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03

2011.09.05

월 300만 원 김여유 씨 vs 월 100만 원 이한숨 씨

고교동창 부부와 지중해 크루즈여행 vs 아끼고 또 아껴도 통장 잔고 간당간당

  • 박은경 객원기자 siren52@hanmail.net

    입력2011-09-05 12:08: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연금 설계를 잘해 삶의 질이 높은 은퇴자 5명과 그렇지 않은 은퇴자 5명을 인터뷰했다. 인터뷰 내용을 토대로 ‘김여유’라는 가상의 이상형(ideal type)을 뽑아냈다. ‘이한숨’은 가상의 배드 타입(bad type)이다. 김여유 씨와 이한숨 씨가 각각 어떤 삶을 사는지 살펴보자.

    >> 연금 300만 원 김여유 씨

    2009년 12월 은퇴한 김여유(62) 씨는 최근 인터넷과 책에 푹 빠졌다. 이탈리아, 그리스 등 지중해에 자리한 유럽 여러 나라의 역사와 문화는 물론, 가볼 만한 관광지와 시시콜콜한 뒷골목 얘기까지 뒤적이며 때아닌 세계사 ‘열공’에 빠진 것. 그가 새삼 공부에 열을 올리는 이유는 내년 여름 고교동창 부부 7쌍이 지중해로 10일간 크루즈여행을 다녀오기로 했기 때문이다.

    부부 합쳐 1000만 원 정도 드는 여행경비를 마련하려면 씀씀이를 줄이는 게 최선의 방책인지라 그는 한 달에 한두 번 나가던 골프 모임을 지난달부터 딱 끊었다. 그 대신 매달 100만 원씩 떼어 여행경비를 모으는 중이다. 필드에서 혼자만 쏙 빠진 그를 두고 골프 모임 친구들은 볼멘소리를 하지만, 솔직히 부러움의 눈초리도 감추지 않는다.

    32년간의 직장생활에서 해방된 대신 꼬박꼬박 통장에 들어오던 월급이 없어진 부부가 비교적 여유 있게 노후 생활을 누리는 것은 매달 나오는 300여만 원의 연금 덕분이다. 지난해 11월부터 매달 112만 원의 국민연금을 수령하는 그는 개인연금과 월지급식 펀드에서 나오는 돈도 받고 있다.



    게다가 자식에게 큰돈 들어갈 일이 더는 없어 월 300만 원으로 부부가 생활하는 데 불편함을 느끼지 못한다. 큰딸(32)과 아들(30)은 결혼해 분가했으니 손을 벌릴 일이 없다. 독립해 살면서 직장생활을 하는 막내딸의 결혼이 남았지만 부부는 금전적인 부분에서 일찌감치 교통정리를 끝냈다.

    그는 퇴직과 동시에 큰딸과 아들을 불러놓고 엄포를 놓았다. “이제 아버지는 직장도 없고, 그동안 너희한테 할 만큼 했다. 둘 다 나보다 월수입이 좋으니 막내 결혼은 너희가 책임져라.” 공부며 결혼까지 부모 뒷바라지를 아낌없이 받은 큰딸과 아들은 군말 없이 “두 분 노후 생활에만 충실하시라, 막내 결혼은 저희가 책임지겠다”고 수긍했다. 그는 막내딸을 따로 불러 선언했다. “엄마 아빠는 더는 보태줄 돈이 없다. 네 결혼은 네가 벌어서 해라.” 딸은 “더는 부모님께 손 벌릴 생각 없다, 결혼 생각도 없다”며 요즘 젊은이답게 ‘쿨’하게 대꾸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부부는 여차하면 막내딸 결혼비용으로 아파트를 처분할 계획을 세워두었다. 부부가 사는 서울 강남 아파트는 132㎡로, 시가 11억 원에 달한다. 아파트 크기를 줄이면 언제든 여유자금을 마련할 수 있다는 계산이 선 것. 그래서 매달 나오는 연금은 부부 생활비로 모두 쓰면서 여유 있게 살기로 했다.

