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38

2010.05.24

영국 아슬아슬 연정, 험난한 앞날

보수-중도좌파 전혀 다른 DNA 섞여 … 보수당·자유민주당 모두 물밑 반발

  • 코벤트리=성기영 통신원 sung.kiyoung@gmail.com

    입력2010-05-24 15:5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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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 아슬아슬 연정, 험난한 앞날

    보수당의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신임 총리(왼쪽)와 자유민주당의 닉 클레그 부총리는 ‘허니문 커플’을 연상할 정도로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보이고 있다. 하지만 이런 화해 무드가 언제까지 갈지는 미지수다.

    영국에서 보수-중도좌파 연립정권(이하 연정) 출범 후 첫 의회가 소집된 5월 19일 아침. 중도좌파 일간지 ‘인디펜던트’에 흥미로운 만평 하나가 실렸다. 의사당 총리석에 앉은 보수당 소속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의 무릎 위에 반바지 정장 차림의 자유민주당 소속 닉 클레그 부총리가 걸터앉아 빨대로 콜라를 마시고 있는 장면이었다. 연정 파트너인 클레그 부총리를 아빠 무릎 위에 올라앉은 어린아이로 묘사한 이 만평은 연정의 미래를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5월 7일 치른 영국 총선 결과, 가장 각광받은 정치인으로 대부분 언론은 총리 자리에 오른 캐머런보다 제3당인 자유민주당 당수 클레그를 꼽는다. 650석 중 306석을 얻고도 과반수를 차지하지 못한 제1당을 상대로, 57석짜리 미니 정당이 연정 협상을 벌여 부총리를 포함한 22개 각료직 중 5개를 차지한 것은 분명 당수의 정치력을 보여주었다. 게다가 차관급 각료까지 포함하면 이번에 선출된 자유민주당 의원의 절반 가까이가 내각에 참여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이렇게 화려한 성적표를 들고 연정에 참여한 자유민주당의 앞날이 탄탄대로인 것은 아니다. 정치노선이 워낙 다른 두 정당이 선거운동 기간의 앙금을 털고 화학적으로 결합하려면 넘어야 할 산이 한둘이 아니다. 특히 앞으로 벌어질 각종 현안을 둘러싼 표 대결에서 연정 내 소수파인 자유민주당이 보수당과 의견차가 생기면 연정은 금세 삐걱거릴 것이다. 물론 총선 직후 양당 간 연정 협상에서 의견이 갈리는 일부 법안에 대해 자유민주당이 기권표를 행사할 수 있도록 안전장치를 마련해놓긴 했다. 그러나 이런 장치를 마련해놓은 것 자체가 보수당과는 정치적 DNA가 전혀 다른 자유민주당이 연정 내에서 자칫 들러리로 전락할 가능성이 있음을 어느 정도 인정한 것 아니냐는 시각도 있다.

    화학적 결합 각종 현안서 의견차

    자칫 보수당에 이용만 당할 수 있다는 위기감은 특히 일선 현장 조직에서 감지되고 있다. 보수당과 노동당에 비해 당내 민주주의를 더욱 강조해온 자유민주당은 당내 의사결정 과정에서 일선 활동가들의 목소리를 중시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이번엔 일선 조직뿐 아니라 중진급에 해당하는 자유민주당 전직 당수들까지도 이런 우려에 힘을 싣고 있다. 포문을 연 것은 1999년부터 7년간 자유민주당을 이끌어 온 찰스 케네디 의원이다.



    케네디 전 당수는 총선이 끝나고 2주 후 중도좌파 일간지에 기고문을 보내 이번 연정 실험은 결국 보수당이 자유민주당을 ‘삼켜버리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나아가 보수당과의 연정을 승인하는 임시 전당대회에서 투표 자체를 거부하겠다고 공언했다.

    보수당 내 반발도 심상치 않다. 특히 자유당과의 연정 협상에서 총리의 의회 해산권을 포기하고, 재적 의원 55%가 동의해야 임기 중에 총선을 실시할 수 있도록 명문화한 조항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영국의 의원내각제 시스템은 총리가 의회 해산과 총선을 요구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다. 하지만 중진의원들은 이 합의가 결국 ‘절름발이 정부’를 낳는 게 아니냐고 우려한다. 특히 2005년 당수 경선에서 캐머런 총리에게 패한 뒤 절치부심해온 데이비드 데이비스 의원이 이런 반대 움직임에 가세했다. 캐머런 총리로서는 골칫거리가 하나 늘어난 셈.

