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나의 미각에 깊이 팬 기억은 외할머니가 직접 만든 고추장 맛이었습니다. 조금 매운 듯, 달달한 듯, 고소한 듯, 혀에 착착 감기는 그 고추장. 워낙 고소해 참기름 한 방울 넣고 금방 퍼 담은 가마솥밥에 한 숟가락 넣어 비벼먹으면 꿀맛이었지요. 밭에서 갓 캔 햇감자를 뎅강뎅강 썰어 고추장 몇 숟가락 넣고 다진 마늘, 파와 함께 끓이면 고추장 밴 감자와 우러나온 국물은 진짜 일품이었습니다. 배 볼록하게 먹고 숭늉을 들이켠 뒤 처마 밑에 드러누우면 외할머니가 머리 위로 부채를 부쳐주셨습니다.
이후 나는 고추장만 보면 안동이 생각나고 외할머니 모습이 떠오릅니다. 외할머니표 고추장과 다른 고추장을 비교합니다. 맛의 척도는 항상 그것이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본 기억이지만 나는 외할머니표 고추장에 얼마나 많은 정성이 들어갔는지 잘 압니다. 시작은 인근 영양군에서 이고 지고 가져온 고추를 너른 마당에 흩뿌려 말리는 작업. 말린 고추의 먼지를 닦는 건 내 담당이었죠. 이렇게 탄생한 진짜 태양초 고춧가루에 온갖 과정을 거쳐 탄생한 메줏가루, 엿기름(조청도 환상이었습니다)에 찹쌀가루와 보릿가루를 넣고 만든 고추장. 외할머니가 마지막 찍은 사진도 발효되는 고추장을 휘젓는 모습이었습니다.

주간동아 755호 (p3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