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04

2011.09.19

安風에 깜짝 놀란 ‘박근혜 대세론’

정통 보수와 오래된 리더 이미지 각인…정서적 동질감 만들기 새 과제

  • 허신열 내일신문 정치팀 기자 syheo@naeil.com

    입력2011-09-19 09:58: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安風에 깜짝 놀란 ‘박근혜 대세론’

    9월 7일 국회 본회의장에 들어서던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가 언론사 카메라 조명에 눈을 가리며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병 걸리셨어요?”

    ‘안철수 돌풍’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의 얼굴에 한기가 돌았다. 눈썹이 가늘게 떨렸고, 목소리는 가뭄에 갈라진 논바닥 같았다. 직전까지 얼굴에 가득했던 웃음기도 싹 없어졌다. 웬만해서는 평정심을 잃지 않던 그도 당황했던 것이다. 안철수 돌풍으로 여의도 정치권이 아노미 상태에 빠졌던 9월 7일 오후, 인천 남동구 고용센터에서 벌어졌던 일이다.

    서울대 안철수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이 정치권의 중심무대에 선 것은 단 엿새 동안이다. 9월 1일 한 인터넷 언론이 ‘측근발(發)’로 서울시장 출마 결심을 보도한 이후 박원순 변호사에게 ‘통근 양보’를 한 6일까지가 전부다.

    여의도 정치권에서 보면 ‘초짜 중 초짜’인 그가 지난 4년 동안 단 한 번도 대선 관련 지지율 조사에서 1위를 놓친 적이 없던 박 전 대표를 넘어선 것은 충격을 넘어 ‘경악’이었다. 추석 연휴 이전에 중앙 언론사가 실시한 7차례 여론조사에서 안 원장은 오차범위 안팎에서 4차례나 우위를 보였다. 심지어 9월 8일 MBC·엠비존씨엔씨 양자대결 여론조사에서는 ‘59.0%(안) 대 32.6%(박)’라는 결과까지 나왔다.

    안철수 돌풍의 주역은 사실 안 원장 자신이 아니라, ‘영웅’이든 ‘초인’이든 자신들의 욕망을 대변해줄 누군가를 바라는 민심이다. 그 주체는 이념의 양극단에 해당하는, 즉 20~30%를 점한 보수-진보가 아니라 ‘중도’로 표현되던 이들이었으며, ‘흔들리는 갈대’ 이미지의 스윙보터(swing voter·부동층 유권자)라고 불리면서 실체를 인정받지 못하던 이들이었다.



    말하자면 안철수 돌풍은 안 원장을 자신들의 ‘정치적 대변인’으로 선택한 ‘중도층’이 정치 전면에 화려하게 등장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초짜’에게 1위 놓쳐 엄청난 충격

    그렇다면 대선 여론조사에서 늘 1위를 차지하던 박 전 대표가 엿새 동안 분 안철수 바람에 심하게 요동칠 만큼 그동안 중도층 공략에 소홀했던 것일까. 안 원장은 ‘빈 골대’에 공을 차 넣은 억세게 운 좋은 공격수일 뿐인가. 친박(친박근혜)계 핵심 인사의 한결같은 증언은 “아니다”다. 측근들은 박 전 대표가 중도층 공략에 꾸준히 공을 들였다고 입을 모은다. ‘원칙과 신뢰’에 대한 강조를 제외하면 2007년 이전과 이후의 박 전 대표는 확실히 다르다는 것이다. ‘줄푸세’(세금은 줄이고 규제는 풀고 법치는 세우자)로 대표되던 박 전 대표의 2007년 정책은 2008년 세계 금융위기를 기점으로 선회하기 시작했고, 2009년 4월 미국 스탠포드대 연설을 통해 윤곽을 드러냈다.

    당시 연설에서 그는 “민간 부문(기업)은 탐욕이라는 도전에 직면했다. 이익의 극대화에만 치우쳐 그에 따른 책임과 사회의 공동선을 경시했다”며 “오직 수익률만 높이려는 과다한 레버리지 관행이나, 무분별한 파생상품 거래 같은 도덕적 해이가 계속되는 한 이번 위기 같은 시장 실패는 반복될 것”이라고 일갈했다.

    ‘박근혜’라는 이름만 없으면 진보 진영의 신자유주의 비판으로 오인할 만한 여지가 다분한 발언이었다. 현장에서 연설을 듣던 김기식 전 참여연대 사무처장이 “박 전 대표가 중도좌로 바뀐 거냐”고 말했을 정도로 그의 변화는 이목을 끌었다.

