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36

2010.05.10

“환헤지는 무슨…” 키코 트라우마

수출기업 환율변동 날벼락 앉아서 맞을 판 … 기업가 의욕 꺾일까 우려

  • 손영일 기자 scud2007@donga.com

    입력2010-05-10 13: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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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헤지는 무슨…” 키코 트라우마
    “제가 다시는 (환헤지를) 하나 보세요. 쳐다보기도 싫습니다.”

    자동차 금형업체 TL테크 안용준 대표는 키코(Knock-In, Knock-Out)라는 말만 들어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그가 운영하는 TL테크는 2009년 매출 167억 원 중 80%가 수출에서 나올 만큼 수출 의존도가 높다. 하지만 2008년 초, 환율이 930원을 넘으면 그 차익의 2배를 물게 하는 키코 상품에 가입했다가 큰 낭패를 봤다. 2009년 1월 환율이 1300원이 넘으면서 월 30만 달러 이상 손해를 본 것. 실현 손실만 24억여 원.

    “은행이 공단까지 찾아와 키코 상품을 팔 때 이런 구조라는 것을 전혀 알리지 않았습니다. 당한 놈이 바보지만 은행이 노골적으로 속이러 왔다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현재 그는 ‘키코 피해기업 공동대책위원회’ 대표를 맡아 은행 상대로 소송을 벌이고 있다. 환율이 하락하면서 환차손도 늘지만, 리스크가 큰 통화선물을 일부 하고 있을 뿐 특별한 환헤지를 하지는 않는다.

    환율 하락세 … 환헤지 수요는 줄어



    안 대표처럼 수출이 주력인 기업의 경영자들은 환율 때문에 속을 끓이기 일쑤다. 좋은 제품을 만들고 우수한 수출 실적을 기록했어도 환율변동 탓에 오히려 손해를 보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미국에 100만 달러어치 제품을 수출하기로 했는데 대금은 9개월 뒤 들어온다 가정할 때, 현재 환율 1000원으로 계산하면 대략 10억 원의 매출을 올릴 수 있다. 그런데 환율이 어떻게 움직일지 종잡을 수 없다. 환율이 1500원으로 오르면 매출은 15억 원으로 늘지만, 반대로 환율이 500원으로 떨어지면 매출은 5억 원으로 반 토막이 난다.

    환율이 고정되지 않고 하루에도 몇 번씩 바뀌고, 오늘과 내일 다르다 보니 환율변동에 따라 보유 통화의 가치도 불확실해지는 환위험에 노출된다. 환율변동과 관련해 별도의 관리로 환위험을 제거 또는 회피하는 것을 환헤지(hedge)라고 한다. 현재 환율은 2010년 2월 초 1174원에서 2010년 4월 말 1103.2원으로 떨어지면서 지난 1년간 대세 하락을 이어갔다. 환율의 하락 추세가 지속되면서 수출기업의 환헤지 필요성은 높아졌지만 수요는 오히려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중소기업의 대표적인 환헤지 상품으로 꼽히던 수출환보험도 2008년 1분기는 30억 달러를 웃돌았지만 올해 1분기는 2억 달러 수준에 그친다. 손실 가능성이 거의 없는 선물환거래도 신통치 않다. 선물환은 미래의 특정 시점에 달러화와 원화를 교환하기로 약속하고 현재 시점에서 환율을 미리 정해놓는 계약을 말한다. 4월 12일 한국은행이 발표한 ‘2010년 1분기 중 외환시장 동향’에 따르면 국내 기업의 선물환 거래는 4월 들어 19억 달러 순매수로 전환했다. 이는 지난해 5월 이후 10개월 만에 처음이다. 은행마다 환헤지 상품도 실종됐다. 수출입은행이 2007년부터 제공하는 ‘선물환 지원서비스’는 2009년엔 1800만 달러였으나 올해는 이용실적이 전무하다. 외환은행의 ‘헤지 마스터’ 이용등록 기업도 2010년 3월 말 현재 2421개로 2009년 12월 말에 비해 겨우 22개 늘었을 뿐이다. 정상적인 환헤지 시장이 마비된 셈이다.

    이처럼 수출기업이 환헤지를 기피하는 가장 큰 이유는 키코(KIKO), 즉 환율이 일정 범위 안에서 변동할 경우 미리 약정한 환율에 약정금액을 팔 수 있도록 한 파생금융 상품을 통해 큰 손실을 입었던 것이 트라우마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중소기업중앙회 국제통상실 김태환 부장은 “키코로 적게는 수억, 많게는 수십 수백억 원 손해를 봤던 경험 탓에 중소기업들은 차라리 환헤지를 안 하고 환차손을 보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고 전했다.

