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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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리지록의 아이콘 전설로 남다

‘모던록 이전의 모던록’ R.E.M.을 떠나보내며

  • 정바비 bobbychung.com

    입력2011-10-04 11: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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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리지록의 아이콘 전설로 남다
    1981년 데뷔 이래 미국 모던록을 대표하던 R.E.M.이 9월 21일 공식 해체를 선언했다. 31년 5개월 16일 만이란다. 내가 만으로 32세니 이들은 거의 내 나이만큼 밴드를 꾸려온 셈이다. 올해 열다섯 번째 앨범 ‘Collapse Into Now’를 발표하고 호평 속에서 활동하던 중이라 조금 어리둥절한데, 싱어인 마이클 스타이프는 “모든 것은 끝이 있는 법이고 우리는 우리 방식대로 제대로 끝내고 싶었다”는 코멘트를 남겼다. 박수 속에서 떠나고 싶다는 뜻일까.

    30여 년 동안 ‘롤링스톤스’지나 ‘Q매거진’ 등에서 수차례 ‘올해 최고의 밴드’로 뽑혔고, 그래미상 수상은 물론 차트 정상도 숱하게 차지했던 거물급 밴드지만, 이들의 음악은 결코 화려하지 않았다. 록스타 하면 떠오르는 고전적인 이미지와도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R.E.M.은 1988년 빌보드에 모던록 차트가 생기기 훨씬 전부터 현대적 어법의 록을 연주했고, 1991년 너바나(Nirvana)가 얼터너티브(aternative) 붐을 일으키기 전부터 주류 음악에 대한 강력한 음악적 대안이었다. 옛 세대의 유산에 대한 확고한 이해를 바탕으로 하는 신선하면서도 지적인 사운드는 새로운 음악을 갈구하던 대학가에서 먼저 호응을 얻었다. 소위 진보적인 록음악을 얘기할 때 흔히 등장하는 단어인 ‘칼리지록(College Rock)’의 아이콘 가운데 하나가 R.E.M.인 것이다.

    하지만 R.E.M.이 수많은 칼리지록 밴드 중에서도 특별했던 이유는 자신의 음악적 영향력을 바탕으로 정치적인 의견 또한 활발히 개진했기 때문이다. 단적인 예로 이들은 메이저 레이블인 워너브라더스 레코드와 계약한 뒤 첫 번째 앨범 ‘Green’을 1988년 미국 대선 당일에 발표했다. 보통 메이저 레이블과 계약하면 인디 시절보다 정치적 목소리를 적게 내는 것과는 정반대 모습을 보였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선거는 공화당 후보인 조지 부시의 승리로 끝났지만, R.E.M.이 당시 자비로 게재한 광고 문구는 미국 보수층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부시의 선전에 현혹되지 마라. 모두 투표에 참가하자. 깨끗한 한 표를 던지자. 듀카키스! 그에게로.’

    레이건 시대에 데뷔해 오바마 정권에 해체했으니 열성적인 민주당 지지자인 R.E.M.으로서는 나름 해피엔딩일지도 모르겠다. 확실한 점은 그들이 그 긴 시간 동안 예술적으로 한 번도 타협하지 않은 채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앨범을 만들었으며, 이와 똑같은 열정과 신념으로 더 좋은 세상을 만들려고 노력했다는 점이다. ‘빌보드’지 부편집장인 루이 허는 그들의 음악과 함께 20, 30대를 보낸 미국의 베이비붐 세대에게 R.E.M.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한 소회를 밝혔다.

    칼리지록의 아이콘 전설로 남다
    물론 우리 처지에선 그저 좋은 음악을 하는 미국 밴드 가운데 하나였을 수도 있다. 그래도 개인적으로는 누군가 R.E.M.을 좋아한다고 말하면 ‘음, 이 사람이랑은 어느 정도 얘기가 통하겠군’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어제 만난 한 친구는 내게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나에게 비틀스가 구약이었다면 R.E.M.은 신약이었다.” 그들의 30여 년 15장 앨범을 총망라한 베스트 앨범이 11월에 나온다고 한다.



    *정바비는 1995년 인디밴드 ‘언니네이발관’ 원년 멤버로 데뷔한 인디 뮤지션. ‘줄리아 하트’ ‘바비빌’ 등 밴드를 거쳐 2009년 ‘브로콜리 너마저’ 출신 계피와 함께 ‘가을방학’을 결성, 2010년 1집 ‘가을방학’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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