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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 ‘님’에서 ‘남’으로, 이혼의 속사정 02

“인간아, 이 인간아”…막장 다툼

이혼 법정에 선 남녀 진흙탕 싸움…상식 수준서 합의해야 상처 덜 받아

  • 송홍근 기자 carrot@donga.com

“인간아, 이 인간아”…막장 다툼

“인간아, 이 인간아”…막장 다툼
L씨는 서울에서 직원 셋을 두고 속기사 사무소를 운영한다. 이혼을 앞둔 부부가 사무소를 먹여 살린다면서 그는 씁쓸하게 웃는다.

“‘님’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만 찍으면 남이라고 하잖아요. 사무실에서 주로 하는 일이 불륜을 자백하는 내용을 담은 녹음을 풀어 녹취록을 만드는 겁니다. 다른 속기사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스마트폰 덕에 녹음이 쉬워지면서 일이 더욱 늘었죠. 별의별 부부가 다 있어요.”

술 찌꺼기와 쌀겨로 끼니를 이으면서도 미래를 함께 꿈꾸는 게 부부라는 오래된 말이 있다. 옛 사람의 이 격언은 케케묵은 지 오래다. 지난해 한국에서 이혼한 부부는 11만6858쌍에 달한다.

부부는 합의하면 언제든 이혼할 수 있다. 가정법원에 ‘협의이혼의사확인신청’을 하고 이혼 안내를 받은 뒤 1개월간의 숙려 기간(양육할 자녀가 있는 경우 3개월)을 거쳐 판사 앞에서 이혼 의사를 확인하면 된다.

회사원 K(39)씨는 이혼 소송 중이다. 부인과는 소문난 잉꼬 부부였다. 아내에게 남자가 생기면서 사이가 멀어졌다.



“이혼 법정은 막장 중 막장이에요. 사람이 얼마나 추해질 수 있는지 배우는 중입니다. 이혼을 결심한 것은 와이프가 외도를 털어놓았기 때문이에요. 저한테 잘못했다, 미안하다고도 했죠. 그런데 법정에선 외도를 부인합니다. 그런 적도 없고, 그런 말을 한 적도 없대요. 플라토닉하게 잠시 좋아했을 뿐이랍니다. 증거요? 물론 없죠. 와이프가 거꾸로 위자료를 받아내려고 해요. 제가 폭력을 행사했다면서요. 둘 다 돈을 더 챙기려고 진흙탕 싸움을 하는 중입니다. 와이프가 퇴직금도 절반을 내놓으라고 하네요. 법적으로 그렇게 해야 한다나요. 이혼한 선배가 ‘막장을 봐야 이혼하고 나서 여봐란 듯 잘살 수 있다’고 하더군요. ‘적당히 합의해주지 말고 끝까지 가라’고도 하고요. 괴로워요, 사는 게. 이혼하는 것도 힘드네요.”

재판을 통해 이혼할 6가지 사유

재판상 이혼은 부부 중 한 명이 가정법원에 소장을 제출해 이혼을 요구하는 것이다. ‘상대방에게 결혼을 파탄 나게 한 중대 사유가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야 한다. 이혼 청구 소송은 재산 분할, 위자료 지급과 맞물려 돌아가면서 부부를 ‘막장’으로 내몬다.

결혼생활을 파탄에 이르게 한 중대 사유가 분명하게 한쪽에 있을 때는 소송 과정이 간결한 경우가 많다.

H씨와 Y씨 부부 사례를 보자. 공무원 H씨는 중국 베이징에서 근무하면서 중국 여성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다. 스캔들을 일으킨 H씨는 서울로 소환돼 조사를 받았다. 부인 Y씨는 H씨에게 위자료 1억 원을 지급하라면서 이혼 소송을 냈다. 언론을 통해 스캔들이 알려지자 Y씨는 위자료를 2억 원으로 올려 소송을 다시 냈다. 법원은 부부에게 강제 조정 결정을 내렸다. H씨는 주택과 양육권을 Y씨에게 넘겨줘야 했다.

민법 840조는 재판을 통해 이혼할 수 있는 사유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H씨는 ①에 해당한다.

①배우자에게 부정(不貞)한 행위가 있었을 때 ②배우자가 악의(惡意)로 다른 일방을 유기(遺棄)한 때 ③배우자 또는 그 직계존속(시부모, 장인, 장모 등)으로부터 심히 부당한 대우를 받았을 때 ④자기의 직계존속이 배우자로부터 심히 부당한 대우를 받았을 때 ⑤배우자의 생사가 3년 이상 분명하지 않을 때 ⑥그 밖에 혼인을 계속하기 어려운 중대한 사유가 있을 때 등이다.

