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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오은의 vitamin 詩

서로의 속눈썹을 얼굴로 쓰다듬듯

서로의 속눈썹을 얼굴로 쓰다듬듯

서로의 속눈썹을 얼굴로 쓰다듬듯
획(劃)

새들이 마주 오는 죽은 새들을 마주칠 때

그들은 서로의 속눈썹을 얼굴로 쓰다듬고 지나간다

바람은 그 높이에선 늘 눈을 감는다

서로 다른 붓털이 만나서 만들어 가는 하나의 획



이상하게 한 획을 긋는 붓에서는 바람 냄새가 난다

붓을 삶는다

삶은 붓은

혈압에 좋다

― 김경주 ‘시차의 눈을 달랜다’(민음사, 2009)에서

서로의 속눈썹을 얼굴로 쓰다듬듯

5학년 때 전학을 했다. 새로운 학교는 전에 다니던 학교보다 규모가 작았다. 한 학년에 반이 달랑 두 개였다. 전학생이 으레 겪듯, 나는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한동안 이런저런 질문 공세에 시달려야만 했다. 왜 이 학교를 골랐니? 집은 어디니? 게임은 잘하니? 무슨 운동을 즐겨 하니? 좋아하는 연예인은 누구니? 질문은 한도 끝도 없었다. 문득 노란 머리칼에 푸른 눈을 가진 이국의 아이가 떠올랐다. 외롭고 퍽 근사했다. 전학을 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나는 한동안 주인공 행세를 할 수 있었다.

역설적이게도, 쉬는 시간이 끝나야 비로소 쉴 수 있는 시간이 찾아왔다. 내 자리는 창문 옆이었다. 수업 시간에 이따금 창밖을 내다보면 새들이 운동장에서 모이를 쪼아 먹었다. 옹기종기 모인 새가 느닷없이 푸드덕대며 날아오를 때, 나는 온몸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새 한 마리가 솟구치다가 바닥으로 곤두질하는 모습을 보고 만 것이다. 나는 나직이 탄식했다. 도대체 추락한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눈을 감으면 그 새의 동선이 머릿속에 펼쳐졌다. 수업 끝나는 종이 울렸다. 내 주위로 아이들이 몰려들었지만 어떤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며칠 후 선생님께서 나를 따로 부르셨다. 특별활동을 하나 골라야 한다는 게 그 이유였다. 전학생이 선택할 수 있는 특별활동은 많지 않았다. 인기 있는 클럽은 이미 정원이 다 찬 상태였기 때문이다. 별수 없이 서예부에 들어갔지만, 나는 오히려 운이 좋다고 느꼈다. 한동안 조용히 지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정말이지 침묵이 필요했다. 가만히 사색에 잠길 수 있는 최소한의 시간이 절실했다. 너무 많은 말에 둘러싸여 있었지만, 거기에 정작 내 말은 단 한 마디도 없었다. 근사함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외로움이 들어섰다.

수업이 다 끝나면 서예부 학생들은 한 반에 모였다. 무엇보다 정갈한 마음을 갖는 게 중요했다. 그러나 창밖을 바라보면 축구공과 농구공이 사방팔방 날아다녔다. 전쟁 통에도 꾸역꾸역 공부를 하겠다고 책상 앞에 앉은 꼴이었다. 집중하는 게 결코 쉽지 않았다. 다섯 명의 서예부원은 나란히 앉아 심호흡을 했다. 깔판을 깔고 화선지를 펼쳤다. 그것을 서진으로 고정하며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았다. 연적에 담은 물을 벼루에 넣고 정성스레 먹을 갈았다. 물을 먹은 먹에 점성이 생겼다. 붓은 그 먹물을 자신의 몸 깊숙이 빨아들였다. 그렇게 묵묵히 젖어들었다.

서로의 속눈썹을 얼굴로 쓰다듬듯
우리는 숨죽인 채로 사이좋게 “획”을 그었다. 위에서 아래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획을 그을 때마다 그 새가 자꾸 떠올랐다. 화선지가 꼭 운동장 같았다. “서로의 속눈썹을 얼굴로 쓰다듬”듯, 우리는 화선지 위를 조심스레 미끄러졌다. 가로와 세로가 만나면 먹물이 더 번졌다. 바람과 붓끝, 종이가 사락사락 스치는 소리를 냈다. 여기 어딘가에서 “바람 냄새”가 나는 것도 같았다. 그날, 우리는 일렬로 앉아 가만히 “하나의 획”이 되됐다. 둘도 없는 “서로의 속눈썹”이 됐다.

*오은 1982년 출생. 서울대 사회학과와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 졸업. 2002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으로 ‘호텔 타셀의 돼지들’이 있음.



주간동아 827호 (p7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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