    월 300만 원 김여유 씨 vs 월 100만 원 이한숨 씨
    내년 크루즈여행에 동행할 고교동창 부부 중 한 쌍은 두 사람 모두 교사 출신으로 매달나오는 교원연금이 부부 합산 570만 원이다. 이 부부는 평소 “두 아이 모두 결혼시키고 우리 둘만 남으면 세계일주나 다닐 생각”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해왔다. 이들은 여름휴가 기간에도 20일간 유럽여행을 다녀왔다. 정년을 앞두고 환갑과 동시에 사표를 낸 전직 교감 친구는 해외여행 외에 사진 찍기를 새로운 취미로 삼아 전국을 유람한다. 얼마 전 동창 모임에 1000만 원을 들여 새로 산 전문가용 카메라를 들고 나와 김씨를 비롯한 친구들의 부러움을 샀다.

    동창 모임에서 돌아온 날이면 김씨는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교사 와이프나 얻을걸”이라고 아내에게 농을 건다. 아내도 기다렸다는 듯 “나도 당신 대신 선생을 남편으로 얻을걸 그랬다”고 응수한다.

    주말마다 김씨를 설레게 하는 즐거움이 있다. 퇴직 이후 시간이 많아진 그가 뒤늦게 찾은 행복과 재미는 고만고만한 나이의 어린 손주들을 보는 일이다. 주말마다 손주들을 볼 방법을 궁리하던 김씨는 몇 달 전부터 주말마다 봉투를 준비한다. 매주 은행에서 교환하는 빳빳한 5만 원권 한 장씩을 넣은 봉투는 며느리 몫의 용돈이다. 봉투 효과는 만점이다. 말은 “괜찮다”고 하지만 한 주도 거르지 않고 손주들을 데려오는 며느리의 표정이 이전보다 한결 밝아졌다. 김씨는 이번 추석에는 용돈을 좀 더 넣을 생각이다. 환하게 웃는 얼굴로 봉투를 받을 며느리를 생각하면 벌써부터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번진다.

    >> 연금 100만 원 이한숨 씨

    은퇴 2년 차 이한숨(56) 씨는 전화기 확인으로 일과를 시작한다. 집 전화 수화기가 제대로 놓였는지, 밤새 휴대전화 배터리가 죽은 건 아닌지. 새벽부터 수화기를 들었다 놨다 하고, 휴대전화를 열었다 닫았다 하는 남편을 외면하는 아내 역시 이씨처럼 속이 타기는 마찬가지다.

    새벽부터 전화가 걸려올 리 만무하건만 그의 이런 행동은 벌써 한 달을 넘겨 습관으로 굳어졌다. 이씨가 애꿎은 전화기를 붙잡고 씨름하기 시작한 것은 정부 등이 마련한 고령자취업알선센터, 중·장년층 일자리 찾기 프로그램을 통해 이력서를 제출한 뒤부터다. 정성껏 준비한 이력서를 들고 구직신청서를 낼 때만 해도 ‘요즘 중소기업은 숙련된 인재를 구하기 어렵다니 적어도 몇 군데에서는 연락이 오겠지. 그중 괜찮은 곳을 골라야지’ 했던 마음이 하루가 다르게 쪼그라든다.

    대기업 생산현장 부장으로 퇴직한 그는 회사를 떠난 지 2년 만에 자신의 처지가 지금처럼 곤궁해질 줄은 몰랐다. 금융권이 ‘노후 소요자금 10억 원’이라는 충격적인 소리로 호객에 열을 올릴 때 딴 나라 사람 얘기쯤으로 치부한 그다. 2억 원에 가까운 퇴직금이 있으니 여기에 월수입 200만 원 정도 되는 일자리를 구해 몇 년간 직장생활을 더 하면 그럭저럭 노후를 꾸려갈 수 있으려니 생각했던 것이다.

    20여 년 동안 직장생활을 하면서 족히 벌었을 수억 원의 돈은 다 어디로 갔을까. 그동안 갈고닦은 기술을 써먹을 곳이 이렇게도 없단 말인가. 새삼 빈손인 자신의 처지에 이씨는 불쑥불쑥 화가 치민다.

