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05

2011.09.26

후순위채권에 또 발등 찍혔다

구조조정 미루는 사이 저축은행 자본 확충 위해 발행…뾰족한 구제책 없는 약관 불공정도 문제

  • 손영일 기자 scud2007@donga.com

    입력2011-09-26 09:4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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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월 20일 오후 4시 토마토2저축은행의 서울 중구 명동지점 앞은 여전히 예금자들로 북적였다. 이틀 전 7개 저축은행의 살생부 명단이 공개되면서 이뤄진 예금 인출 러시는 이날 진정세를 보였지만, 예금자들은 여전히 마음을 졸였다. 이 저축은행은 영업정지된 토마토저축은행의 계열사다.

    영업점을 찾은 주부 김모(46) 씨는 “5000만 원 이하까지 예금자 보호가 된다고 해서 예금을 인출하진 않았지만 불안한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예금자보호법 적용을 받는 예금자는 그나마 나은 편이다. 보호 대상이 아닌 후순위채권 투자자와 5000만 원 초과 예금자 70여 명은 이날 서울 강남구 역삼동 토마토2저축은행 선릉지점에서 대책회의를 열고 ‘토마토저축은행 피해자 비상대책위원회’(이하 비대위)를 꾸렸다.

    영업정지된 7개 저축은행의 5000만 원 초과 예금자와 후순위채권 투자자 가운데 개인 피해자는 총 3만3000여 명. 5000만 원 초과 개인 예금자는 2만5535명이며, 예금총액은 1433억 원이다. 후순위채권에 투자했던 개인투자자는 7501명, 투자금액은 2082억 원이다. 예금 일부를 돌려받을 수 있는 5000만 원 초과 예금자와 달리, 변제 순위에서 뒤처지는 후순위채권의 특성상 후순위채권 투자자는 전액 손실을 볼 소지가 크다.

    후순위채권 개인 피해금액 2082억 원

    은행별로는 토마토저축은행의 후순위채권에 투자한 투자자가 4789명(1100억 원)으로 가장 많았으며, 제일저축은행(1401명, 537억 원)과 프라임저축은행(549명, 244억 원)이 뒤를 이었다. 올해 2월 부산저축은행 영업정지 때처럼 이번에도 50, 60대 후순위채권 피해자가 많았다. 저축은행이 높은 세후 수익률, 주식보다 높은 안정성 등을 내세워 투자자를 유혹하다 보니, 목돈 굴리기가 여의치 않은 장년층과 연금생활자가 후순위채권에 몰린 탓이다.



    일각에선 부산저축은행 영업정지 때 막대한 피해를 본 일을 거론하면서 “위험한 줄 알면서도 왜 투자했느냐”는 식의 반응을 보인다. 물론 개인투자자의 도덕적 해이가 전혀 없었다고는 할 수 없다. 실제 올해 초 부산저축은행이 영업정지를 당하면서 시중 자금이 저축은행에서 대폭 빠져나왔지만, 하반기 들어 저축은행 예금금리가 가파르게 상승하자 다시 돈이 몰렸다.

    하지만 개인투자자의 잘못으로만 돌리기엔 정부 책임이 결코 가볍지 않다. 이번 저축은행 영업정지로 문제가 된 후순위채권은 대부분 2008~2009년에 발행한 것이다. 당시 개인투자자는 그 나름대로 합리적인 이유에서 이 채권을 매입했다. 저금리 기조가 계속되는 상황에서 고수익을 제시했을 뿐 아니라, 안정성도 충분한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오창환 비대위 위원장은 “좋은 은행이라면서 후순위채권 발행을 허가해놓고 1년도 되지 않아 부실 은행으로 지정해 영업정지시켰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후순위채권은 그 위험성 때문에 매입에 앞서 발행 기관의 재무상황을 눈여겨봐야 한다. 예를 들어, 저축은행은 기본적으로 국제결제은행(BIS) 기준 자기자본비율 확충을 위해 후순위채권을 발행한다. 고객 예금을 받아 대출해주고 그 이자율 차이에서 수익을 창출하는 저축은행의 경우, 대출자산이 얼마나 건전한지가 채권 투자를 결정짓는 중요한 잣대가 된다.

    후순위채권에 또 발등 찍혔다

    영업정지에 충격을 받은 저축은행 고객들이 예금을 찾으려고 저축은행 영업지점에 한꺼번에 몰려들었다.

