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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황이 사회보장病 치료하나

영국 ‘요람에서 무덤까지’ 개혁 목소리 … ‘한국적 사회보장’ 반면교사

불황이 사회보장病 치료하나

불황이 사회보장病 치료하나


이상적인 사회복지를 이야기할 때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한다. 이는 복지국가란 출생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국민의 건강과 복지를 책임지는 국가임을 의미한다. 국가도 국민도 이러한 이상향을 꿈꾼다.

주목할 점은 영국에서 이 같은 표현이 나온 과정 자체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는 것이다. 1941년 독일군의 포탄이 런던 심장부에 우박처럼 쏟아져 내리던 최악의 상황에서도 영국 의회는 만장일치로 경제학자이면서 사회개혁가인 베버리지 경(W. Beveridge)을 위원장으로 하는 위원회를 구성, 전후 영국을 위한 복지국가의 밑그림을 그렸다. 이 위원회는 각계각층의 의견을 수렴해 1942년 영국뿐 아니라 세계 각국의 사회복지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친 보고서를 출간했다. 이것이 유명한 ‘베버리지 보고서’인데, 빈곤 해소를 중심으로 국민의 기본적인 사회생활을 위한 사회보험의 실시와 긴급사태에 대비한 국가부조의 강화를 골자로 한다. 이 보고서에 기초해 국민보험의 모든 급부 대상에 자영업자나 고용자 전부까지 포함하는, 이른바 전 국민이 단일 제도에 가입하는 특징적인 제도가 탄생했다.

오늘날 영국 국민은 누구나 때와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거의 모든 질병을 전액 무료로 진료 및 치료받을 수 있으며, 노후에도 많든 적든 연금을 받으며 생활한다. 이러한 사회보장을 유지하기 위해 현재 국내총생산(GDP)의 20% 이상을 사용하고 있다.

사회보장에 GDP 20% 이상 사용



그러나 자타가 인정하는 선진 복지국가의 모델이었던 영국식 사회보장제도가 국내외적인 경제 요인과 전면적인 개혁의 시대에 일고 있는 사회적 요구를 거스를 수 없게 됐다. 지난 6월 선거 이후 집권한 보수당과 자민당 연립정부의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는 국가 부채가 예상보다 심각하다면서 재정 적자를 해소하려는 정부를 지지해달라고 호소하고 있다. 실제로 3월 기준 영국의 GDP 대비 재정 적자 비율은 G7 선진 국가 중 가장 높은 11.1%에 달했다.

2009년 12월부터 2010년 2월까지 3개월간 영국의 실업자 수는 250만 명으로 이는 1994년 이후 가장 큰 규모이고, 실업률은 8%로 1996년 이후 가장 높았다. 16~24세 청년 실업자는 92만9000명으로 4000명 증가했고, 50대 이상 장년 실업자는 39만6000명으로 7000명 증가했다. 학생 등 구직활동을 하지 않는 비경제활동인구는 11만 명이 늘어난 816만 명인데 전체 인구의 21.5%다. 이처럼 영국도 그날그날 일해 근근이 살아가는 ‘워킹푸어’ 계층의 빈곤 세습이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영국 정부는 1980년대 후반부터 공공부조제도의 개혁에 착수한 이래, 공공부조 수급자를 근로에 참여시키는 등 나름대로 성과를 거뒀지만 최근 복지시스템 전반에 대한 개혁의 필요성이 다시 강조되고 있다. 2010년 7월 발간된 ‘21세기 복지(21st’ Century Welfare)’라는 제목의 보고서는 영국의 복지시스템이 경제와 사회 변화에 뒤처지고 있다고 분석하고, 자국 제도의 문제점으로 크게 2가지 요인을 지적했다. 하나는 일하는 데 따른 인센티브가 충분치 못하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시스템이 지나치게 복잡하다는 것이다.

영국의 사회보장제도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1948년 노동당 정부가 처음 시행한 이후 지금까지도 국민에게 의료서비스를 무상으로 제공하는 ‘국가보건서비스(NHS)’ 시스템이다. 2008년을 기준으로 잉글랜드에 소속된 국가보건서비스의 인원은 의사 13만3662명, 간호사 40만8160명을 비롯해 대략 136만8693명인데, 이들이 6200만 명이 넘는 자국민의 의료보장을 책임지고 있다. 올해 새로 구성된 연립정부는 재정적자가 심각한 상태임에도 기본 정책자료에서 주저 없이 NHS를 ‘영국의 가치’로 규정했다.

이처럼 전 국민 무상 의료서비스 제공은 건강에 대해 안심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국민의 양질의 삶에 큰 버팀목이 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의료기관의 무경쟁 상태가 서비스의 질 저하를 불러오고 국민이 자기 건강관리에 안이해지는 부작용도 내포한다.

