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40

2012.06.04

“양육비 내라 vs 한 푼도 못 줘”

이혼 부부의 양육비 갈등 씁쓸한 천태만상

  • 박은경 객원기자 siren52@hanmail.net

    입력2012-06-04 13:39: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양육비 내라 vs 한 푼도 못 줘”

    4월 9일 서울가정법원 양육비위원회 주최로 열린 시민배심법정.

    #1 지난해 협의이혼한 30대 여성 A씨는 7세와 9세 자녀를 키운다. 이혼 당시 양육비를 아이 1명당 50만 원씩 주기로 한 40대 회사원인 전남편은 처음 두 달만 양육비를 준 뒤 갑자기 못 주겠다고 통보했다. 아직 어린 아이들을 보살펴야 해 취업할 수 없는 A씨는 전남편에게 “양육비를 주지 않으면 아이를 키울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아이들을 보육기관에 보내버리겠다”는 으름장이었다.

    #2 6년 전 이혼하고 혼자 살던 40대 여성 B씨는 지난해 10월부터 중학생, 대학생 아들과 함께 산다. 이혼 후 아빠와 살던 아이들을 여러 사정으로 B씨가 떠맡은 것. 그런데 번듯한 기업에 다니며 450만 원의 월수입이 있는 전남편은 B씨에게 아이들을 맡긴 뒤 양육비를 주지 않는다. 올해 고등학생이 된 둘째 아들의 학원비 등 돈 들어갈 일이 많지만 전남편은 회사에서 나오는 자녀 교육비마저 주지 않아 B씨의 애를 태운다.

    “혼자 벌어 아이 키우기 힘들어…”

    자녀 양육비가 무서워 결혼을 미루거나 포기하는 독신이 늘고 있다. 결혼해도 아이를 낳지 않고 사는 딩크족이 생겨난 지는 이미 오래다. 아이 한 명을 키우려면 경제적 부담이 만만치 않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혼 후 홀로 아이를 키우는 전 배우자에게 양육비를 주지 않는 사례가 최근 급증하고 있다. “위자료를 지급하고 재산분할까지 해줬는데 양육비를 왜 주느냐” “미워서 너한테는 한 푼도 못 주겠다” “재혼해 새아빠가 생겼는데 내가 왜 양육비를 주느냐”는 등 이유도 가지가지다.

    한국가정법률상담소에 따르면 지난해 양육비 관련 상담은 436건에 달했다. 이는 전년도에 비해 30% 증가한 수치다. 양육비 관련 상담이 급격히 늘어난 이유는 부부가 이혼 당시 서로 합의하에 양육비 부담조서를 작성했는데도 양육비를 제대로 주지 않는 사례가 많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치사해서 양육비를 안 받겠다”고 포기하는 여성이 많았지만 지금은 혼자 벌어 아이 키우기가 쉽지 않다는 현실적 이유도 작용한다. 거기에 재산명시·재산조회 신청, 양육비 직접지급명령 신청, 일시금 지급명령 신청 등 양육비 지급과 관련한 가사소송법이 강화되고, 여성가족부가 정부·민간의 법률구조기관과 연계해 무료법률 지원에 나서면서 정보에 밝은 여성의 의식이 깬 점도 양육비 관련 상담이 증가한 이유다.



    법적으로 양육비 지급과 이혼 전 양육비 부담조서 작성을 의무화하는 등 국가적으로 양육비 지급의 중요성을 강화했음에도 양육비 관련 상담이 증가하는 것은 그만큼 양육비 지급을 회피하는 부모가 우리 사회에 많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여성가족부가 지난해 발표한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자녀 양육비 이행 관련 실태조사’에 따르면 ‘자녀 양육비 이행청구’ 법률지원 서비스 이용자 483명 가운데 35%인 169명이 전 배우자로부터 양육비 지급 판결을 받아냈음에도 양육비를 받지 못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그중 경제 능력 부족으로 양육비를 못 주는 경우는 19.5%에 그쳤다.

    이혼했다고 쌍방 합의와 법을 무시하면서까지 자녀를 ‘나 몰라라’ 하는 부모는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실태를 보면 그 유형은 다양하다.

