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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정원 조선 왕릉31

시어머니 장희빈 몰락… 고추보다 매웠던 구중궁궐

경종의 원비 단의왕후 혜릉

시어머니 장희빈 몰락… 고추보다 매웠던 구중궁궐

시어머니 장희빈  몰락… 고추보다 매웠던 구중궁궐

좁고 아담하게 조영된 혜릉의 능원.

혜릉(惠陵)은 조선 제20대 임금 경종(景宗, 1688~1724, 재위 1720~1724)의 원비 단의왕후(端懿王后, 1686~1718) 심씨(沈氏)의 단릉이다. 경종은 우리가 잘 아는 장희빈의 아들로, 단의왕후는 숙종과 장희빈의 며느리다.

혜릉은 조선 최대 왕족릉인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의 검암산을 주산으로 하는 동구릉 안에 있다. 1408년 태조의 건원릉(健元陵)을 조영하면서 시작된 동구릉은, 1855년 문조(순조의 장남)의 수릉을 천장해 오면서 능이 9개가 돼 동구릉으로 불렸다. 이곳은 조선 왕조 500년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으며, 각종 능원 양식이 한자리에 모여 있는 대표적인 능역이다.

왕실 혼란기에 입궁 당쟁 소용돌이 말없이 목격

혜릉은 건원릉을 중심으로 서쪽 능선을 주맥으로 하며 동쪽을 바라보는 지형의 혈처에 자리 잡고 있다. 오른쪽 능선에는 현종의 숭릉(崇陵)이 있고 왼쪽에는 헌종의 경릉(景陵)이 있다. 혜릉은 유좌묘향(酉坐卯向)으로 서쪽에서 동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숭릉의 청룡 끝 혈맥이 맺힌 혈자리라고 할 수 있다. 조부모인 현종과 명성왕후의 용맥으로부터 보살핌을 받고 있는 형국이다. 형태는 용맥의 혈맥이 길지 않은 단유형(短乳形)이다.

숙종의 3남 6녀 중 장남인 경종은 궁녀였던 모친 희빈이 숙종의 총애를 받아 낳은 아들이다. 숙종은 대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태어난 지 두 달 만에 윤을 원자(1689)로 책봉하고, 세 살이 되자 세자로 책봉했다. 그러나 인현왕후 민씨의 폐비건과 복위사건 등 ‘갑술옥사’와 인현왕후의 병에 연루된 희빈의 ‘무고의 옥’ 사건 등 궁실의 혼란기에 세자가 된 만큼 심적으로 큰 부담을 안고 지내야 했다.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시어머니의 죽음을 목격한 세자빈 심씨(단의왕후) 역시 궁궐 생활이 편치는 않았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시어머니 장희빈  몰락… 고추보다 매웠던 구중궁궐

동구릉에서 유일하게 원(園) 형식인 혜릉. 단아한 모습의 세자빈 심씨를 닮았다.

단의왕후는 숙종 12년(1686) 5월에 한양 회현동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청송이고 조선의 개국공신 심덕부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심호(沈浩), 어머니는 고령 박씨다. 1696년 11세에 9세의 세자(경종)와 혼인했다.

하지만 세자빈 심씨의 왕실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시어머니 희빈 장씨가 갑술환국으로 왕비에서 빈으로 강등된(1694) 직후였고, ‘무고의 옥’(1701)으로 시어머니가 사약을 받기에 이르렀다. 이때 세자빈의 나이 16세였다. 이 사건 이후 세자는 병에 시달렸고 후사도 얻지 못했다.

심씨는 어려서부터 외모가 예쁘고 슬기롭고 총명하며 덕을 갖췄다고 한다. 다섯 살 무렵 한여름, 관찰사였던 할아버지가 술을 드시고 잠이 들면 부채로 파리를 쫓으며 곁을 지켰다고 한다. 어린 나이에 양궁의 대전인 인현왕후, 인원왕후, 숙빈 최씨, 명빈 박씨를 잘 모시고, 아울러 희빈 장씨도 극진히 모셨다. 병약한 세자를 섬기는 데도 손색이 없었다 한다. 그러나 숙종의 두 번째 계비인 인원왕후보다 한 살 위의 며느리였으니 쉽지 않았을 것이다.