한 예로 비만 문제를 보자. 영국에는 대형 사이즈의 옷을 구매하는 여성이 620만 명에 이른다. 이 사실을 바탕으로 의류시장을 비만 여성들이 견인하고 있다는 재미있는 분석도 나왔다. 실제 2003년 회계연도에는 지방제거 수술을 받은 여성이 480명이었으나, 2008년에는 4246명으로 8배 가까이 급증해 앞으로 이 비용이 NHS에 큰 부담이 될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경고한다. 그리고 이 추세라면 지금의 어린이들이 성인이 되는 2050년 비만 인구가 90%에 이를 것이라고 전망한다. 이 보고서는 영국에서 ‘유전적으로 뚱뚱한 사회’가 상식이 됐다고 지적한다.

그래서 민관 합동으로 ‘더 잘 먹고, 더 많이 움직이고, 더 오래 살자’는 슬로건 아래 비만 방지 계몽운동인 ‘the Change4 Life programme’을 전개하고 있다. 이 사회운동은 매스컴, 애니메이션 등 다양한 방법으로 비만의 문제점을 알리는 것으로, 초기에는 5~11세 자녀가 있는 가족을 대상으로 했으나 1~4세 자녀를 둔 부모로까지 확대했다.

최근 영국의 고용장관 크리스 그레이링(Chris Grayling)은 “너무 많은 건강한 성인이 수당을 그들이 살아가는 수단으로 여긴다”고 지적하면서 수당 시스템에 관한 수정을 공표했다. 수만 개의 일자리가 있는데도 구직활동을 하지 않는 사람이 800만 명이 넘는다. 그리고 실직수당을 받으면서 길거리에서 구걸하는 사람도 꽤 있으며 이들 가운데는 연수입이 영국 국민의 평균보다 높은 경우도 있다. 급기야 링컨셔(Lincolnshire) 경찰은 이 같은 구걸자의 처벌에 나섰다.

지난해만 이렇게 부당하게 지급된 액수가 74억 파운드(약 1조4000억 원)에 이른다. 일례로 맨체스터에 사는 한 61세 노인은 걷지 못한다는 이유로 2만 파운드에 가까운 장애수당을 지급받았으나 실제로는 2005년 수술을 받아 보행이 가능한 것이 드러나 큰 비난을 받았다. 이 사실은 이 노인이 댄스경연대회에 참가해 파트너와 흥겹게 춤을 추는 모습이 담긴 동영상을 제보해오는 바람에 알려졌다.

제도의 문제인가, 시민의식의 문제인가

불황이 사회보장病 치료하나

무상 의료시스템을 운영하는 영국의 병원.

이처럼 국가의 사회복지 시스템을 악용하거나 남용하는 비양심적, 비도덕적인 사례가 많이 발생하자 연립정부는 이를 막기 위한 제도 개선에 나섰다. 보수당은 노동당 집권 기간 동안 빈부의 양극화를 초래했다는 비판을 무기로 13년 만에 정권을 잡는 데 성공하고 자민당과 연립정부를 출범했다. 그러나 앞서의 예처럼 제도의 악용이나 남용이 심각해 단지 노동당의 책임만으로 돌릴 수 없는 형편이다.

무상의 의료시스템에 기댄 안일한 건강관리, 이로 인한 비만 문제가 국가의료보장 재정을 위협하는 지경에 이르렀고, 일할 능력이 충분한데도 실업수당에 의존하는 무위도식이 체질화된 사람이 늘어나면서 그들을 지탱해야 하는 국가와 건전한 다른 국민(납세자)에게 큰 부담이 되고 있다.

캐머런 총리의 자문위원 중 한 사람이 실업을 부추기는 영국의 보상문화를 강력 비판했다. 이에 정부는 실질적으로 약물과 알코올 중독자 가운데 재활을 거부한 채 일을 하지 않고 정부 재정만 축내는 이들의 도덕적 해이를 없애고 사회 복귀를 유도하고자 복지수당 같은 재정 지원을 중단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또한 260만 명에 이르는 근로부적격수당 수급자의 근로 능력 유무를 철저히 검증하기 위해 전원 건강검진을 재실시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영국적 사회보장의 틀은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영국 정부는 내년부터 65세가 넘어도 본인의 의사에 반해 해고할 수 없도록 일할 권리를 보장한 새로운 법을 시행하기로 했다. 또 정부로부터 받은 지원금으로 노약자나 장애인이 성매매를 하거나 외설적인 공연을 관람하기 위해 클럽에 가는 것을 서비스 선택권 차원에서 보장하기로 했다. 게다가 많은 알코올 중독자가 재활 명목으로 지원금을 받아 재활보다는 알코올 섭취에 탕진하고 있음에도 범죄 예방 측면에서 어쩔 수 없다는 묵인론자도 적지 않다. 이는 영국인들이 사회보장의 틀 자체보다, 좋은 사회보장제도 및 시스템을 악용하거나 남용하는 데 더 큰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영국의 현실은 복지선진국을 지향하며 ‘한국적 사회보장’의 확립을 위해 노력하는 우리에게 좋은 교훈이 될 것이다. 즉 ‘요람에서 무덤까지’ 보장하는 국가 사회의 건설은 정부의 제도나 노력만으로는 불가능하며, 반드시 국민의 양심적·협조적인 제도 이용이 조화롭게 맞물려야 그 실현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주간동아 2010.10.18 758호 (p68~69)

  • 런던=황경성 킹스칼리지 런던(King's College London) 객원교수 kyungsungh@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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