    전 배우자가 양육비 문제로 전화를 걸면 일부러 안 받고 피하는 회피형, 아예 이사를 가거나 직장을 바꾸고 전화번호까지 바꾸는 잠적형, 언제 주겠다며 차일피일 미루는 위기모면형, “양육비를 핑계로 전부인(혹은 전남편)을 만나는 게 싫다고 한다”며 재혼한 배우자 핑계를 대는 핑계형이 있다. 또한 법정에 불려나와서까지 “사정이 어렵다” “10만 원만 깎아달라”고 하소연하는 읍소형도 있다. 심지어 양육비를 주지 않으려고 고의적으로 타인 명의로 재산을 빼돌리거나 “양육비를 요구하면 아이 양육권을 빼앗겠다”고 협박하고 언어폭력을 행사하는 유형도 있다.

    재산도피형은 법적 판결을 받아도 현실적으로 양육비를 받아내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남편의 상습적인 음주와 폭력을 견디다 못해 생후 8개월 된 아기를 데리고 도피하다시피 친정으로 들어간 30대 여성 C씨는 집을 나온 지 두 달 만에 남편을 상대로 이혼소송을 제기했다. 그와 동시에 남편 소유의 아파트를 가압류했지만 시부모와 남편은 한발 앞서 ‘시아버지의 아들집 가압류 → 경매 처분 → 시어머니 낙찰’ 방식으로 집을 빼돌려 이혼 후 양육비를 한 푼도 받을 수 없었다. 이혼 직후 중형차를 새로 뽑는 등 남편의 행태가 괘씸했던 C씨는 양육비 이행명령 신청, 양육비 강제집행 신청 등 법적 수단을 총동원했지만 허사였다. 법원에서 전남편을 부를 때마다 그는 꼬박꼬박 출석해 “돈이 없어 못 준다”며 ‘배 째라’식으로 나왔던 것.

    여성가족부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양육비 지급 판결을 받은 483명 가운데 절반 이상이 ‘월 30만 원 지급’ 판결을 받았다. 월 20만 원 이하 판결을 받은 사람도 10명 중 1명꼴이었다. 양육비 이행청구를 한 쪽은 97.7%가 여성이었다.

    외국에선 생존권 위협 중대 범죄

    “양육비 내라 vs 한 푼도 못 줘”

    (사)한국한부모가정사랑회의 부모-자녀 교실 프로그램(위). 양육비 소송 관련 무료 법률지원 홍보 포스터.

    한국가정법률상담소 상담위원이자 법률구조를 맡고 있는 박소현 부장은 “자기 몸만 부지런히 놀리면 비정규직 남성이라도 최소 월 150만 원은 벌 수 있다. 진짜 형편이 어려워 자녀 양육비를 못 주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정 어려우면 형편이 되는 대로 10만 원이든 20만 원이든 양육비를 달라는 요구마저 무시하는 경우가 많다”며 안타까워했다.

    이혼 후 자녀 양육비를 둘러싼 갈등은 비단 ‘돈 문제’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심각성이 더하다. 박 부장은 “이혼과 상관없이 자녀에 대한 책임과 의무는 부모 중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다. 그럼에도 ‘내가 직접 키우지 않으니 내 아이가 아니다’라는 식으로 무책임하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아이에게 큰 상처가 될 수 있다. 양육비 지급은 아이의 정서적 안정에 기여하는 측면도 크다”며 답답해했다.

    외국의 경우 양육비 지급 책임을 다하지 않으면 생존권을 위협하는 중대 범죄행위로 간주해 여권 발급 불허, 세금 징수, 면허 취소 등 다양한 방법으로 이행강제 수단을 행사한다. 호주는 6개월의 ‘자유형(구속)’에 처할 수 있도록 규정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18개국은 국가가 양육비를 먼저 지급한 뒤 구상권을 행사하는 양육비 대지급 제도를 운영 중이다. 우리나라도 제도 도입을 위해 18대 국회 당시 강명순 새누리당 의원이 ‘양육비 대지급 법안’을 대표 발의했지만 18대 국회 임기 종료로 자동폐기됐다. 한국가정법률상담소는 제도 도입을 위해 5년째 온라인 서명운동을 벌이고 있다.

    한편 서울가정법원은 4월 양육비위원회 주최로 시민배심법정을 열었다. 시민 의견을 들어 현실에 맞게 새로운 양육비 산정 기준을 마련하기 위한 것. 여성가족부는 양육비 지급을 회피하는 부모를 대상으로 출국 금지, 금융거래와 운전면허 정지 등 사회적 활동을 제한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양육비를 떼먹는 부모가 설 땅은 갈수록 좁아질 것이다. 하지만 법과 제도에 앞서 무엇보다 미성년 자녀를 끝까지 책임져야 한다는 부모로서의 인식 전환이 시급해 보인다.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