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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포도원 기행

인생은 짧고 와인은 많다, 시음 기회가 없을 뿐

페퍼 트리 와이너리

  • 박일원·호주여행전문칼럼니스트 bobbinhead@gmail.com

인생은 짧고 와인은 많다, 시음 기회가 없을 뿐

인생은 짧고 와인은 많다, 시음 기회가 없을 뿐
‘포도원 기행’은 와인에 대한 천편일률적 지식이나 이론 혹은 까다로운 예법을 따지는 기존 와인 이야기와는 다르다. 호주의 유명 와인 산지를 직접 찾아가, 그곳에서 만난 사람과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그들의 인생과 와인 이야기를 담았다. 전직이 판사, 의사, 신문기자, 화가, 항공기 조종사, 철학 교수인 양조장 주인으로부터 포도농장을 하게 된 동기, 그리고 와인에 대한 독특한 인생철학과 애환, 사랑 이야기를 직접 듣고 채록했다.

페퍼 트리(Pepper Tree)는 지금껏 둘러본 헌터밸리의 와이너리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곳이다. 중세 귀족 저택의 정원처럼 잘 가꿔진 포도원은 한쪽으로 포도밭을 거느리고 다른 한쪽으로는 방금 깎았는지 풀 향기가 물씬 풍겨오는 잔디밭이 평화롭게 펼쳐진다.

하오의 뙤약볕이 자글자글 깔린 주차장을 지나자 라벤다와 들꽃이 흐드러지게 핀 앞마당이 슬그머니 모습을 드러낸다. 품이 넉넉한 후추나무 서너 그루가 양팔을 벌린 채 잔디밭에 그늘을 드리우고 서 있다. ‘페퍼 트리’라는 와이너리 이름이 거기서 유래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시음장에 들어서니 비발디의 ‘사계’가 흘러나온다. 후추나무처럼 넉넉하고 후덕해 보이는 아주머니가 뽀득뽀득 닦은 와인 잔을 시음 바에 올려놓는다. 필자와 일부의 사람에게만 맛을 보여준다며 한정 판매용임을 누누이 강조한 와인은 2009년도 산(産) 멀롯. 졸졸졸 와인이 잔을 타고 흐르자 이번에는 와이너리를 방문할 때 대접을 잘 받을 수 있는 은밀한 노하우를 들려준다.

시음자가 환영받는 10가지 매너



따라주는 대로 넙죽넙죽 받아 마시다 고꾸라질 정도로 진탕 취해 마침내 배반낭자(杯盤狼藉, 술잔과 접시가 마치 이리에게 깔렸던 풀처럼 어지럽게 흩어져 있다)가 되는 술자리가 최고 미덕인 줄 알았던 필자에겐 생경한 이야기.

하지만 대접을 잘 받을 수 있다는 말에 귀가 번쩍 뜨였다. 그가 말하는 시음자로서 갖춰야 할 환영받는 매너는 이런 것이다.

첫째, 와이너리를 단체로 방문할 경우에는 사전에 예약해 안내를 받아가며 시음에 참가한다. 특히 휴가철이나 주말에는 와인 맛을 보기 위해 많은 사람이 찾기 때문에 몇 명 정도가 언제쯤 방문할 거라는 사실을 미리 얘기해두면 제대로 대접받을 수 있다.

둘째, 그날의 와인 시음에 대해 나름대로 주제의식을 갖고 떠난다. 가령 오늘은 단일 품종으로 만든 세미용이나 쉬라즈를 마셔볼 것인지, 아니면 새롭게 블랜딩한 와인을 맛볼 것인지, 그리고 오랜 역사를 지닌 전통적인 포도원을 찾을 것인지, 아니면 문을 연 지 얼마 안 되지만 나름대로 혁신적인 제조법을 추구하는 와이너리를 찾아갈 것인지를 미리 결정하고 떠나면 그만큼 확실한 성과를 얻을 수 있다.

셋째, 와인 시음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공짜라고 너무 과하게 마셔 취해서는 안 된다. 하루 일정으로 와이너리를 돌아볼 예정이라면 보통은 오전에 두 곳, 점심식사 후 두 곳, 그리고 돌아오면서 마지막으로 한 곳 더 들러 하루에 다섯 군데 정도를 방문하면 적당하다. 그리고 한 곳에서는 대여섯 가지 와인을 맛보는 것이 좋다. 참고로, 시음용으로 따라주는 와인은 다섯 잔 정도의 양이 스탠다드 와인 한 잔에 해당한다.