    실제 지난 3월 한국수출보험공사가 전국 423개 기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응답 기업의 절반이 넘는 53.4%가 ‘환위험 관리를 전혀 하지 않는다’고 했다. 특히 수출실적 1000만 달러 미만 중소기업 중 환위험 관리를 하는 곳은 32.3%에 불과했다. 그러다 보니 수출대금에 대해 100% 환헤지를 하기보다는 원자재, 반제품 수입 결제대금으로 돌려 일부 금액에 대해서만 환헤지를 하거나 환차손을 보면서 아예 포기하고 있다.

    은행들 “기업이 알아서 할 일”

    문제는 기업들이 환헤지를 하지 않는 것이 비단 환차손을 보는 데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중소기업들은 “환위험 때문에 기업가 정신이 사라질 지경”이라며 고충을 토로했다. 전자부품업체 A사 대표는 “은행 장난질에 수십억 원씩 손해를 보는데 누가 기업을 운영하고 싶겠나. 이럴 바엔 투자를 하고 기업을 키워가기보다 현상유지나 하면서 편안히 사는 게 낫다는 생각을 한다”고 털어놨다.

    환위험에 그대로 노출되면 기업은 성장의 한계에 부딪힌다. 일부 기업은 환차손을 피하기 위해 애초부터 보수적으로 환율을 계산해 1년간 경영계획을 세운다. 예를 들어 올해 환율 변동폭이 1100~1200원으로 예상돼도 1000원까지 환율이 떨어진다고 보고 수출가격을 설정하는 것. 당연히 외국기업보다 가격 경쟁력이 떨어지는 것은 피할 수 없다. A사 대표는 “수익을 더 많이 낼 수 있는데도 환율 때문에 기회를 잃으면 피해는 결국 국민경제에 돌아간다”고 지적했다.

    상황이 이렇지만 뾰족한 환헤지 대책은 나오지 않고 있다. 정부는 지난해 3월 외화 조달 독려 차원에서 ‘공공기관 등의 환위험관리에 관한 표준지침’을 개정해 공기업이 환헤지를 탄력적으로 운용할 수 있게 기준을 완화했다. 하지만 외화 조달 필요성이 급격히 줄어들자 외화 조달 즉시 100% 환헤지 원칙으로 다시 돌아갔다.

    공기업과 달리 민간기업에 대한 환헤지 대책은 미미한 수준이다. 한국수출보험공사 환변동사업부 관계자는 “개별 기업이 환율 움직임에 따라 환헤지를 하는 것은 수출계약 시 영업이익을 산출하는 적정 환율이 있기 때문이다. 원칙적으로 선물환이든 수출환보험이든, 그런 영업이익을 보장해주는 거라면 환헤지를 하는 게 맞다. 그래서 기업들이 환헤지에 대해 올바른 인식을 갖도록 교육한다”고 밝혔다. 결국 환헤지는 각 기업이 알아서 할 수밖에 없는 셈이다. 환율이 한창 하락하던 2007년 ‘꺾기 영업’까지 동원하며 키코를 팔던 은행들도 정작 환율이 급락세를 보이는 최근에는 “요즘 은행 처지에서 먼저 환헤지 얘기를 꺼내는 건 금기사항”이라며 난감해한다. 외환은행 관계자는 “은행이 나서서 (환헤지를) 하라고 강요할 수 없는 것이고, 고객이 선택하는 것”이라며 말을 아꼈다.

    4월 30일 국제 신용평가사인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 폴 콜린 글로벌 기업·정부 신용평가 담당 부사장은 “한국은 금융위기를 잘 견뎠으며 국가신용등급이 상대적인 안정성을 보인다. 향후 조금 올라갈 수 있다”고 밝혔다. 이 밖에도 중국의 위안화 절상 가능성, 외국인 주식매수세, 무역수지 흑자 지속 등으로 조만간 환율이 1000원대로 내려앉을 것이란 전망도 제기된다. 하지만 개별 기업도, 은행도, 정부도 적극적으로 환헤지에 나서지 않는 상황에서 환율하락이 장기간 지속되면 수출업체들은 막대한 환손실에 무방비로 노출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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