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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가 럭비보다 더 짜릿하구나

호주 총선 ‘매직넘버 76’ 다툼에 흥분 … 길라드 총리 ‘무지개 연정’ 드라마 시작

  • 시드니=윤필립 시인·호주 전문 저널리스트 phillipsyd@hanmail.net

정치가 럭비보다 더 짜릿하구나

정치가 럭비보다 더 짜릿하구나

노동당과 야당연합이 치열한 경합을 펼친 2010년 호주 총선은 노동당의 승리로 일단락됐다. 사진은 노동당 소속 줄리아 길라드 총리(왼쪽)와 야당연합 당수 토니 애벗.

호주의 ‘2010년 정치 드라마’가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고 있다. 6월 23일 발생한 정치 쿠데타를 기점으로 시작된 이 드라마는 9월 7일 노동당 재집권 성공으로 1부가 막을 내렸다. 하지만 9월 8일 출범한 노동당 2기 정부의 스토리로 채워질 2부도 향후 3년 동안 높은 시청률을 유지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정치에 관심을 보이지 않던 젊은이들이 “정치가 럭비보다 재미있다”며 곁눈질을 시작했다. 드라마의 묘미인 얽히고설킨 갈등구조와 스포츠 경기의 백미인 역전, 재역전의 상황이 계속 펼쳐졌기 때문.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은, 스포츠 역전극보다 숨 막히는 흥미 만점의 2010년 호주 총선 결과는 아래와 같다.

71대 71(동점) → 72대 71(노동당 리드) → 72대 73(야당연합 역전) → 73대 73(또다시 동점) → 74대 73(노동당 리드) → 74대 74(극적인 동점) → 76대 74(노동당 최후 승리).

76점을 먼저 얻는 팀이 승리하는, 특이한 방식의 농구경기 스코어보드를 보는 것 같다. 그러나 위의 스코어는 8월 21일에 치러져 9월 7일 결판난 2010년 총선에서 얻은 양대 정당의 의석수 변동 상황이다. 이렇듯 17일 동안 동점과 역전이 거듭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젊은이들도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됐다.

손에 땀을 쥔 의석수 변동

호주의 9월은 봄의 출발점이면서 남자들이 한 달 내내 럭비 경기에 몰입하는 ‘남성의 달’이다. 봄의 길목으로 들어서는 9월 1일을 기점으로 럭비 결승리그가 시작되고, 9월 첫째 일요일이 ‘아버지의 날(Father’s Day)’이어서 그야말로 ‘남자들의 세상’인 것. 이런 현상을 두고 일부 여성은 “9월은 남자들이 밤낮없이 럭비 얘기만 하면서 맥주를 퍼마시는 달”이라고 투덜댄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부부간 TV 채널 선택권 다툼이 일어나고, 십중팔구는 럭비 시청으로 결판이 난다. “드라마나 실컷 보게 하루빨리 럭비 시즌이 끝났으면 좋겠다”는 여성들의 볼멘소리와 함께.



대개 9월 한 달 동안, 호주에서 발행되는 메이저 신문들의 머리기사는 정치가 아닌 럭비 결승리그로 채워진다. 오죽하면 멜버른대 제프 브레이니 교수가 “호주에 럭비와 맥주가 없었으면 혁명이 여러 차례 일어났을 것”이라고 말했을까. 한국과 미국에서 각각 5월과 6월에 어버이의 날, 아버지의 날을 지내는 것과 달리, 호주가 유독 9월에 아버지의 날을 정한 것도 럭비 결승리그와 무관하지 않다.

호주 가정은 우대 순위가 엄마>자녀>애완동물>아빠로 매겨진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이렇듯 가정에서 홀대받는 아버지들을 위해 럭비 결승리그 기간에 아버지의 날을 끼워 넣은 것이다. 평소에는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지만, 그날만은 아내와 자녀 눈치 안 보고 친구들과 바비큐를 즐기며 럭비 중계를 볼 수 있다.

그런데 올해 9월의 호주 가정 풍속도는 과거와 크게 달라졌다. TV 채널을 드라마나 럭비 중계가 아닌 정치 관련 뉴스에 맞춘 것.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의석수 변동 상황과 그 결과에 따라 천국과 지옥을 넘나드는 정치인들의 모습이 어떤 드라마, 어떤 럭비 경기보다 흥미진진했기 때문이다.

