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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철 교수의 5분한국사

위기에도 물고 뜯는 정치인 숙맥들

한반도 긴장 고조 불구 국론 분열…조선시대 숙맥 세 사람처럼 후대에 남을 것

위기에도 물고 뜯는 정치인 숙맥들

중국 남송(南宋)시대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희(朱憙, 1130~1200)와 그의 형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주희는 후세에 공자, 맹자와 더불어 주자(朱子)라는 극존칭을 받고 중국뿐 아니라 한국, 일본 등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 대학자였지만 그의 형은 그리 똑똑하지 못해 콩과 보리를 제대로 구별하지 못했다는 것. 이처럼 남들이 다 아는 평범한 사실을 모를 정도로 어리석은 사람을 숙맥이라 하는데, ‘춘추(春秋)’ 좌씨전(左氏傳)에 나오는 이 말은 중국 춘추전국시대 진(晉)나라 도공(悼公, 재위 기원전 573~558)의 고사에서 비롯된 ‘숙맥불변(菽麥不辨)’의 준말로 콩과 보리를 구별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조선 전기에도 음양(陰陽)의 도를 모르는 숙맥이 세 사람이나 있었으니 참으로 가관(可觀)이었다. 그들의 어수룩한 삶을 만나보자.

음양의 도를 모르는 그들 어수룩한 삶

첫째는 세조 때 세력가 한명회(韓明澮, 1415~1487)의 손자인 한경기(韓景琦, 1472~1529)다. 그는 심성을 닦는다고 언제나 홀로 문을 닫고 앉아 아내도 오지 못하게 했으며 계집종들이 근처에만 와도 지팡이를 들고 쫓아가 야단을 쳤다고 한다. 그는 사마시에 급제했지만 벼슬에 뜻이 없어 대과에 응시하지 않다가, 할아버지가 원훈(元勳)이었기 때문에 음보(蔭補)로 돈녕부봉사(敦寧府奉事)에 등용됐다. 그러나 할아버지의 비정한 행적을 보고 수치스럽게 여겨 허무주의에 빠져 요직을 회피하고 한직에 머물렀다. 그는 세상을 등지고 절의로 이름 높은 남효온(南孝溫), 홍유손(洪裕孫) 같은 선비와 어울려 시와 벗하고 살아 죽림칠현(竹林七賢) 또는 조선의 이태백이란 말을 들었다.

둘째는 유명한 제안대군(齊安大君, 1466~1525)이다. 그는 세조의 손자요, 예종의 둘째 아들이다. 12세에 김수말(金守末)의 딸과 혼인했으나 어머니 안순왕후가 내쫓았고, 14세에 다시 박중선(朴仲善)의 딸과 혼인했지만 김씨를 끝내 못 잊어 하자 1485년 성종이 복합(復合)을 허락했다. 성종이 늘 예종의 후손이 끊길까 우려해 어느 날 궁중에서 가장 아리따운 궁녀를 제안대군 침소로 보냈다. 그러나 제안대군은 궁녀와 자다가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르며 뛰쳐나오더니 손과 얼굴을 씻으며 “여자는 더러운 것이다. 아예 가까이 오지 마라” 하고는 밤중에 사람들을 깨워 궁녀를 돌려보냈다. 제안대군은 그 후 “여자는 꽃과 같은 것이다. 꽃을 따서는 안 된다”라고 하면서 계집종 5, 6명을 집에 두고 때때로 데리고 놀았으나 이때도 언제나 바라만 보았지 여자 몸에 결코 손을 대지 않았다. 그런데 그의 가비(家婢) 중에는 미인이 많아 장녹수(張綠水) 같은 여인도 나왔다.



