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14

2011.11.28

“도가니 사건 일단락? 최소 30명 참혹하게 당했다”

광주인화학교 피해자 진료 신의진 교수 “소설·영화가 오히려 피해 축소”

  • 송화선 기자 spring@donga.com

    입력2011-11-28 11:5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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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가니 사건 일단락? 최소 30명 참혹하게 당했다”
    “우리가 가해자를 처벌하고 학교 법인을 해산하는 데 관심을 쏟는 사이, 피해자들은 남모를 고통에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피해자 중 상당수가 지금도 사건 당시의 기억 때문에 잠을 설치고, ‘이런 얘기하면 선생님(가해자)이 잡으러 올지 모른다’고 얘기할 정도로 공포를 느끼고 있어요. 그들의 머릿속에서 이 사건은 여전히 현재 진행 중입니다.”

    11월 초 영화 ‘도가니’를 통해 널리 알려진 광주인화학교 성폭력 사건 피해자들을 상담 및 진료한 신의진 연세대의대 정신과 교수는 “피해자 대부분이 심각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고 말했다. 우리 사회가 가해자의 죄상을 밝혀내고 처벌과 재발 방지에 골몰하는 사이, 정작 피해자가 받은 엄청난 정신적 충격을 치유하고자 하는 노력은 전혀 없었던 것. 신 교수의 확인 결과, 피해자들은 지금껏 단 한 번도 정신과 상담이나 치료를 받지 못한 것으로 드러났다. 뒤늦게 시작한 정신과 진료에서 피해자가 당초보다 훨씬 더 많고 피해 수준도 알려진 것보다 더 참혹했다는 사실이 속속 밝혀지고 있는 것.

    “정신과 진료를 위한 정밀 검사 과정에서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학교 내 성폭력 사건이 새롭게 드러났어요. 새로 드러난 사건은 기존에 알려진 것보다 더 참혹합니다. 피해자도 당초 10여 명을 넘어 최소 30명 수준이고, 그동안 드러나지 않았던 가해자에 대한 증언도 나오고 있어요.”

    신 교수는 “새로 밝혀진 사건 내용에 대해 의료진뿐 아니라 검사에 동행한 인화학교성폭력대책위(이하 대책위) 관계자들도 크게 놀랐다”며 “진작 전문적인 진료를 받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모두 안타까워하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전문가 없이 진행된 기존 조사 때 피해자들이 미처 떠올리지 못하거나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 내용이 이제야 밝혀지고 있는 것이다.

    심심풀이 땅콩처럼 성폭행·성추행



    “도가니 사건 일단락? 최소 30명 참혹하게 당했다”

    10월 17일 광주인화학교 동문 150여 명은 광주시 광산구 삼도동 광주인화학교 앞에서 규탄대회를 연 뒤 농아로서 인화학교 교사로 재직했던 김영일 씨가 50여 년 전 학생을 학대해 숨지게 한 후 암매장했다고 주장하며 당시 상황을 증언하고 있다.

    이번 상담은 영화 ‘도가니’ 개봉 후 광주시가 피해자의 심리진단비, 입원치료비 및 수화 통역비 일체를 지원하기로 결정하면서 이뤄졌다. 광주지방경찰청도 피해자와 보호자, 대책위 관계자 등이 경찰차를 이용해 서울에 오가도록 배려했다. 신 교수가 이들의 진단과 치료를 맡게 된 건 오랫동안 어린이 성폭력 피해자 치료에 관심을 쏟아왔기 때문이다. 11월 6일부터 닷새간 15~35세 피해자 8명을 대상으로 정밀 검사와 상담을 진행했다. 지금은 단계적인 치료 계획을 세우는 중. 11월 말에는 대책위와 공동 기자회견을 열고 정확한 진단명과 피해 내용 등을 밝힐 예정이다.

    신 교수가 이에 앞서 기자와 인터뷰를 가진 이유는 “그 전에라도 이들이 현재 심각한 정신적 고통을 겪고 있으며, 그것을 치유하려면 사회적 관심이 절실한 상황이라는 사실을 알리고 싶은 마음”에서다. 그는 “나영이를 비롯해 수많은 성폭력 피해자를 만나고 치료해왔지만 이번처럼 막막하고 가슴 아픈 적은 처음”이라며 입을 열었다.

    “정치권 인사 가운데 한 명이 ‘공지영 씨가 사건을 사실보다 과하게 묘사했다’고 얘기했다는데, 그가 과연 사실에 대해 아는지 묻고 싶어요. 공지영 씨에게 문제가 있다면 오히려 사건을 너무 축소했다는 점일 겁니다. 아이들이 겪은 일은 일일이 묘사할 수 없을 정도거든요.”

