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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병직 교수의 5분 세계사

폼페이 타임캡슐을 만든 화산폭발

찬란한 로마 문화 생생히 증언 대재앙의 역설 … 아이슬란드 화산재 충격 여파는 일단락

  • 안병직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ahnbj@snu.ac.kr

폼페이 타임캡슐을 만든 화산폭발

아이슬란드 에이야프얄라요쿨 화산에서 분출된 화산재로 인해 유럽지역에 항공기 운항이 중단된 사태가 우려와는 달리 더 악화되지 않고 끝났다. 이번 항공대란 기간에 세계적으로 700여만 명의 항공기 이용자가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 국지적 차원의 자연재해도 그 여파가 글로벌화한다는 점에서 전 세계가 하나의 ‘지구촌’이 됐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다.

화산 폭발은 지진, 홍수, 가뭄, 해일 등과 마찬가지로 불의의 재난에 속한다. 그런데 인류의 역사에는 화산 폭발이 재해로 그치지 않고 오히려 기적을 가져온 행운으로 바뀐 사례가 있다. 화산 폭발이 재앙이 아니라 축복이 된 역설의 현장이 바로 고대 로마시대 도시유적지 폼페이다. 오늘날에도 세계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이 진귀한 유적지가 근 2000년 전 고대문화의 면모를 간직할 수 있었던 것은 화산 폭발 덕분이다. 기원후 79년 남부 이탈리아의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했을 때 인근 폼페이는 온 도시가 화산재에 묻혀 오랫동안 지하에서 마치 타임캡슐에 밀봉된 것처럼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이다.

폼페이 타임캡슐을 만든 화산폭발
79년 8월 대분화 … 주민 2000여 명과 도시 전체 사라져

폼페이는 기원전 10세기경 오스키(Osci)어를 사용하는 고대 이탈리아 원주민의 정착지로 출발했다가 기원전 7세기 이후 지중해 전 지역으로 진출하던 그리스인의 식민시가 됐다. 그리고 기원전 5세기부터는 내륙 산악지역에서 이주해온 삼니움 족의 영지로 바뀌었고, 기원전 4세기 말 남하한 로마인의 침략에 굴복한 뒤 로마 영토가 됐다.

베수비오 산 남동 기슭 나폴리 만의 해안가에 자리 잡은 폼페이는 천혜의 자연조건을 갖춘 도시였다. 겨울이 짧은 반면 봄과 여름이 긴 폼페이의 기후는 온화하고 쾌적했으며, 토양은 1년에 3모작이 가능할 정도로 비옥했다. 또 지척의 바다는 어업자원이 풍부했고, 도시 옆으로는 하상교통로로서 내륙과 연결되는 사르누스 강이 흘렀다. 이처럼 기후, 토양, 교통에서 빼어난 입지조건을 갖춘 폼페이는 농업과 어업 그리고 교역을 통해 경제적으로 번성하던 도시였고, 총연장 3.2km에 이르는 성벽 안 0.65㎢ 크기의 땅에 2만여 명의 주민이 살 정도로 인구가 조밀한 곳이었다. 아울러 전망 좋은 근교 곳곳에는 로마 상류층의 호화별장이 자리한 휴양지이기도 했다. 한마디로 폼페이는 축복받은 땅이었다.



그러나 폼페이의 축복을 치명적으로 위협하는 요소가 하나 있었다. 도시 배후의 베수비오 화산이었다. 해발 약 1300m 높이의 이 화산은 겉보기에는 전혀 위협적이지 않았다. 비옥한 산기슭에는 목초지와 과수원, 포도밭이 즐비했고 정상 근처에도 새가 둥지를 틀 정도로 나무가 우거졌다. 폼페이 도시 형성 이후 한 번도 분화한 적이 없던 이 화산을 경계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무려 1000년 넘게 침묵하던 이 화산은 62년 폼페이에 큰 피해를 가져온 지진으로 다시 움트기 시작했고, 17년 뒤 마침내 화산활동을 재개했다. 79년 8월 24일부터 25일까지 18시간 동안 계속된 대분화는 하늘을 향해 거대한 불덩이를 토하는 그야말로 장관을 연출했다. 엄청난 양의 암석 파편과 화산재를 뿜어낸 베수비오 화산의 폭발로 폼페이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두께 5~7m의 화산재가 폼페이에 쏟아지면서 주민 2000여 명과 도시 전체가 순식간에 자취를 감춘 것이다.

화산 폭발 후 흔적도 없이 사라진 비운의 도시 폼페이는 오랫동안 망각됐다. 로마시대 문헌을 통해 폼페이의 비극은 알고 있었으나 정확한 위치는 아무도 몰랐다. 지하에 매몰된 도시의 잔해가 수세기에 걸쳐 간헐적으로 발견됐지만, 폼페이의 실체가 처음 확인된 것은 18세기 중엽이었다. 당시 남부 이탈리아의 지배자였던 스페인 국왕의 후원 아래 이뤄진 발굴 작업에서 ‘폼페이 공동체’란 글이 새겨진 유물이 출토된 것이다. 하지만 스페인 그리고 18세기 말 이 지역을 점령한 프랑스에 의해 이뤄진 발굴 작업은 값비싼 고대유물의 출토에만 관심을 둔 약탈 수준을 넘지 못했다. 1787년 현지를 방문한 독일의 대문호 괴테도 발굴 작업이 무질서하다고 한탄했다.