장녹수는 나이가 서른임에도 뛰어난 용모로 연산군의 총애를 받아 내명부(內命婦) 종3품 숙용(淑容)에 봉해지고, 급기야 연산군이 실정하는 원인이 됐다. 그 후 제안대군은 모친상을 당하고 홀로 거처했는데, 평생 여색을 가까이하지 않고 성악(聲樂)을 즐기고 사죽관현(絲竹管絃)을 연주하며 지냈다. 그래서 연산군이 여러 차례 음률을 아는 여자를 내렸으나 그는 따르지 않았다. 조선 중기 어숙권(魚叔權)이 엮은 수필집인 ‘패관잡기(稗官雜記)’에는 그를 “성품이 어리석다”고 평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진실로 어리석은 것이 아니라 몸을 보전하기 위해 스스로를 감춘 것”이라는 또 다른 평가를 내려 주목된다.

셋째는 중종대 문신 사헌부 지평(持平) 김저(金 , 1512~1547)의 아들인데, 김저는 아들이 없어 중형의 둘째 아들 여경(餘慶)을 양자로 들였다. 그런데 그 아들이 어려서부터 못생긴 외모 탓에 숙맥으로 소문이 났다. 김저가 여경을 전설별제(典設別提·국가 행사에서 사용되는 차일, 장막을 취급하는 종6품 벼슬)를 시켰으나 사은(謝恩)만 하고 일생 과거를 치르거나 벼슬을 하지 않았다. 여경이 장가를 든 후에도 여전히 숙맥이어서 김저는 후손이 끊어질까 걱정해 첩을 얻어주었는데 소식이 깜깜이었다. 어느 날 밤 김저는 장안의 통지기(서방질 잘하는 음탕한 계집) 기생을 시켜 아들에게 운우지정(雲雨之情)을 가르쳐주라 했는데, 여경은 기생을 대하자 그만 겁이나 침상 밑으로 들어가 나오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데 아버지 김저는 소시부터 귀공자로 시·서·금(詩·書·琴) 세 가지에 능통해 삼절이라고 칭송받았으며, 성질이 호방해 화류춘풍 속에서 보낸 사람이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아버지가 아들의 풍류까지 앗아갔다고 수군거렸다.

적과 동지를 구분 못하고 다른 목소리

그러나 여경이 그런 삶을 산 이유는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제10권 명종조 고사본말 중 ‘을사년의 당적(黨籍)’에 나온다. 김저의 아버지 이조참판 김세필(金世弼, 1473~1533)이 기묘사화로 장배(杖配)됐다가 벼슬에 나가지 않았고, 김저도 을사사화에 연루돼 함경도 삼수(三水)에 유배됐다가 사사(賜死)돼 가산과 처자도 적몰된 암울한 과거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특이한 것은 김저가 사사되자 그의 첩이 30년을 머리를 풀고, 소식(素食)을 폐하지 않고, 머리를 빗지 않으며 초상(初喪) 때와 같이 지냈다고 ‘연려실기술’이 첩의 절행(節行)을 기술한 것이다. 그 후 숙맥 세 사람은 그 오명을 후세에까지 남겼으며, 그들의 후손은 끊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세 사람은 당시 엄격한 양반 관료사회의 사대부들이 지나치게 여성에 대해 완롱적(玩弄的)이었음에 비해 반동적으로 그렇게 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3월 26일에 발발한 천안함 폭침 사건이 아직도 뇌리에 생생한데 북한은 11월 23일 우리의 서해 5도 중 하나인 연평도를 무차별 포격하는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질렀다. 서울 G20 정상회의로 고양된 대한민국의 국격(國格)은 온데간데없고 한반도는 준전시 상황으로 돌변해 누란지세(累卵之勢)에 처해졌다. 최근 유엔국제형사재판소(ICC)가 북한의 연평도 도발과 천안함 폭침 사건에 대해 예비조사를 착수한 것과 달리, 국내 여야 정치권은 적과 동지를 구분하지 못하고 다른 목소리를 내며 극명한 대립양상을 보이는 등 미로를 헤매고 있다. 국가 위기상황을 맞아 국민의 총화 단결과 국론의 통일이 무엇보다 절실한 이때 좌우로 나뉜 국론의 분열은 또 다른 숙맥불변의 모습이 아닐까.



주간동아 2010.12.20 767호 (p84~85)

  • 이영철 목원대 겸임교수 hanguksao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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