    금융당국의 사후약방문 대책

    시간을 3년 전으로 되돌려보자. 2008년 11월 정부는 저축은행의 프로젝트 파이낸싱(PF)에 대한 전수조사를 벌였다. 당시 저축은행의 PF 규모는 12조 원에 이르렀다. 정부는 5조 원 정도를 부실하다고 판단해 이를 매입하려고 국회로부터 재정지원 집행 동의를 받았다. 당시 구조조정 필요성을 제기하는 전문가가 많았지만, 정부는 올해 1월 삼화저축은행을 영업정지할 때까지 시간을 끌었다. 시장에서 퇴출돼야 할 저축은행이 ‘강시’처럼 생명을 이어갈 수 있도록 정부가 사실상 방조한 셈이다.

    당시 정부는 저축은행의 PF 가운데 5조 원의 부실 채권을 환매조건부로 사갔다. 한숨 돌린 저축은행은 자본을 확충하려고 고금리의 후순위채권을 찍어냈다. 후순위채권은 매매시장이 없어 한 번 투자하면 보통 5년 이상 만기까지 보유해야 한다. 환매할 경우 값비싼 수수료를 물어야 한다. 저축은행 처지에선 후순위채권이 비록 비싼 이자를 물지만 손쉽게 자본을 확충할 수 있는 수단인 셈이다.

    그러나 정부가 부실 채권을 매입했는데도 저축은행의 부실은 깊어만 갔다. 결국 정부는 이번에 그중 7개 은행을 영업정지시킬 수밖에 없었다. 박선숙 민주당 의원은 “저축은행이 건전성을 회복하면 5조 원의 부실채권을 금방 다시 사갈 것이라는 낙관적인 판단을 내린 정부가 해야 할 일(저축은행 구조조정)을 제때 하지 않아 (후순위채권 피해) 문제가 발생했다”고 지적했다.

    이에 감독당국은 어쩔 수 없었다는 반응을 보였다. 금융감독원 저축은행감독국 관계자는 “영업정지로 부실 우려가 있는 후순위채권은 2~3년 전에 발행한 것으로 당국이 지금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민간 기업이 채권을 발행하는 것을 두고 감독기관이 이래라 저래라 마음대로 관여할 수는 없다. 물론 규제 필요성이 제기돼 대책을 세웠다.”

    백번 양보해 감독기관이 관여할 수 없다 하더라도 저축은행이 거짓으로 작성한 재무제표와 고정여신비율을 속인 증권신고서를 믿고 후순위채권 발행 승인을 내준 책임은 피하기 힘들다.

    더군다나 금융당국이 내놓은 대책이라는 것도 사후약방문 격이었다. 올해 초 부산저축은행 영업정지 사태를 겪은 뒤 금융위원회는 6월 1일 저축은행 후순위채권 발행 요건 강화를 골자로 한 ‘저축은행 후순위채권 관련 제도개선 방안’을 발표했다. 한 금융 전문가는 “2009년 12월 영업정지 결정이 내려진 전북 전일저축은행 때도 후순위채권 투자자가 총 162억 원의 피해를 입었다”면서 “그때라도 금융당국이 대책 마련에 나섰으면 이후 저축은행 후순위채권 투자로 인한 피해를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꼬집었다.

    현재로선 과거 발행한 후순위채권에 대해선 뾰족한 구제 방법이 없다. 영업정지로 피해를 본 후순위채권 투자자들이 불완전판매와 관련해 신고할 경우, 금융감독원은 분쟁조정국을 통해 피해자가 구제받을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할 계획이지만, 얼마나 실효성이 있을지는 의문이다. 불완전판매라는 것을 입증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자 후순위채권 약관이 불공정하다며 이에 대한 전면 개선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형성돼 점차 힘을 얻는다. 조남희 금융소비자연맹 사무총장은 “저축은행의 후순위채권 판매는 법률적으로 ‘일방적 해지 부여 조항, 고객의 중도해지권 박탈’ 등 불공정 약관 조항으로 현저히 불공정한 내용을 담았다”고 주장했다. 금융소비자연맹은 불공정한 약관과 관련해 공동소송을 제기하는 등 후속 조치 마련에 들어갔다.

    7개 저축은행의 영업정지 과정에서도 대주주와 경영진의 비리가 드러났다. 저축은행 업계가 외환위기 이후 17조 원이 넘는 공적자금을 수혈받았음에도 방만한 경영과 비리로 부실을 키웠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됐다. 곪은 상처의 치료를 미루다 결국 터져버린 고름을 정부가 어떻게 수습할지 관심이 쏠린다.

    Tip

    후순위채권이란?


    후순위채권은 채권발행기관이 부도를 내거나 파산했을 때 담보 및 무담보 사채, 은행차입금 등 다른 채권자에게 진 빚을 모두 갚은 후에 지급을 요구할 수 있는 채권을 뜻한다. 기업이나 금융기관에서 발행한 채권 가운데 가장 위험도가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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