    이번 상담 과정에서 나온 피해자의 증언에 따르면, 광주인화학교에서는 교사가 체벌 수단으로 아이들 입에 혀를 넣었다. 교사가 아이들이 다 보는 앞에서 자신에게 구강성교를 시켰다고 증언한 피해자도 있다. 3명을 불러다놓고 돌아가며 하도록 시켰다는 증언도 있다. 온몸이 묶인 채 성폭행당한 뒤 그대로 13시간 동안 방치됐던 피해자도 있다. 신 교수는 “이들을 검사한 심리평가사는 오랜 임상경험을 거친, 잘 훈련된 분인데도 얘기를 듣다 말고 울었다. 못할 말을 섞어서 얘기하면, 기숙학교 하나 차려놓고 말 못하는 아이들을 모아다가 심심풀이 땅콩처럼 성폭행하고 성추행한 것”이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도가니 사건 일단락? 최소 30명 참혹하게 당했다”

    신의진 연세대 의대 정신과 교수(왼쪽). 영화 ‘도가니’의 한 장면.

    이 과정에서 피해자들은 심각한 트라우마를 입은 것으로 밝혀졌다. 한 피해자는 남자를 그려보라는 주문에 바지 앞쪽 지퍼를 과장될 만큼 선명하게 그렸다. 성폭행 피해자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다른 피해자도 부리부리하게 큰 눈부터 그리거나, 손을 아예 그리지 않는 등 자신이 겪은 사건을 연상 또는 회피하는 방식으로 남자를 표현했다. 또 다른 피해자는 언어 검사에서 거의 모든 단어를 성폭력과 연결 지었다. ‘경멸하다’라는 단어의 뜻을 물으면 ‘성폭행을 당해서 경멸당한다’라고 대답하는 식이다.

    소설 ‘도가니’에서 청각장애 학생을 성폭행한 교장이 유일하게 구사하는 수화는 “다른 사람한테 말하면 죽는다”였다. 실제 광주인화학교 상황이 그랬다. 이 학교에는 사건 당시 수화를 제대로 할 줄 아는 교사가 한 명도 없었다. 국가인권위원회가 2006년 직권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다른 특수학교 상황도 다르지 않다. 당시 전국의 청각장애 특수학교 교사 548명 중 수화통역사 자격증을 소지한 이는 21명으로 3.8%에 불과했다. 수화를 할 줄 모르는 교사와 일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학생 사이에서 어떻게 교육이 이뤄졌을지 짐작하기란 쉽지 않다.

    농아인의 지능이 일반인보다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신 교수가 피해자를 대상으로 지능검사를 실시한 결과, 3명을 제외한 모두가 정상 범위였다. 성폭력 피해를 가장 많이 당한, 가장 지능이 낮은 피해자의 인지능력도 7~8세 수준으로 검사됐다. 신 교수는 “아이들이 제대로 된 교육만 받았어도 일반 언어를 정확히 구사할 수 있었을 테고, 좀 더 일찍 사건을 외부에 알렸을 것”이라고 했다가 곧 “아니, 아이들이 그럴 수 있었다면 교사가 이들을 함부로 대하지도 못했을 것”이라고 말을 고쳤다. 이번 상담은 광주인화학교 사건이 알려졌을 때부터 피해자를 도와온 수화통역사가 모든 내용을 통역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의료진의 말을 수화로 옮기고 수화를 다시 일반 언어로 옮기느라 시간이 평소보다 배 이상 걸렸어요. 긴 검사 시간 동안 피해자들이 지치지 않도록 계속 다독이고 달래야 했죠. 과연 경찰 조사 때도 이렇게 했을까, 아이들이 하고 싶은 말을 충분히 다 할 수 있었을까 의문이 들더군요. 이번 일을 계기로 의료진 모두 ‘수화를 배워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미국이나 유럽에는 수화를 할 줄 아는 상담 전문가가 많아요. 하지만 우리나라에는 전무하죠.”

    약자 배려 없는 우리 사회의 모습

    신 교수는 “‘도가니’ 사건 뒤에는 약자를 배려할 줄 모르는 우리 사회의 본질적인 문제점이 있다”면서 “시스템을 바꾸지 않는 한 이런 사건은 반복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도가니’ 사건에 분노한 사람들이 뜻을 모아 5년만 요구하면 사회를 바꿀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일단 특수학교 교육시스템을 바로 세워서, 농아인이 일반인의 말을 읽고 쓸 수 있도록 가르치는 게 중요합니다. 의대도 특별 전형 등을 통해 수화 가능자를 선발하고, 일정 규모 이상의 병원에는 반드시 수화 통역자를 배치하도록 제도화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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