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55

2010.09.20

바다에서 펄떡대는 에너지 충전

‘인생이 허기질 때 바다로 가라’

  •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 khhan21@hanmail.net

    입력2010-09-20 11: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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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다에서 펄떡대는 에너지 충전

    한창훈 지음/ 문학동네 펴냄/ 367쪽/ 1만3800원

    여자는 겨울 내내 육지로 나가는 여객선을 바라봤다. 겨울 날씨가 좋지 않아 종일 사내와 방구석에만 있다 보니 싸움질만 했다. 걸어서 5분이면 족한 섬마을에는 문화시설이 하나도 없었다. 목욕탕마저 없었다. 여자는 취해 돌아와 곯아떨어진 사내를 보며, 저런 것을 따라 이런 곳으로 들어온 내가 미쳤지, 탄식을 되풀이했다.

    손톱만큼 남아 있던 참을성이 바닥을 드러내자 기다리던 봄이 왔다. 여자는 육지로 가겠다고 선언했다. 화들짝 놀란 사내가 어르고 말리고 빌었으나 그럴수록 여자의 결심은 더 굳건해졌다. 그때 사내의 친구가 도다리를 낚으러 가자고 사내를 불렀다. 사내는 가방을 꺼내는 여자를 노려보다가 “그래, 시원하게 가버려라”는 한마디를 내뱉고는 집을 나섰다. 하지만 저녁에 돌아왔을 때 여자는 집에 있었다. 큰소리 쳐놓고 왜 안 갔느냐는 사내의 물음에 여자의 답은 “도다리는 먹고 가려고”였다.

    인생 최고의 맛을 안겨주는 것이 어디 도다리뿐일까? “갈치 뱃진데기(내장) 못 잊어서 육지로 시집 못 가겠네”란 말을 내려오게 만든 갈치는 간에 특효하다고 정평이 나 있다. ‘쇠고기보다 삼치 맛’이라는 말을 듣는 삼치회의 맛은 독보적이다. 그러나 삼치는 선어 보관이 용이치 않아 내륙 횟집에서는 먹기 어렵다. 소 내장을 넣고 끓인 모자반국은 숙취 해소에 최고다. 숭어회는 달고 차지며 살짝 데친 껍질은 고소하고 쫄깃쫄깃해 숭어 껍질에 밥 싸먹다가 논까지 팔아먹었다는 말까지 나돈다.

    생계형 낚시꾼인 소설가 한창훈의 ‘인생이 허기질 때 바다로 가라’에 등장하는 문어, 고등어, 군소, 볼락, 홍합, 노래미, 병어, 날치, 김, 농어, 붕장어, 고등, 거북손, 미역, 참돔, 소라, 돌돔, 학꽁치, 감성돔, 성게, 우럭, 검복, 톳, 가자미, 해삼 같은 해산물 중 어느 것 하나 최고의 맛을 지니지 않은 것이 없다. 나는 그의 말에 충분히 동의한다. 어떤 장소에서 누구와 먹었는지에 따라 맛은 최고일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생계형 낚시란 레저형 낚시의 반대말로 먹고살기 위해 낚는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사람살이가 항상 힘겹기만 할 것인가? “밤낚시의 묘미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남들 돌아올 때 찾아가는 역행의 맛이 있고 모든 소음을 쓸어낸 적막의 맛도 있다. 넓은 바닷가에서 홀로 불 밝히는 맛도 있고 달빛을 머플러처럼 걸치고 텅 빈 마을길 걸어 돌아가는 맛도 있다. 그리고 새벽 5시에 회 떠놓고 한잔 하는 맛도 빼놓을 수 없다. 사람이 밤에 하는 짓이 몇 가지 되는데 가장 훌륭한 게 이 짓이다”라는 낚시꾼 한창훈의 고백을 듣다 보면 만사 제치고 바다로 가고 싶다. 나도 가끔은 인생이 허해지니 말이다.



    이 책의 부제는 ‘내 밥상 위의 자산어보’다. 자산 정약전은 1814년에 흑산도에서 귀양살이의 고독을 ‘자산어보’라는 기록으로 바꾸었다. 그로부터 약 200년 뒤에 작가 한창훈은 고된 노동과 물리적인 불편 등 여러 악조건 때문에 젊은이가 모두 떠나는 고향 거문도로 돌아와 그만의 ‘자산어보’를 새롭게 집필했다.

    하지만 이 책은 단순한 해산물 보고서가 아니다. 작가는 바다에서 놓친 월척에 안타까워하기도 하지만 그가 만난 사람들의 인생을 낚아 올리고 있다.

    초등학교 3학년인 아이는 길에 올라온 큰 문어와 사투를 벌였다. 문어는 아이를 끌고 물속으로 들어가려 하고 아이는 아이대로 이를 악물고 마당으로 끌고 들어가려다 보니 아이는 코피를 흘리며 다 죽어갈 정도였고, 문어 역시 먹물을 줄줄 흘리며 퍼져 있었다. 문어가 워낙 커 말려서 팔면 제법 받을 수 있을 것 같아 잡아먹지 않겠다는 부모에게 아이는 “아부지하고 어무니하고 잡수라고 내가 목숨 걸고 잡았으니께 팔지 말고 잡수시오”라고 기특하게 말했다. 그래서 하루에 다리 하나씩, 몸통은 마지막 날, 온 식구가 훌륭한 몸보신을 했다.

    아버지는 먼 바다로 나가 잘 돌아오지 않았고 어머니는 가족을 외면하고 떠나버린 가정의 유일한 가장이었던 초등학생 5학년 아이는 낚시를 하다가 어른 팔뚝만 한 우럭을 사생결단하고 잡아올렸다. 손가락이 심하게 굽은 불편한 몸이었지만 할머니와 동생을 먹여 살리겠다는 집념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밖에도 책에는 ‘실패’한 인생이 자주 등장한다. 하지만 그게 진정 실패이기만 한 것일까? 단지 한순간 인생이 허해진 것은 아닐까? 인생이 허해진 사람은 바다로 갈 필요까지 없다. 이 책을 읽으며 책갈피마다 담겨 철썩거리는 뭇 인생의 숨소리를 듣다 보면 그 슬프고도 기구한 삶들을 통해 새삼 세상에서 살맛을 느끼게 될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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