    이후 박 전 대표는 익히 알려진 대로 ‘복지국가’에 대한 언급, 흡수통일론과 대비되는 ‘한반도 평화’ 등을 통해 ‘중도화’를 지향했다. “국민 행복이 곧 국가경쟁력이 되는 것이다” “성장이 전체 국민 후생에 기여하는 긍정적 효과가 과거에 비해 많이 약해졌다” 같은 발언도 같은 맥락이다.

    2007년 경선 캠프에 몸담았던 한 인사는 “박근혜 대세론이 이회창 대세론과 다른 점은 이 전 총재의 경우 보수의 오른쪽 끝에서 왼쪽으로 지지층 확대를 추구했던 반면, 박 전 대표는 중도에 좀 더 가까운 곳에서 시작한다는 점”이라며 “확장성에 큰 차이가 있다”고 말했다.

    박 전 대표가 중도를 향해 길을 틀었음에도 중도층은 그를 외면하고 안 원장으로 눈길을 돌렸다. 여의도 정치에 대한 염증과 반(反)한나라당 및 비(非)민주 성향을 가진 중도층이 박 전 대표를 여전히 ‘보수의 리더’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연세대 김호기 사회학과 교수는 “박 전 대표가 ‘낡은 리더’는 아니지만 중도층은 그를 ‘오래된 리더’로 인식했다”고 설명했다. 또한 “박근혜는 그 자체로 나이스한 정치인이지만 보수적 리더의 이미지 때문에 권위주의적 성향의 인물로 비친다”면서 “국민 다수는 권위적, 수직적 리더십이 아니라 소통하는 수평적 리더십을 원한다는 점이 (박 전 대표의 이미지와) 다르다”고 덧붙였다.

    安風에 깜짝 놀란 ‘박근혜 대세론’

    9월 9일 서울 여의도 국회도서관에서 열린 ‘지역 장애인 복지 불균형 실태점검과 해법’ 토론회에 참석한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오른쪽)가 한 장애인과 포옹하며 활짝 웃고 있다.

    박 전 대표의 정책적 변화가 중도층으로부터 공감대를 얻지 못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 여론조사 전문가는 “박 전 대표가 지지층을 확장하려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하는데도 지지율을 관리하는 차원에서 대응했던 것이 문제”라고 진단했다. 중도층이 가진 ‘보수 이미지’를 깨려면 ‘충격요법’도 필요한데, 구체적인 정책이나 피부에 와 닿는 이슈를 선도하지 못했고, 주변에 보수 성향 인사가 주로 포진했다는 점도 중도층 공략의 걸림돌로 지적하는 사람이 많다.

    박 전 대표의 성장 과정과 정치적 역정에서 ‘국가와 민족’만 있고 ‘소소한 감동’의 요소가 부족하다는 점도 위험요소로 꼽힌다. 국민은 ‘높은 곳에 있는 줄 알았는데 나와 같은 사람이구나’라는 점에, 그리고 오래된 것 속에서 피어나는 ‘새로움’에, 자녀의 ‘롤모델’이 될 수 있다는 점에 감동하는데, 박 전 대표의 이미지에서는 이 같은 요소를 찾기 힘들다는 것이다.

    30대 면접 결과 공주 이미지 여전

    중도층은 2006년 테러를 당한 와중에도 “대전은요?”라고 물어 보수 유권자를 감동시킨 박 전 대표보다, 새벽까지 컴퓨터 백신프로그램을 개발하다 군대 간다는 말도 하지 않고 훈련소에 입소했다는 안 원장의 이야기에 더 솔깃해했다.

    한나라당 성향의 한 정치 컨설턴트는 “30대를 대상으로 한 심층면접 결과를 보니 박근혜라는 이름은 ‘공주’ 이미지와 연결돼 있더라”며 “그만큼 국민이 박 전 대표에게서 정서적 동질성을 느끼지 못한다”고 말했다.

    이러한 점 때문에 대선 국면에서 박 전 대표의 가장 큰 경쟁자는 안 원장이 아니라 박근혜 자신이란 말도 나온다. 국민 정서와 눈높이에 박 전 대표가 얼마나 친숙하게 다가설 수 있느냐가 그 자신의 대선 경쟁력을 좌우할 것이란 점에서다.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