은 기소가 취소돼 22명에 대한 법적 절차가 진행 중이다. 체포영장이 발부된 17명 가운데 5명만 검거돼 재판을 받고 있다. ICC가 현직 국가원수에게 체포영장을 발부한 것은 2008년 오마르 알 바시르 수단 대통령이 처음이다. 바시르는 2003~ 2009년 30만 명이 숨진 다르푸르 대학살과 관련한 전쟁범죄와 집단살해, 학살 혐의를 받고 있다.

ICC는 지난해 6월 무아마르 카다피 전 리비아 국가원수에 대해 반인도적 범죄를 저질렀다는 이유로 체포영장을 발부했지만, 카다피는 그해 10월 시민군 병사들에게 체포, 사살됐다. 로랑 그바그보 전 코트디부아르 대통령은 ICC 설립 이후 전·현직 국가원수로서는 처음으로 전범 재판을 받고 있다. 반인도적 범죄 혐의를 받고있는 그바그보는 지난해 11월 대선에서 패배했지만 권좌에서 물러나기를 거부하면서 내전을 촉발했다. 이 내전으로 3000여 명이 사망했다.

ICC 창설 이전에는 특정 전쟁이나 국가에서 벌어진 사태만을 대상으로 특별재판소가 설치돼 전범을 처벌해왔다. 현재 운영 중인 특별재판소는 옛 유고연방 국제형사재판소(ICTY)를 비롯해 시에라리온 특별재판소, 르완다 국제형사재판소(ICTR), 캄보디아 특별재판부(ECCC), 레바논 특별재판소(STL) 등이 있다.

ICTY는 제2차 세계대전 전범 처벌 이후 처음으로 설치된 전범 처벌 국제기구다. 유엔 안보리가 1993년 2월 옛 유고연방에서 벌어진 내전에서 전범 문제를 다룰 국제재판소 설치를 결정하는 결의 827호를 통과시킴에 따라 출범한 이 재판소는 현재 ‘발칸의 도살자’로 악명 높았던 라도반 카라지치에 대한 재판을 진행 중이다. 카라지치는 보스니아 세르비아계 지도자로 1992~95년 보스니아 전쟁 때 무자비하게 ‘인종청소’를 자행한 혐의를 받고 있다. 당시 보스니아 전쟁에서 민간인 25만여 명이 사망했다. 특히 1995년 7월 유엔이 안전지대로 선포한 스레브레니차에선 무슬림 난민 8000여 명이 학살된 바 있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에서 자행된 최악의 학살사건으로 불린다.

보스니아 전쟁이 종결된 후 카라지치는 13년간 피신생활을 해오다 2008년 7월 세르비아 수도 베오그라드에서 체포됐다. 카라지치는 조만간 재판에서 유죄판결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ICTY에선 5월 16일부터 ‘발칸의 도살자’라고 부르는 라트코 믈라디치에 대한 재판도 진행하고 있다. 믈라디치는 보스니아 세르비아계 군사령관으로 스레브레니차 학살을 명령한 장본인이다. 그는 종전 후 숨어 지내다 지난해 5월 세르비아에서 붙잡혔다. 그에 대한 재판은 3년 정도 걸릴 예정이다.

ICTR는 1994년 르완다에서 발생한 대학살 사건을 다루기 위해 세워진 국제사법기구다. 르완다 대학살 사건은 1994년 당시 다수 종족인 후투(Hutu)족 출신 대통령이 피살되자 이에 대한 보복으로 후투족이 100일간 소수민족인 투치(Tutsi)족 주민 80만 명을 살해한 것을 말한다.

유엔 안보리는 1994년 11월 ICTR 설치를 결정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ICTR는 1997년 첫 재판에서 대학살 당시 르완다 총리였던 장 캄반다에게 종신형을 선고했다. 지난해 폴린 니라마수후코 전 가족여성부 장관에게도 종신형을 선고했다. ICTR는 아직 전범들이 모두 체포되지 않았기 때문에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현재까지 체포되지 않은 르완다 전범은 모두 9명이다.

국내법에 따라 단죄될 수도

전범과 독재자 심판 정의는 시퍼렇게 살아 있다

라도반 카라지치 전 보스니아 세르비아계 지도자.

STL은 2005년 2월 레바논 수도 베이루트에서 폭탄테러로 레바논 전 총리이자 당시 야당 지도자 라피크 하리리 등 22명이 숨진 사건의 책임자를 처벌하기 위해 설립됐다. STL은 국내법인 레바논 형법과 관련 특별법만을 준거법으로 정해 다른 국제형사재판기구들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ECCC는 캄보디아 크메르루주 공산정권(1975~79년) 당시 사회개조 등을 명분으로 주민 170만~220만 명을 학살한 책임자들을 처벌하려고 만든 국제사법기구다. 유엔과 캄보디아 정부는 2001년 8월 논란 끝에 특별재판부 구성에 관한 법안에 서명한 바 있다. 크메르루주 정권을 단죄하는 기구를 만드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은 크메르루주 사령관 출신인 훈 센 캄보디아 총리의 소극적인 태도 때문이다.

캄보디아 정부와 유엔은 재판의 공정성을 위해 재판소를 네덜란드 헤이그에 둘 것인지, 캄보디아 국민의 법적 심판권을 인정해 프놈펜에 둘 것인지를 놓고 갈등을 겪었다. 우여곡절 끝에 2006년 프놈펜에 ECCC를 세웠지만, 재판관 구성을 둘러싼 갈등으로 또다시 수년이 지나갔다.

