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87

2017.05.10

커버스토리

10년 허송세월 만든 ‘동남권 신공항’ 두 번 번복

‘公約’이 ‘空約’ 된 역대 대선…사후 검증 시스템 마련해야

  • 송화선 기자 spring@donga.com

    입력2017-05-08 10:5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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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청도에 가서 표 얻으려고, (중략) 그러나 이것은 국가 백년대계니까 공정하게 과학자들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이 맞다.” 2011년 2월 이명박 당시 대통령이 TV로 중계된 신년 좌담회에서 한 말이다. 이 전 대통령은 2007년 대선 때 충청권 유세를 하면서 대형 기초연구시설이 포함된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과학벨트) 조성을 약속했다.

    예산 수조 원이 투입되는 대형 국책사업이었다. 하지만 정부 출범 후 대구, 경북, 경기 등 다른 지방자치단체가 과학벨트 유치에 뛰어들자 사업이 표류했다. 이날 이 전 대통령이 이에 대한 의견을 밝힌 것이다. 그는 이 좌담회에서 “(충청도에 과학벨트를 조성하겠다는 약속이) 공약집에 있는 것은 아니다” “선거 과정에서 혼선을 드린 것 같다”고 했다.

    “(과학벨트 입지 선정 작업을) 백지에서 하는 것이냐”는 사회자의 질문에는 “위원회가 새로 발족하니까 거기에서 잘할 것”이라고 답했다. 사실상 공약 파기였다. 이날 이 전 대통령의 발언은 ‘정치인이 선거 때 내놓는 공약(公約) 중 상당수는 표를 노린 공약(空約)’임을 사실상 시인한 것이라는 점에서 논란이 됐다.



    ‘중간평가’ 약속 깬 노태우, 쌀시장 개방한 YS

    선거 때 국민 앞에서 한 약속을 공공연히 깬 대통령은 그전에도 많았다. 1987년 직선제 개헌 후 치른 첫 대선에서 민주정의당 노태우 후보는 “대통령이 되면 임기 도중 국민에게 재신임을 묻겠다”는, 이른바 ‘중간평가’ 공약을 내세웠다. 하지만 당선 이듬해 ‘정국이 대결과 격돌로 치닫고 있는 현 시점에 중간평가를 받는 건 부적절하다’는 내용의 담화문을 발표했다. 



    1992년 14대 대선 과정에서 “당선되면 대통령직을 걸고 외국쌀 수입을 막겠다”고 약속했던 김영삼(YS) 전 대통령은 취임 후인 93년 12월 농산물 교역 등에 대한 다자간 협상인 ‘우루과이라운드’를 추인했다. 이를 계기로 국내 쌀시장이 열렸다. 다음 정부를 이끈 김대중 전 대통령은 선거 당시 내세운 ‘내각제 개헌’ 공약을 지키지 않았고, 결국 ‘내각제’를 고리로 묶였던 DJP(김대중-김종필) 공동정부도 김 전 대통령 임기 중 해체됐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지키지 못한 대형 공약은 ‘행정수도 이전’이다. 2002년 16대 대선 과정에서 새천년민주당 노무현 후보는 “수도권 집중을 억제하고 낙후된 지역경제를 살리기 위해 청와대와 정부 부처를 충청권으로 옮기겠다”고 약속했다. 이후 박빙의 선거 판세에서 캐스팅보트를 쥐고 있던 충청권 민심이 노 후보 쪽으로 쏠렸다. 그러나 2005년 헌법재판소가 ‘신행정수도 건설을 위한 특별조치법’을 위헌으로 결정하면서 이 공약은 이행되지 못했다.

    결국 시민이 나섰다. 2006년 5·13 전국동시지방선거 때부터 정치인이 선거 공약을 지키도록 촉구하고 감시하는 시민 활동, 이른바 ‘매니페스토(Manifesto)운동’이 활성화된 것. 정부도 2008년 공직선거법을 개정했다. 동법 예비후보자공약집(제60조의4), 선거공약서(제66조), 정책공약집(제138조의2) 등에는 해당 선거 공보물에 ‘선거공약 및 이에 대한 추진계획으로 각 사업의 목표·우선순위·이행절차·이행기한·재원조달방안을 게재’하도록 명시돼 있다. 