법률이 규정한, 혼인을 계속하기 어려운 중대 사유를 저질러 놓고도 한쪽이 이혼을 거부할 때 소송 이혼이 벌어진다. 이혼 소송을 주로 다루는 변호사는 진단서를 받아놓고, 사진을 찍어두거나 녹음을 해둬야 한다고 조언한다. 하지만 부부간에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증거 찾기 위해 심부름 업소 기웃

“인간아, 이 인간아”…막장 다툼
배우자가 저지른 중대한 잘못 때문에 이혼을 청구하려면 사유가 발생한 날로부터 2년 이내, 사유를 안 날로부터 6개월 이내에 해야 한다. 부정행위를 사전에 동의하거나 나중에 용서한 경우도 이혼할 수 없다. 또한 정황이 아닌 증거가 있어야 한다.

③, ④의 ‘심히 부당한 대우’는 폭행, 학대가 대표적이다. 부부싸움 중 가벼운 폭행이나 감정이 격앙해 욕설을 내뱉은 것은 해당하지 않는다. 결혼생활을 유지하는 것이 한쪽에 가혹할 만큼의 학대나 폭행을 야기했다면 이혼할 수 있다.

이렇듯 한쪽이 이혼을 원하지 않으면 또렷한 증거가 없는 한 갈라서기 쉽지 않다. 상대가 사유를 인정하지 않으면 이혼을 원하는 사람이 이를 입증해야 한다. 증거를 찾고자 심부름 업소를 기웃거리는 이도 없지 않다.

막장 다툼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⑥이다. 내가 잘했느니, 네가 잘했느니 하는 정황 증언이 오가면서 사람을 추하게 만든다.

L(48)씨와 J(46)씨 부부 사례다. 의대를 나온 L씨는 J씨와 결혼한 뒤 풍족한 생활을 했다. 장인이 마련한 돈으로 아파트 등을 샀다. 수년 전 L씨가 지인에게서 “당신 아내가 골프연습장에서 만난 남자와 사귄다”는 말을 들으면서 불화가 생겼다. L씨는 “장인이 집을 사줬다는 말을 계속하면 똑똑한 머리를 자랑할 수밖에 없다. 퇴근 후 피타고라스 공식 등을 물어보겠다”며 맞섰다. 홍시를 먹다가 딸에게 “홍시 2개 중 어느 것이 비쌀까”라고 묻는 L씨에게 J씨가 “가지가지 한다”고 비아냥거렸다. L씨는 “가지가지 하는 게 뭔지 보여주겠다”며 홍시로 벽에다 ‘가지가지’라고 썼다. 판결문은 J씨, L씨의 이 같은 막장 다툼을 고스란히 적었다. 부부는 결혼 후 각자가 번 돈의 양과 재산 형성 기여도를 놓고도 다퉜다. 더 받겠다, 못 주겠다고 싸운 것이다. L씨는 소득명세, J씨는 증여명세를 내놓으면서 맞섰다. 서울가정법원은 파탄의 책임이 동일하다며 양측의 위자료 청구를 인정하지 않았다. 재산은 J씨가 물려받은 비중을 감안해 1(L씨)대 3(J씨)으로 나누라고 판결했다.

이렇듯 ⑥에 해당하는 사례는 복잡하고 다양하다. 이유 없는 성행위 거부, 사회통념에서 벗어난 신앙생활, 과도한 사치 및 낭비, 반복되는 가출, 시부모의 지나친 간섭을 포함한다. 알코올의존증은 이혼 사유가 되지 않지만 지나친 음주로 가정을 돌보지 않은 경우에는 소송으로 다툴 수 있다. 여성이 임신할 수 없다거나 남성의 성 능력이 떨어지는 것은 이혼 사유가 되지 못한다.

성급한 이혼 결정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여생을 고통스럽게 보낼 순 없다. 서울가정법원의 한 판사는 이렇게 말했다.

“어지간하면 소송이 아닌 합의로 이혼하는 게 상처를 덜 받아요. 상식 수준에서 재산 분할, 위자료 지급을 합의하는 게 서로에게 좋습니다. 배우자가 막무가내로 나온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요.”



주간동아 808호 (p18~19)

송홍근 기자 carro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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