    그의 한 달 수입은 100만 원 남짓이다. 23년간 낸 국민연금이 수입의 전부다. 만 60세 이전 조기 수령을 택한 탓에 그나마 매달 받는 돈이 줄었다. 아파트 관리비 20여만 원을 내고 당뇨를 앓는 아내(54) 병원비와 약값에 생활비까지 쓰고 나면 생활비 통장 잔고는 제로와 마이너스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한다.

    얼마 전 신문에 ‘100세 수명은 노인에게 축복이 아니라 재앙’이라는 기사가 났다. 그는 눈앞에 닥친 자신의 처지를 웅변해주는 것 같은 문장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최근 조사 결과를 보면, 국민 10명 중 4명이 100세 수명을 축복으로 여기지 않는다. 빈곤과 질병에 시달리는 노년기가 너무 길고 자식에게 부담을 준다는 이유에서다. 10명 중 4명과 다를 바 없는 자신의 처지에 그는 앞날이 두렵기만 하다.

    이씨와 비슷한 나이에 퇴직한 사촌형(61)은 매달 받는 국민연금이 80만 원 정도지만 생활형편은 오히려 낫다. 지난해 부부가 모두 60세를 넘기면서 역모기지론(주택연금)에 가입해 매달 100만 원 넘는 돈이 들어오기 때문이다. 이씨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집을 판 게 새삼 뼈아프다.

    월 300만 원 김여유 씨 vs 월 100만 원 이한숨 씨
    한눈팔지 않고 직장생활을 이어와 어렵게 마련한 시가 5억 원 아파트를 5년 전에 판 이씨는 지금 2억5000만 원 전세에 산다. 대학생 때 어머니를 여읜 이씨는 결혼과 함께 아버지를 모시고 살았다. 하지만 아버지가 암으로 돌아가시기 전 3년간 병원비 마련을 위해 아파트를 팔 수밖에 없었던 것. 게다가 큰아들과 딸의 학비까지 대야 했으니 아파트가 남아날 수 있었겠는가. 설상가상 퇴직금으로 주식투자에 나섰다가 제대로 실패했다.

    이씨를 따라 요즘 아내 한숨도 덩달아 늘었다. 추석에 시부모님 차례상을 마련하려면 20만 원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직장을 못 구한 채 아르바이트로 용돈벌이를 하는 아들과 학비 때문에 과외를 두 탕이나 뛰는 딸을 보면 부부는 맘 놓고 한숨 쉴 여유조차 없다. 그저 자식에게 죄스럽기만 하다.

    체면 불구하고 ‘더도 말고 100만 원 받는 월급쟁이라도 할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 요즘 이씨의 심정이다. 하지만 그를 오라고 하는 곳은 아직 없다. 하기야 줄잡아 700만 명에 달한다는 ‘베이비부머(1955~63년생)’ 세대가 본격 은퇴를 시작한 데다 팔팔한 대학졸업생 절반도 직장을 못 구하는 마당에 ‘55년생’인 베이비부머 맏형을 기다리는 일자리라고 넉넉할까 싶다.

    ‘끝내 직장을 못 구하면 어떻게 할까’ ‘밑천이 있으면 장사라도 할 텐데’ ‘창업도 10명에 1명 성공할까 말까라는데’…. 하루에도 온갖 생각에 마음잡을 길이 없는 그는 지난주부터 저녁 운동을 시작했다. 운동이라야 돈 안 들이고 할 수 있는 동네 학교 운동장 돌기가 전부다.

    은퇴 1년을 넘길 즈음부터 친구도 하나 둘씩 멀어졌다. “스크린골프장 가자” “생맥주 한잔 하자”고 뻔질나게 전화를 걸어오던 친구를 이런저런 핑계로 피한 그의 탓이다. ‘이러다 우울증과 불안증에 걸리는 건 아닐까.’ 이씨는 요즘 더럭 겁이 나곤 한다.

    월 300만 원 김여유 씨 vs 월 100만 원 이한숨 씨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