학술적이고 체계적인 탐사가 이뤄진 것은 1850년대 말 민족통일을 이룬 이탈리아가 국가적 사업으로 발굴 작업에 착수하면서부터였다. 이후 이탈리아뿐 아니라 독일, 미국 등 여러 나라의 고고학자가 새로운 고고학적 지식과 기술을 동원해 수십 년간 발굴 작업에 매달리면서 지하 도시는 베일을 벗고 조금씩 실체를 드러냈다. 특히 화산 폭발 당시 공포와 절망 속에 죽음을 맞은 희생자의 모습을 석고주형으로 복원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마치 스냅사진처럼 대참사의 순간이 재현됐고, 이는 예술가들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폼페이 최후의 날’을 소재로 한 그림, 소설, 영화가 잇따랐던 것이다.

원형경기장, 수영장, 극장 … 발굴지역 10%가 레저 시설

현재까지도 도시의 약 3분의 1이 매몰 상태지만 그동안 드러난 고대 도시의 실체는 놀라운 것이다. 우선 도시 설비가 그렇다. 폼페이의 거리는 화산암으로 포장됐으며 도로변에는 쓰레기를 처리하는 도랑이 설치됐다. 돌로 만든 아치형 수로가 40km나 떨어진 베수비오 산의 수원(水源)에서 도시까지 이어졌으며, 이 수로를 타고 흘러온 물이 지하에 매설된 납 파이프를 거쳐 10개 이상의 시내 수조에 저장됐다가 시내 곳곳에 공급됐다.

폼페이 도심에는 종교와 아울러 세속생활의 중심으로서 장방형의 광장이 있었고, 그 옆에는 재판과 환전, 사업가들 회합의 장소로 이용되던 거대한 공회당이 자리 잡았다. 시내에는 제우스와 아폴로 등 그리스 신을 숭배하는 신전이 10개가 넘었다. 상점가 아반단차를 비롯해 시내 곳곳에 빵집, 채소가게, 대장간, 유리 제조공장, 금은 세공장 등이 있었다. 상점에서 판매하는 접시나 항아리 가운데는 멀리 스페인, 소아시아, 에게 해 지역에서 생산된 수입품도 있었다.

폼페이 시민의 주거지는 정원이 딸린 호화스러운 대저택에서 평범한 2, 3층 구조의 아파트, 그리고 가게에 딸린 방까지 다양했다. 이 다양한 주택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폼페이의 거의 모든 사회계층이 실내외 벽면이나 바닥을 회화적 이미지로 장식했다는 것이다. 시각예술에 대한 시민들의 열정과 취향이 이 도시를 프레스코 벽화와 모자이크의 보고(寶庫)로 만들었다. 벽화와 모자이크의 소재는 그리스 신화나 트로이 전쟁에서 정물, 풍물, 인물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했다. 그 가운데는 알렉산더 대왕과 다리우스 3세의 이수스 전투를 소재로 한 대형 모자이크(왼쪽 작은 사진)도 포함됐다. 폼페이의 시각예술품 중 오늘날 가장 널리 알려진 이 작품은 고대 로마문화에 미친 헬레니즘의 영향을 상징한다.

발굴지역의 10%를 레저 시설이 차지할 정도로 폼페인 시민들은 레저 활동에도 관심이 많았다. 폼페이 외곽에는 약 2만 명의 관중이 검투사의 경기를 관람할 수 있는 원형경기장과 레슬링, 복싱, 달리기, 수영 등을 위한 복합 스포츠 시설이 있었다. 시내에는 연극이나 음악 공연을 위한 2개의 극장이 있었고, 사교와 휴식의 공간으로서 3개의 공공목욕탕이 주야로 가동했으며 1개가 추가로 건설 중이었다. 130여 개에 이르는 술집은 음주와 도박, 게임 등 각종 오락을 제공했으며, 색다른 향락을 원하는 이들을 위해서는 외설적인 그림과 글로 실내를 장식한 유곽이 7개 이상 있었다.

유곽뿐 아니라 폼페이의 건물 곳곳에 가득 찬 것이 낙서였다. 뾰족한 못이나 나뭇조각으로 성벽이나 공공건물, 개인주택의 벽에 새긴 낙서는 수천 개에 달했다. 낙서는 연정, 유머, 음담패설, 불만, 저주, 인신공격 등과 아울러 행정 게시문이나 공직선거 후보자의 홍보 등 다양한 내용으로 구성됐다. 가치, 믿음, 감정 등 내면의 세계를 토로하는 낙서를 보면 미래의 인류를 향해 고대 세계에 대해 생생히 증언하기 위해 대재앙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폼페이 시민들의 운명이었던가 싶다.



주간동아 2010.05.03 735호 (p84~85)

안병직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ahnbj@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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