    그러나 이후에도 ‘헛된 약속’은 이어지고 있다. 17대 대선 당시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는 ‘7% 경제성장, 1인당 국민소득 4만 달러 달성, 세계 7대 경제강국 도약’을 의미하는 ‘747’을 경제 분야 대표 공약으로 내세웠다. 이와 더불어 ‘매년 60만 개씩 일자리 300만 개 창출’도 약속했다.

    그러나 한국정치학회는 19대 대선을 앞두고 최근 펴낸 ‘17대·18대 대통령선거 공약 분석’ 보고서에서 ‘747’ 공약에 대해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등의 대외적인 경제환경 변화와 국내 정책 환경의 제약으로 실현되지 못함’이라고 평했다. 또 ‘대기업 중심의 수출 주도 성장이 신규 고용을 수반하지 않아 청년실업이 오히려 악화됐다’고 밝혔다.

    이 전 대통령이 명시적으로 폐기한 공약도 있다. 이른바 ‘동남권 신공항’ 건설이다. 정부는 타당성 조사를 거쳐 출범 이듬해인 2009년 신공항 위치를 발표할 예정이었으나 영남지역이 대구·경북과 부산·경남으로 양분돼 치열한 다툼을 벌이자 네 차례 발표를 연기하며 갈등을 키웠다. 결국 2011년 ‘계획 백지화’를 발표할 때는 대국민사과까지 해야 했다.

    당시 한나라당 박근혜 의원은 정부의 태도를 비판하며 “정치권이 국민과 약속을 어기지 않아야 우리나라가 예측 가능한 국가가 된다. 계속 추진하겠다”고 밝혀 눈길을 끌었다. 박 전 대통령은 2012년 대선에서 이를 공약으로 삼았다. 하지만 역시 취임 후 수년간 건설 터를 정하지 못한 채 시간을 보내다 지난해 6월 ‘신공항 백지화’를 발표했다. 두 정부에 걸친 두 번의 ‘공약 파기’로 10년 가까이 지역 갈등만 이어진 셈이다.


    매니페스토 선거문화 정착 필요

    박 전 대통령은 2012년 대선 과정에서 ‘4대 중증질환 100% 국가보장’을 공약했지만, 당선 후 구성된 ‘박근혜 대통령직인수위원회’는 “해당 공약에 3대 비급여 항목(선택진료비, 병실료, 간병비)은 포함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이 때문에 “대통령 자리에 앉기 전부터 말을 바꾸고 있다”는 비판을 받았다.

    “65세 이상 모든 어르신에게 월 20만 원씩 기초연금을 지급하겠다”던 박 후보의 약속 또한 재원 문제로 소득 하위 70%에게만 주는 것으로 수정됐다. 박 전 대통령은 취임 첫해 9월 국무회의 자리에서 “저를 믿고 신뢰해주신 어르신 모두에게 (기초연금을) 지급하지 못하는 결과가 생겨서 죄송한 마음”이라고 사과해야 했다. 시민단체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이 지난해 펴낸 ‘박근혜 정부 집권 4년 차 대선 공약 이행 평가’ 보고서에 따르면 박 전 대통령의 공약 이행률은 ‘국민대통합 0%, 검찰개혁 16%, 정치쇄신 18%, 정부개혁 22%’였다.

    2012년 19대 총선을 앞두고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유권자가 지지 후보 선택에서 가장 크게 고려하는 사항은 정책/공약(34.0%)이었다. 이어서 인물/능력(30.8%), 소속 정당(13.8%), 주위 평가(7.6%), 정치 경력(4.4%), 개인적 연고(1.2%), 출신 지역(0.8%) 등을 중요하게 봤다.

    박명호 동국대 정치학과 교수는 지난해 발표한 ‘정책·공약 검증체계 연구’ 보고서에서 “선거는 민주주의의 꽃이고 그 꽃의 꽃가루는 후보자들이 제시하는 정책과 공약”이라며 “후보자의 공약과 정책은 선거 과정을 정책경쟁의 장으로 형성하는 후보자와 시민 간 소통과 공론의 장을 만드는 것으로 대의민주주의가 실질적으로 작동하는 데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정책선거와 책임정치가 이뤄지게 하려면 정책·공약에 대한 사전·사후 평가가 매우 중요하며 이를 위한 법적·제도적 장치가 마련돼야 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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