    게다가 보수당은 이번에 선출된 의원의 절반 가까이가 초선의원이다. 당내에서는 초선의원들이 지역구 유권자를 의식해 자기 목소리를 분명히 내면서, 경우에 따라서는 지도부 방침에 반기를 들고 나올지도 모른다고 우려하고 있다.

    영국 아슬아슬 연정, 험난한 앞날

    영국의 보수-자유민주당 연립정부 내각이 5월 13일 첫 각료회의를 열고 재정적자 감축 방안 등을 논의했다.

    그뿐 아니라 실제 법안 협상 단계를 들여다보면 문제는 당내 반발보다 훨씬 복잡하다. 정치적 혈통이 서로 다른 우파 보수정당과 중도좌파 진보정당의 연정 실험은 벌써부터 ‘불가능의 예술’로 불릴 만큼 험난한 앞날을 예고하고 있다. 먼저 보수당 의원들은 1가구 2주택 양도소득세율의 대폭 인상을 약속한 자유민주당 공약에 동의할 경우 전통 지지층을 잃을 수 있다며 전전긍긍한다. 가석방 요건 등을 대폭 강화해 범죄율을 낮추겠다는 보수당 공약이 전통적으로 인권 존중을 표방해온 자유민주당의 정책과 충돌해 어떻게 변질될지도 걱정.

    사정은 자유민주당 쪽도 마찬가지다. 자유민주당 소속으로 산업부 장관을 맡은 60대 후반의 백전노장 빈스 케이블은 시중 은행의 소매금융과 인베스트먼트 뱅킹을 분리하는 금융개혁안을 선호하지만, 이에 반대하는 보수당 소속의 40대 재무부 장관 조지 오스본이 정부 서열상 선임이라 눈치만 보고 있다.

    아직 수면 아래에서만 감지

    보수당이 테러리스트들에게 영국행 난민 티켓을 주는 결과를 초래했다며 폐지 후 대체 입법을 주장해온 인권법에 대해서도 자유민주당이 어떻게 대처할지 관심거리. 보수당 지지자들은 이 인권법 조항 때문에 테러 용의자들이 강제 추방되지 않고 영국에 눌러앉아 살고 있다며 비판해왔다. 이후 보수당은 대체 입법을 통해 영국 법원의 결정이 유럽연합 인권규약보다 우선할 수 있도록 제도를 정비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이는 유로존 가입을 공약할 정도로 ‘친(親)유럽연합’ 노선을 표방해 온 클레그 부총리의 정치노선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다. 보수 성향 언론들은 벌써부터 보수당이 연정 아래서 이 공약을 사실상 폐기할지 모른다며 우려하고 있다.

    양당 간 정책적 차이는 이런 굵직굵직한 이슈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보수당이 과거 노동당이 도입했던, 개를 이용한 사냥 금지조치를 의원 자유투표로 폐지해야 한다는 공약을 내건 데 대해 자유민주당은 거리를 두고 있다. 이렇게 수많은 정책적 차이점을 가진 두 정당이 법안 작성 과정에서 사사건건 대립할 경우, 연정의 미래는 불투명해질지도 모른다는 게 비관론자들의 우려다.

    그러나 양당 간 불협화음은 아직까지 수면 아래에서만 감지될 뿐 겉으로 드러난 적은 없다. 적에서 동지로 탈바꿈한 40대 초반의 동갑내기 정치인 캐머런 총리와 클레그 부총리 사이도 언론 앞에서는 ‘허니문 커플’을 연상시킬 정도로 화기애애한 분위기다. 그래서 당분간은 이런 ‘연정 화해 무드’가 지속될 가능성이 크다. 문제는 양당이 선거기간에 표방해온 공약이 연정 합의에 따라 하나하나 폐기되거나 변질될 때마다 전통 지지층의 여론에 어떤 변화가 생기느냐 하는 점이다. 연정 합의를 이행하는 게 전통 지지층의 이탈을 가져온다는 판단이 들 경우 당내 비주류 세력의 목소리가 커지고, 이는 곧 연정의 미래를 위협하는 요인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그 시점이 언제가 될지 누구도 자신 있게 말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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