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30

2010.04.06

수릉 대신 도성 밖 10리에 새 왕조 시작 의미 담아 조성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

  • 이창환 상지영서대 조경학과 교수 55hansong@naver.com

    입력2010-03-31 10: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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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릉 대신 도성 밖 10리에 새 왕조 시작 의미 담아 조성

    건원릉의 능침에는 이성계의 고향 함흥에서 가져온 억새풀을 심었다. 봉분 위의 억새풀은 태조의 유언에 따라 벌초하지 않고 4월 5일 한식 때만 한 차례 한다.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李成桂, 1335~1408)의 능호는 건원릉(健元陵)이며 단릉(單陵)이다. 건원릉은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있는 동구릉의 하나로 중앙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했다. 이 자리는 조선 개국의 실력자이며 2차에 걸친 왕자의 난으로 왕권을 잡은 태종(이방원)이 결정한 곳이다.

    원래 태조는 애첩 신덕왕후 강씨와 함께 묻히고자 여러 차례 수릉(壽陵·생전에 미리 정해놓는 무덤) 자리를 물색했다. 신덕왕후가 승하하자 한양 도성 안 경복궁 서남방의 황화방(皇華坊)에 신덕왕후의 능침을 만들고 자신의 능침도 오른쪽에 조성했다.

    그러나 태종은 부친이 잡아놓은 수릉 대신 도성 밖 동북방에 있는 양주의 검암산 아래에 태조릉을 조영했다. 도성 안의 수릉을 옮긴다는 명분을 앞세워 계모 신덕왕후의 능도 옮기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이후 태종은 도성 안에는 왕실이나 사가의 무덤을 쓰지 못하게 하고, 도성 10리 밖에 능역을 조성하도록 했다. 이 제도는 후에 ‘경국대전’에 법문화됐다. 그래서 지금도 도성 안에는 왕릉이나 무덤이 한 기도 없다. 현명한 도시계획이었다.

    태조, 경복궁 서남방의 황화방에 능침 조성

    태상왕(이성계)은 1408년 5월 24일 새벽 창덕궁 광연루 아래 별전에서 74세를 일기로 승하했다. 이성계는 고려 충숙왕 때인 1335년 10월 11일 함경도 화령부 흑석리에서 아버지 이자춘과 어머니 최씨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성계는 제왕이 되기 이전의 이름이며, 왕실에서의 이름은 단(旦·이성계가 왕이 된 뒤 왕실에서는 외자의 이름을 썼는데, 사가와 다른 이름으로 하여 왕실의 권위를 나타내기 위해서였다)이고 호는 송헌(松軒)이다. 송헌은 그의 친구 이색이 그의 사저에 있는 소나무를 보고 지어준 것이라고 전한다.



    이성계는 대대로 내려온 화령부의 무인 집안으로, 원나라의 쇠퇴기인 1356년 철령 이북의 영토를 수복하기 위해 쌍성총관부를 공격한 것을 시작으로 1388년 위화도회군에 이르기까지 30여 년간 외적을 격퇴하며 전쟁터에서 산 맹장이었다. 위화도회군의 성공으로 고려(34왕 474년) 왕조를 무너뜨리고 1392년 7월 17일 조선을 건국했다. 1394년 10월 28일 한양에 종묘와 사직을 세우고 천도했으며 즉위 직후 계비 신덕왕후 강씨의 소생인 여덟째 아들 방석을 세자로 결정했다.

    그러자 이성계 등극의 최대 공로자인 이방원은 이에 불만을 품고 이복동생 방번과 방석, 정도전을 제거했다. 이성계는 왕위를 둘째 아들 방과(정종)에게 물려주고 고통스러운 말년을 보냈으니 재위한 지 6년 2개월 만이다. 2년 뒤인 1400년 정월 이방원은 넷째 형 방간이 일으킨 2차 왕자의 난을 진압하고 세자로 책봉돼 그해 11월 왕위에 올랐으나 태조의 분노는 극에 달해 옥새도 물려주지 않고 고향 함흥으로 가버렸다. 이때 이방원이 문안을 위해 보낸 차사를 죽여 ‘함흥차사’라는 말까지 유래됐다. 이후 태상왕의 친구인 무학대사의 권유로 1402년 한양으로 돌아와 불도에 정진하다 승하했다.

    “최고의 길지, 이제 근심 걱정 없어졌다”

    수릉 대신 도성 밖 10리에 새 왕조 시작 의미 담아 조성

    건원릉의 진입 공간에서 제향 공간으로 이어지는 곳.