요절한 단의왕후의 상례 이용 희빈 장씨 복권 시도

시어머니 장희빈  몰락… 고추보다 매웠던 구중궁궐

앙증맞게 조각된 혜릉의 세호.

이러한 풍파 속에서 심씨는 세자가 왕위에 오르기 2년 전인 숙종 44년(1718) 2월 7일 유시(酉時·저녁 9시경)에 갑자기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다. 이때 조선에는 여역(염병, 장티푸스)이 창궐했고 숙종과 세자가 경덕궁으로 급히 옮긴 기록으로 보아 세자빈의 병은 염병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때는 숙종이 왕위에 있긴 했으나 이미 남편인 세자가 청정을 하고 있었다.

어질고 착한 세자빈이 승하하자 시아버지와 남편은 정성을 다해 원(園)의 형식으로 능역을 조성했다. 장례는 소현세자의 상례에 준해 거행했다. 숙종과 중궁전(인원왕후)의 상복은 가례(家禮)와 경국대전의 오복조(五服條)에 의거해 큰며느리의 상사인 기년복을 입고 최고의 예를 갖추었다. 명정은 붉고 넓은 직포에 금색의 예서로 ‘왕세자빈영구(王世子嬪靈柩)’라고 쓰려 했으나 숙종이 ‘왕세자빈재실(王世子嬪梓室)’로 고쳐 쓰게 했다. 시책(諡冊·죽은 자의 생전 행적을 고려해 임금이 내리는 칭호)은 대나무에 쓰고, 시인(諡印·죽은 자의 행적을 적은 기록)은 남양의 옥으로 하고, 증옥(贈玉)은 단천의 심청옥(深靑玉), 증백(贈帛·비단)은 고급으로 하고, 삽선(발인 때 영구 뒤에 세우는 제구)과 만장(輓章·죽음을 애도하는 글귀)을 만들고, 우주(虞主)는 뽕나무로 만든 신주 대신 밤나무에 검은 글씨로 하도록 세자가 하령했다. 원의 입지는 명릉과 익릉 사이 등 3곳의 산지 도형을 본 뒤 숙종이 직접 동구릉 숭릉 아래로 결정했다. 능의 조영에는 승군 1000명이 1개월 동안 동원됐다.

세자빈의 상례 중 세자는 수년 전 사약을 받은 희빈 장씨의 무덤을 인장리에서 옮길 것을 주장했다. 이는 아내의 상중을 이용해 어머니를 복권하려는 시도였다. 이후 희빈 묘는 대빈묘로 승격돼 경기도 광주시 오포면 문형리에 천장했다가 1969년 다시 옮겨져 현재 서오릉 숙종의 능역 곁에 있다.

상중에 조정은 향후 세자의 재혼을 위한 간택을 고려하여 사대부 처녀들의 혼례를 금했다. 이 와중에 숙종의 애첩이며 연잉군(영조)의 모친인 숙빈 최씨가 세자빈 승하 한 달 만에 세상을 떠났다. 숙종의 슬픔은 더해가고 있었다. 빈궁의 임종 두 달 만에 발인 시 백관들은 천담복(淺淡服·옅은 푸른색 옷)을 입고, 나머지 신하와 유생들은 소복 차림으로 도성 밖에 도열해 혼백거와 영어(靈轝)가 지날 때 부복(俯伏)하고 재배했다고 한다.

2년 뒤 경종이 왕위에 오르자 세자빈 심씨를 단의왕후로 추존하고 능호를 혜릉으로 격상시키면서 숙종의 명릉제도(속오례의)와 같이 문무석인, 망주석 등을 아담하게 세웠다. 능으로 격상시키면서 원비의 능을 잘 꾸몄을 만도 한데 아담하게 한 것에서 경종의 정치적 입지가 그리 단단하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경종은 임금이 된 후에도 병치레가 잦고 후사가 없어 부득이 배다른 동생 연잉군에게 세제청정을 맡기는 등 임금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단의왕후의 능역에서도 이런 흔적을 읽을 수 있다.

시어머니 장희빈  몰락… 고추보다 매웠던 구중궁궐

(왼쪽)단의왕후처럼 단정하고 정갈한 양식의 혜릉 정자각. (오른쪽)웃고 있는 혜릉의 무석인. 조각이 투박하고 질박하다.