결국 ECCC는 지난해 6월 이른바 ‘킬링 필드’로 악명을 떨친 크메르루주 정권의 핵심인사 4명에 대한 재판을 시작했다. 피고인은 크메르루주 정권의 2인자 누온 체아 전 공산당 부서기장, 키우 삼판 전 국가 주석, 아엥 사리 전 외교부 장관과 그의 부인 아엥 타리트 전 사회부 장관이다. 크메르루주 정권의 1인자였던 폴 포트 총리는 태국과의 국경지역에서 숨어 살다 1998년 사망해 재판 대상에 들어가지 않았다.

이들 4명은 앞으로 유죄판결을 받을 것이 확실하지만 모두 80대 고령이어서 재판부가 최종 판결을 내놓기 전에 사망할 가능성이 있다. ECCC는 올 2월 크메르루주 정권에서 비밀감옥 투올 슬랭의 교도소장을 지낸 카잉 구에크 에아브에게 종신형을 선고했다. 크메르루주 정권의 고위 인사들 중 처벌이 확정된 것은 그가 처음이다.

전범이나 독재자가 ICC나 특별재판소에서 처벌받지 않고 국내법에 따라 단죄될 수도 있다. 30년간 이집트를 철권 통치하다 물러난 호스니 무바라크 전 대통령은 6월 2일 1심 재판에서 민주화 시위대를 강경 진압해 850여 명을 숨지게 한 혐의로 25년형을 선고받았다. 무바라크가 84세 고령인 점을 감안하면 사실상 종신형인 셈이다. 비록 국제법정에서 전범으로 단죄되지는 않았지만 국내 법정에서 전범에 준하는 처벌을 받은 셈이다.

사담 후세인 전 이라크 대통령도 2006년 12월 국내 법정에서 재판을 받고 교수형을 당했다. 당시 이라크 특별법원은 1982년 두자일 마을 시아파 주민 148명에 대해 학살 명령을 내린 혐의를 인정해 후세인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두자일 학살 사건은 후세인이 바드다드 북쪽 90km에 있는 시아파 무슬림 거주지역인 두자일 마을을 방문했을 때 괴한의 총격을 받자 이라크 정부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마을 전체 주민 600여 명을 고문한 끝에 단 2주간의 재판을 통해 최소 148명을 처형했던 것을 말한다.

전범이나 독재자가 운 좋게 단죄를 피해 자연적으로 사망할 수도 있다. 이디 아민 전 우간다 대통령은 수십만 명을 학살했지만, 사우디아라비아로 망명해 은둔생활을 하다 2003년 80세로 숨졌다.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전 칠레 대통령도 17년 동안 독재자로 군림하면서 수천 명을 정치적 이유로 살해했지만, 2006년 군병원에서 91세로 사망했다.

미·중·러 등은 로마조약 가입 안 해

재판을 질질 끌다가 단죄할 기회를 놓친 경우도 있다.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전 유고 대통령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밀로셰비치는 2001년 체포돼 2006년 3월 재판 도중 감옥에서 심장마비로 숨졌다. 밀로셰비치는 1991~ 99년 코소보, 크로아티아, 보스니아에서 자행된 집단살해, 전쟁범죄, 반인도적 범죄 혐의로 1999년 5월 ICTY에 기소됐다.

국제사회에선 앞으로 ICC의 권한과 기능을 더욱 강화해 반인도적 범죄를 저지른 전범을 강력하게 처벌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현재 ICC의 가장 큰 약점은 체포영장 강제집행권이 없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체포영장이 발부된 국가 지도자가 반정부 세력에 붙잡혀 ICC에 인도되거나 로마조약 체결국 방문 때 해당 국가 정부가 체포해 넘겨줘야 신병을 확보할 수 있다.

ICC 설치 근거인 로마조약의 체결국에서는 ICC 수사관이 해당 국가의 경찰을 지휘해 신병 확보에 나설 수 있다. 하지만 조약 체결국이 아니면 현지 경찰에게 체포영장을 집행하거나 ICC 수사관에 협력할 국제법적 의무가 없다. 이런 문제는 체포영장이 발부된 바시르 수단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한 데서도 잘 드러난다.

미국, 중국, 러시아 등 강대국이 로마조약에 가입하지 않은 것도 문제다. 미국 등은 자국민 소추에 따른 주권침해 등을 이유로 로마조약에 가입하지 않았다. 하지만 미국의 국가안보 전략이나 외교정책은 인권 보호를 우선시한다. 특히 미국은 그동안 국제사회에서 자국민을 잔인하게 죽이는 독재자들의 만행을 규탄하는 데 앞장서 왔다. 이런 미국이 로마조약에 가입하지 않는 것은 모순적 태도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미국은 로마조약에 가입해 ICC를 인정하고 잔혹한 독재자들을 정의의 법정에 세울 필요가 있다. 중국과 러시아도 자국의 인권문제에서 자유롭지 않기에 로마조약의 가입을 회피하고 있다. 그럼에도 ICC는 존재 자체로 가치를 평가받아야 한다. 전범은 사망하지 않는 한 언젠가는 반드시 ‘정의의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두려움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ICC의 구속영장은 시효가 없기 때문에 체포를 피할 수 없다. 전범이나 독재자가 다른 국가로 망명한다 해도 잡힐 가능성은 늘 있다. 무엇보다 전범이나 독재자는 예외 없이 정의의 심판을 받도록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주간동아 2012.06.11 841호 (p40~43)

  • 이장훈 국제문제 애널리스트 truth21c@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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