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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철 교수의 5분 한국사

‘배중[ 杯中 ]의 사영[ 蛇影 ]’ 마음을 아십니까?

진나라 명재상 낙광, 친구 포용한 넓은 인품 … 지방선거 구린내 공천과 너무 대비

‘배중[ 杯中 ]의 사영[ 蛇影 ]’ 마음을 아십니까?

‘진서(晋書)’ 권43 열전 제13 ‘낙광전(樂廣傳)’을 펼치면, 의심을 품다 보면 무엇이 보이고 무슨 소리가 들리는 듯하는 현상을 ‘배중(杯中)의 사영(蛇影)’이라 언명했다. 흔히 말하는 노이로제(Neurose)라고 볼 수 있는 신체적 병증(病症)이다.

중국 진(晋)나라(서기 265∼316) 육양(陽) 땅에 담론을 잘하는 청담가(淸談家)로 낙광(樂廣)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어릴 적에 큰길에서 놀다가 때마침 지나가는 위(魏)나라 장군 하후현(夏侯玄)의 행차와 만난 적이 있다. 당대 용맹을 날리던 하후현은 길 양쪽에 늘어선 무리에서 유독 어린 소년을 눈여겨봤다.

그의 외모와 거동이 보통 소년과는 달랐기 때문이다. 하후현은 말에서 내려 낙광에게 열심히 학문을 닦을 것을 독려하고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그리고 어른이 되면 반드시 훌륭한 인물이 돼 후세에 이름을 남길 것이라고 격려했다.

그러나 낙광은 워낙 한미한 집안 출신이라 여느 아이처럼 정식으로 학문을 닦을 형편이 아니었다. 그래서 가사를 도우며 틈틈이 독학했다. 그런 과정에서 그는 점차 조용하고 신중하며 겸허한 인품을 가지게 됐고, 어떤 일에나 잘난 체하지 않으며 남의 얘기에 참견하지 않았다.

인품과 철저한 직무능력 겸비한 수재



후일 낙광은 왕융(王戎)이 형주자사(荊州刺史)가 되자 주군(州郡)에서 재학(才學)이 있는 인물을 임용하는 수재(秀才)로 뽑혀 벼슬길에 올랐다. 한결같은 그의 인품과 철저한 직무능력에 대해 각계각층의 명사들은 “잘 닦은 거울과 같이 밝고 구름을 헤쳐서 푸른 하늘을 보는 것과 같다”라고 격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런 낙광이 하남성(河南省)의 장관 노릇을 하던 시절, 날마다 퇴근 후 찾아와서 함께 술 마시며 담소하던 친구가 어찌 된 영문인지 하루 이틀 발길이 끊기더니 여러 날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었다. 기다리던 끝에 낙광은 하인을 시켜 그 친구가 오지 않는 연유를 알아오게 했다.

그런데 심부름을 다녀온 하인은 “지난번 찾아오셔서 약주를 나누실 때, 나리께서 권한 술잔을 받아 마시려는데 술잔에 뱀이 들어 있더라는 게 아니겠습니까. 몹시 언짢았지만 체면상 마셨는데 그날부터 탈이 나서 통 오시지 못한 눈치더군요”라고 이상한 보고를 했다.

실로 어처구니없고 허무맹랑한 일이었다. 그래서 낙광은 곰곰이 생각해봤다. ‘그날 우리가 어디서 술을 마셨더라. 관청 사무실 뒷방이었지.’ 그러자 떠오르는 것이 그 방 벽에 활이 걸렸는데 그 양쪽 끝에 뱀이 그려져 있다는 사실이었다. 낙광이 뱀을 놓고 생각할 수 있는 일이란 그것뿐이었다. 술잔이 아무리 크다고 한들 살아서 꿈틀거리는 뱀은 물론 죽어서 비틀어진 뱀일지라도 술병에 있다가 친구에게 권할 때 술잔 속에 들어갈 수는 없지 않은가.

낙광은 두루 생각한 뒤 친구를 청해 지난번과 같은 사무실 뒷방에 마주앉아 술자리를 했다. 먼저 자기가 한 잔 가득 부어 마신 다음 친구에게 잔을 내밀어 술을 따라준 뒤 부드럽게 물었다.

“오늘도 술잔에 무언가 보이는 게 있소?”

그러자 친구는 미간을 찡그리며 난처한 얼굴로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그 징그러운 뱀이 보이는구려”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낙광은 그 말을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 “잠시 잔을 놓고 저길 보시오. 그 뱀은 바로 저 활 틀에 걸려 있는 활대에 그려진 뱀하고 똑같이 생기지 않았소”라며 놀랄세라 조용조용 손짓과 함께 말했다. 그제야 친구도 눈을 돌려 바라보더니 무릎을 치면서 아무런 티도 없는 술잔을 들었다.

이처럼 낙광은 매우 침착하고 냉정하며 따뜻한 성정을 지녔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지혜로운 인물이었다. 그 후 낙광은 좌복야(左僕射)라는 높은 벼슬까지 올랐으나 억울한 사건에 연루돼 비극적으로 삶을 마감했다.

검증되지 않은 인물 반드시 심판해야

고려 무신집권기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사람인 이인로(李仁老)가 쓴 설화문학집 ‘파한집(破閑集)’에 “옛날 반악(潘岳)은 낙광의 지취(旨趣)를 터득하여 명필이 됐다”라는 문장이 나온다. 이를 통해 우리나라에서도 낙광이 지식인 사회에서 회자되는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최근 6·2지방선거를 앞두고 공천을 둘러싼 잡음이 끊이지 않는다. 며칠 전 후보 신청을 놓고서 금품상납 사건이 발생하는 등 공천 장사가 심각한 양상을 띠고 있다. 앞으로 여야가 공천 후유증으로 서로 승복하지 않고 비방하는 작태가 벌어질 게 불을 보듯 뻔하다. 선거 때마다 공천문제가 불거지는 것은 각 정당이 투명하게 공천방식을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풀뿌리 민주주의가 정착된 지 20년이 됐는데도 공천의 틀을 제시하지 못하는 것은 아직도 밀실정치의 담합이 만연하다는 증거다.

이번 6·2지방선거는 부도덕하고 의혹받는 인물들이 존경과 신뢰로 포장, 현실에서 권력을 차지하려는 정치놀음이 돼서는 안 된다. 검증되지 않은 인물이 사회지도층으로 변신해 민주주의를 교란하는 작태를 반드시 심판해야 한다. 특히 서울시장과 경기지사 자리는 청와대로 향하는 징검다리로 예비후보들의 행보가 정치권의 화두가 되고 있다. 왜 그들은 청와대에 연연할까. 누구나 그 자리에 욕심을 내는 것은 어쩌면 그 자리에 앉았던 인물들의 자질이 그들을 무차별적으로 불러들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무엇보다 그들은 자신을 냉철히 돌아보고, 한국의 21세기를 ‘희망의 세기’로 만들기 위해 장밋빛 세상이 아닌 현실의 시무(時務)를 제시해야 한다.

언제 우리는 격양가(擊壤歌·풍년이 들어 농부가 태평한 세월을 즐기는 노래)를 부르며 ‘배중(杯中)의 사영(蛇影)’ 마시기를 할 수 있을까.



주간동아 2010.05.04 734호 (p76~77)

  • 이영철 목원대 겸임교수 hanguksao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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