동구릉 내 유택 중 가장 작은 능원

그래서 혜릉의 능원은 동구릉 내 17분의 유택 중 유일한 원 형식으로 가장 작다. 그러나 석물의 규모가 작아진 대신 사실적으로 묘사한 것이 특징이다. 당시의 시대상인 실사구시의 뜻이 담긴 것이라 하겠다.

혜릉은 비교적 낮은 구릉에 조성됐으며, 능역이 전반적으로 좁다. 곡장 안의 봉분은 병풍석 없이 12칸의 난간석만 둘렀고, 봉분 주위에는 4쌍의 석호와 석양이 교대로 배치돼 있다. 석호와 석양의 조각은 사실적이고 아담하다. 문석인은 173cm의 키에 눈을 치켜뜬 차가운 이미지이고 무석인은 문석인보다 약 10cm 큰 키에 이목구비가 상당히 이국적인데, 특히 치아를 잔뜩 드러내놓고 웃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아마도 연잉군을 지지하는 석공이 만들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문무석인의 코는 상대적으로 크게 표현돼 있다. 망주석 역시 다른 능보다 훨씬 작은 규모로 만들었는데 조각된 세호의 좌우 방향이 다르다. 그러나 세호의 모습이 앙증맞게 잘 표현돼 있다. 장명등은 현재 터만 남아 있고 사라진 상태다. 조선 왕릉 1500여 개 석물 중 유일하게 혜릉의 장명등이 멸실됐다. 아쉽다. 원형을 찾는 작업이 시급하다. 능침 하계 오른쪽 언덕에 묻힌 석물이 무엇인지 발굴해보면 어떨까? 장명등을 거꾸로 처박아놓은 것 같다. 무슨 연고가 있는 것은 아닌지? 홍전문과 정자각은 1995년 새로 복원한 것이다. 혜릉의 금천교는 보이지 않는다.

경종과 계비 선의왕후의 의릉(懿陵)은 서울시 성북구 석관동에 있다. 왕과 왕비의 봉분을 한 언덕에 앞뒤로 배치한 동원상하봉(同原上下封) 능이다.

달밤의 때죽나무

능원을 밝히는 수백, 수천 송이 하얀 꽃무리


시어머니 장희빈  몰락… 고추보다 매웠던 구중궁궐

흰색 꽃을 피우는 때죽나무.

때죽나무는 여름에 도토리 알처럼 생긴 열매를 절구에 찧어서 갯가에 풀면 고기들이 마취돼 떠오르는 것을 보고 고기가 ‘떼로 죽는다’는 뜻에서 때죽나무가 됐다. 때죽나무는 우리나라 전국 산야의 양지에 자생하는 낙엽활엽교목으로 키는 10m 정도 자라며, 가지가 많은 편이다. 습기와 약간의 음지에서 잘 자라 왕릉에서는 소나무 밑이나 상수리나무(도토리나무) 밑에서 볼 수 있다. 5~6월에 종 모양의 흰꽃이 아래로 흐드러져 피며, 나무 한 그루마다 수백 수천 송이의 꽃이 피어 달밤에 보면 흰색 초롱꽃이 능원을 밝히는 것 같다. 특히 5~6월은 잔디가 푸르게 능원을 덮고 있는 때라 더욱 그 멋을 느낄 수 있다. 흰색과 녹색은 보색대비 현상을 일으켜 색감을 더해주고 있다.

그러나 종 모양의 은색 열매는 독성이 있다. 한자 이름으로 제돈과(齊墩果)라 하는데 언덕에 가지런한 열매라는 뜻이다. 또 다른 이름으로 야말리(野茉莉·물푸레나뭇과로 여름에 흰꽃이 피며 향기 나는 식물), 안식향(安息香·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향)이 있다. 능역이 선대 왕과 왕비의 능침 공간임을 고려할 때, 선왕이 현세 정치의 고단함을 잊고 사후에 편히 쉬라는 개념에서 능원 꽃으로 평가돼 조선시대에도 인위적으로 심어서 관리한 것으로 보인다. 5~6월 달밤 선왕의 정원에 흐드러지게 핀 때죽나무 꽃이 신의 정원을 더욱 빛나게 한다.




주간동아 2010.11.22 763호 (p76~78)

  • 이창환 상지영서대 조경학과 교수 55hansong@naver.com 사진 제공·문화재청, 서헌강, 이창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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