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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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할머니표 고추장과 추석

  • 최영철 기자 ftdog@donga.com

    입력2010-09-17 15:3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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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등학교 1학년 때인가. 외가인 안동군 천전면의 친척 아저씨로부터 급하게 전화가 왔습니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하늘이 무너지는 소식. 외할머니는 의성 김씨 집성촌에 자리 잡은 고가(古家)를 혼자 지키며 사셨지요. 나는 유년시절 방학의 대부분을 그곳에서 보냈습니다. 인근 낙동강에서 손낚시, 파리낚시를 하며 첨벙거렸던 기억, 어머니 다리를 베개 삼아 누워 올려다봤던 별 총총한 하늘, 왕벌 집이 달려 있었던 변소와 넓은 마당을 제 집인 양 뛰어다니던 촌닭들…. 어린 마음에 세상 모든 것을 잃은 듯했습니다.

    하지만 나의 미각에 깊이 팬 기억은 외할머니가 직접 만든 고추장 맛이었습니다. 조금 매운 듯, 달달한 듯, 고소한 듯, 혀에 착착 감기는 그 고추장. 워낙 고소해 참기름 한 방울 넣고 금방 퍼 담은 가마솥밥에 한 숟가락 넣어 비벼먹으면 꿀맛이었지요. 밭에서 갓 캔 햇감자를 뎅강뎅강 썰어 고추장 몇 숟가락 넣고 다진 마늘, 파와 함께 끓이면 고추장 밴 감자와 우러나온 국물은 진짜 일품이었습니다. 배 볼록하게 먹고 숭늉을 들이켠 뒤 처마 밑에 드러누우면 외할머니가 머리 위로 부채를 부쳐주셨습니다.

    이후 나는 고추장만 보면 안동이 생각나고 외할머니 모습이 떠오릅니다. 외할머니표 고추장과 다른 고추장을 비교합니다. 맛의 척도는 항상 그것이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본 기억이지만 나는 외할머니표 고추장에 얼마나 많은 정성이 들어갔는지 잘 압니다. 시작은 인근 영양군에서 이고 지고 가져온 고추를 너른 마당에 흩뿌려 말리는 작업. 말린 고추의 먼지를 닦는 건 내 담당이었죠. 이렇게 탄생한 진짜 태양초 고춧가루에 온갖 과정을 거쳐 탄생한 메줏가루, 엿기름(조청도 환상이었습니다)에 찹쌀가루와 보릿가루를 넣고 만든 고추장. 외할머니가 마지막 찍은 사진도 발효되는 고추장을 휘젓는 모습이었습니다.

    외할머니표 고추장과 추석
    이번 커버스토리를 취재하면서 그 고소한 맛이 보릿가루에서 우러났음을, 또 그 매운맛이 최상급 태양초에서 나왔음을 알았습니다. 이고 지고, 쓸고 닦고, 달이고 섞고 한 그 정성. 고추장 맛은 진정 마케팅의 결과물이 아님을 이제야 깨닫습니다. 외할머니의 정성과 그 손맛이 시리도록 그리운 추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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