호주 선거관리위원회(AEC)에서 발표한 자료를 보면 역대 총선의 투표율은 95%를 웃돈다. 독제국가도 아닌 호주에서 어떻게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일까? 호주에도 정치에 유난히 관심이 많은 ‘정치 과잉’ 현상이 있는 걸까? 그렇지 않다. 그 반대다. 호주는 세계 최초로 강제투표제도(compulsory voting system)를 채택한 나라다. 합당한 사유 없이 투표를 하지 않으면 벌금을 물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정치적 무관심을 막을 수 없기 때문에 채택한 궁여지책이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 드라마가 럭비 결승리그를 압도한 것은 일대 사건이었다. 왜 그랬을까?

70년 만에 ‘헝 의회’ 다시 경험

호주는 아직도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을 국가수반으로 하는 입헌군주제 국가다. 게다가 웨스트민스터 시스템에 근거한 내각책임제를 채택하고 있다. 하원의 총 의석수 150석의 과반수인 75석보다 1석 많은 76석을 차지해야 집권할 수 있다. 그 숫자를 언론에서는 ‘매직넘버 76’이라 부른다.

2010년 총선에서 노동당은 72석을 얻고 제1야당인 자유-국민연합당(이하 야당연합)은 73석을 얻는 데 그쳤다. 각각 매직넘버 76에서 -4석과 -3석을 기록한 것. 결국 자력으로 차기 정부를 구성할 수 없는 양대 정당은 녹색당 당선자 1명과 무소속 당선자 4명을 영입하려고 17일 동안 숨 막히는 협상을 벌였다.

노동당과 이념적으로 통하는 녹색당 당선자는 일찌감치 노동당 지지를 선언했다. 그 후 무소속 당선자 4명이 ‘킹메이커’가 돼 막판까지 협상을 벌였는데, 그중 3명이 우파 성향의 국민당 출신이고 나머지 1명이 녹색당 출신이다. 호주 정당을 이념적 스펙트럼으로 구분하면 우파 국민당, 중도우파 자유당, 중도좌파 노동당, 좌파 녹색당이다. 이를 감안해 국민당 출신 3명이 야당연합을, 녹색당 출신 1명이 노동당을 지지할 것으로 예상됐다.

그러나 예상은 빗나갔다. 녹색당 출신 1명이 노동당을 지지한 것은 맞았으나 국민당 출신 3명 중 1명만 야당연합으로 가고, 2명이 노동당 지지를 선언해 노동당에 최종 승리를 안겨줬다. 이 두 의원은 보수 성향이 강한 농촌 지역구를 갖고 있으면서도 진보 성향의 노동당을 선택했다. 그 이유는 노동당이 전국적으로 인터넷고속망 구축을 약속하는 등 약 100억 호주달러의 예산을 농촌 발전을 위해 쓰겠다고 약속했기 때문. 게다가 좌파 정당인 녹색당이 주도권을 쥐고 있는 상원을 감안해, 노동당이 집권해야 향후 3년 동안 안정적인 정부를 이끌 수 있다고 판단한 것. 호주의 법안은 대부분 하원에서 발의하고 표결한 다음 상원의 인준을 받기 때문에 상원을 장악하지 못하면 정국의 안정을 도모할 수 없다.

노동당 소속 줄리아 길라드 총리는 천신만고 끝에 노동당 재집권의 꿈을 이끌어냈지만 자력으로 정부를 구성할 수 없는 ‘헝 의회(Hung Parliament)’ 형국을 면할 수 없게 됐다. 과반의석을 확보하지 못한 소수정부가 국정을 안정적으로 이끌 수 없다는 의미에서 ‘hung(천장에 대롱대롱 매달렸다는 뜻)’이란 부정적인 말이 생겨났다. 호주는 1940년 이후 70년 만에 ‘헝 의회’를 경험하게 됐다. 길라드 총리는 최초의 이민자 출신 총리면서 최초의 선출직 여성 총리의 영예를 얻었다. 그러나 우파-중도좌파-좌파 의원을 망라하는 ‘무지개 연정’을 이끌게 돼 정치력을 시험받는 처지가 됐다. 요즘 젊은이들한테 럭비 결승리그보다 재미있다는 평을 받는 ‘호주 정치 드라마’ 제2부가 막 시작된 것이다.



주간동아 2010.09.13 754호 (p62~63)

시드니=윤필립 시인·호주 전문 저널리스트 phillipsyd@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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