넷째, 와인을 맛본 후에는 맹물을 마셔 입안을 헹군다. 즉, 먼저 마신 와인의 맛을 입안에서 깨끗이 지우고 새로 따라준 와인을 맛보는 것이다. 그리고 취했다 싶으면 아무리 좋은 와인이 나와도 시음을 삼가야 한다.

다섯째, 와인 바가 붐비는 경우 인내심을 갖고 차분히 자기 순서를 기다린다. 먼저 마신 사람이 자리를 뜨면 그 자리로 들어가 직원의 안내와 상담을 받아 시음한다. 절대로 앞에서 마시고 있는 사람을 밀치고 들어가거나 그들의 어깨 사이로 팔을 뻗어 와인을 요구하지 말아야 한다.

여섯째, 전문가가 권하는 와인에 관심을 갖고, 궁금한 점이 있으면 주저하지 말고 이것저것 물어본다. 그러다 보면 자신이 늘 마셔 익숙하던 와인 외에 새로운 세계를 알게 돼 와인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다. 게다가 눈치가 빠르면 절에 가서도 젓국을 얻어먹는다는 말처럼, 추천 와인에 관심을 보이면 직원은 신이 나 뜻하지 않게 귀하디귀한 고가의 와인이나 한정 판매용으로 나온 와인도 내놓기 때문에 시음자로서는 기가 막히게 좋은 와인을 보너스로 맛볼 수 있는 행운도 얻게 된다.

사랑과 낭만을 찾는 사람들 모여들어

인생은 짧고 와인은 많다, 시음 기회가 없을 뿐
일곱째, 향이 약한 와인에서부터 시작해 점차 강한 와인을 시음한다. 드라이한 화이트 와인을 시작으로 과일 향이 물씬 풍기는 화이트 와인, 가벼운 레드 와인, 무거운 레드 와인 순으로 옮겨간 후 달콤하고 알코올 함량이 비교적 높은 디저트 와인으로 마무리한다.

여덟째, 와인 고유의 향과 맛을 찾으려면 향이 강한 향수, 화장품, 셰이브 로션을 삼가고 껌이나 담배, 향이 강한 음식, 청량음료, 커피를 섭취하지 말아야 한다.

아홉째, 자신이 마신 와인이 무엇인지, 또 어떤 와인이 좋았는지를 확실히 알려면 와인 이름이 적힌 목록표(Tasting Sheet)를 직원에게 요구해 시음할 때마다 자신의 감상과 평가를 표시해 나간다. 그렇게 하면 나중에 다른 데서 와인을 구입하거나 와인바에서 와인을 마실 경우에 큰 도움이 된다.

마지막은 와인을 시음하는 법. 먼저 글라스에 담긴 와인의 색깔을 눈으로 감상하고 잔을 돌려 코로 충분히 냄새를 즐긴 후, 입안에 넣고 향이 퍼지기를 기다렸다가 혀로 돌리면서 맛과 질감을 느끼며, 마지막으로 목 넘김을 하는 것이다. 이 때 만약 입안에 든 와인이 자신이 원치 않는 맛이거나 별로라고 생각되면 옆에 준비된 용기(타구, Spittoons)에 뱉어도 실례가 되지 않는다. 맛없는 와인을 억지로 삼키기에는 우리 인생이 너무 짧고 헌터밸리에는 향기롭고 맛있는 와인이 무진장 쟁여져 있기 때문이다.

셀러도어를 나오면서 먼 곳으로 눈길을 던졌다. 플라타너스 사이로 고색창연한 부속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한때는 속세와 담을 쌓은 수녀원이었으나 이제는 속인이 머물며 사랑도 나누는 호텔로 변한 곳. 그래도 괜찮나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이내 수긍이 가고 고개가 끄덕여졌다. 왜냐하면 여기가 바로 사랑과 낭만을 찾는 사람이 모여드는 헌터밸리기 때문이다.



주간동아 808호 (p64~65)

박일원·호주여행전문칼럼니스트 bobbinhead@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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