    태조가 승하하자 태종은 창덕궁 동남쪽에 있는 왕자의 독서실에 여막을 정하고 날마다 ‘주자가례’의 예를 보았다. 태조의 국장 총책임자인 총호사는 영의정부사 하륜(河崙)이 맡았다. 산릉(山陵·국장을 하기 전에 아직 이름을 정하지 않은 새 능)의 자리는 하륜과 김귀인 등이 양주의 검암(儉巖)을 길지로 천거하고 건설은 당시 최고의 기술자 박자청(朴子靑)이 담당했다. 박자청은 왕실 내시 출신으로, 태조가 왕위에 오르자 궁문 파수를 맡았다. 이때 세자인 방석(의안대군)이 소명(召命:출입증) 없이 궁궐에 드는 것을 막다가 발길에 걷어채고 얼굴에 상처를 입었지만 굽히지 않았다 한다.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태조가 자청을 칭찬하고 상과 직급을 올려주었다. 이후 자청은 왕실 건설책임자로 문묘와 문소전을 짓고, 공조판서(건설부 장관)가 돼 제릉(태조의 첫째 부인 신의왕후의 능)과 건원릉을 감독했다. 세종은 67세를 일기로 그가 죽자 국민장으로 하고 3일간 정사를 보지 않았다고 한다.

    산릉 건설에는 충청, 황해, 강원도에서 6000여 명의 기술자가 동원됐다. 건원릉의 석실은 회격실과 전실 등이 논의됐지만 석실로 최종 조성됐다. 유교를 국시로 했으나 태종은 산릉 재궁에 개경사를 세우고, 검암산 아래 지금의 재실 위쪽에 원찰을 조성했다.

    승하 후 태상왕의 시호(諡號)는 생전 공덕을 칭송해 ‘지인계운성문신무대왕(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이라 했다. 종묘에 신주를 모시는 묘호(廟號)는 왕으로서의 덕목을 나타내는 것으로 ‘태조(太祖)’라 하고, 능호(陵號)는 개국왕임을 고려해 세 글자인 ‘건원릉(健元陵)’이라 했다. 이후 모든 능호는 두 글자로 지었다.

    태조의 조문으로 왔던 명나라 사신 기보(祁保)와 임관 등이 건원릉 능침 산세를 보고 “어찌 이와 같이 하늘이 만든 땅이 있을 것인가. 반드시 인위적으로 만든 산형 같다”고 감탄했다. 풍수가들은 이곳을 “주산은 금수형(金水形)이며 용맥은 장유형(長乳形)이고, 형국은 청룡승천형(靑龍昇天形)”이라 한다. 그래서인지 이곳 동구릉 입구에는 여의주형 방지원도의 연못이 2개나 조성돼 있다. 동구릉 왼쪽에 흐르는 물길의 이름은 왕숙천(王宿川)이다. 동구릉의 명당수로 명칭과 연계해서 해석할 수 있다.

    왕자의 난을 겪으면서 왕권을 잡은 태종은 태조와 불편한 관계에서 아버지가 직접 잡은 수릉마저 옮기려 했으니 얼마나 근심이 컸을까? 태종은 검암산 아래 아버지 태조의 유택을 확정하고 돌아오는 길에 망우리 고개를 넘으면서 수행원들에게 “이제는 근심 걱정이 다 없어졌다”고 했다고 한다. 이것이 망우리(忘憂里) 고개의 유래가 됐다. 태조가 조성한 수릉을 번복한 뒤 태종이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래서인지 태조 승하 2개월 뒤인 6월 28일에야 산역을 시작했다. 고민한 흔적이 엿보인다. 5월 24일 승하한 태조의 장례는 9월 9일 치렀다.

    건원릉은 고려의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현·정릉(玄·正陵) 제도를 기본으로 따랐으나 석물의 배치와 장명등의 조형 등은 새로운 양식의 도입으로 일정한 변화를 주어 새 왕조가 시작됐음을 시사했다. 봉분 주위로 곡장을 두르고 장명등이 사각에서 팔각으로 변하는 형식의 변화를 가져왔다. 아울러 조선의 통치철학이었던 유교의 예에 따라 정자각 전면에 참도, 뒷면에 신도, 정자각 뒤편에 망료위 등을 설치했다.

    건원릉의 비각에는 능상 측에 신도비와 정자각 측에 묘표가 있다. 신도비는 1409년에 세웠다. 비의 형식은 귀부와 비신, 이수를 갖추었는데 당대 최고의 조각 작품으로 평가된다. 이런 형식은 통일신라 이후에 계승된 전통이다. 비문 상부의 전액은 문신 정구(鄭矩, 1350~1418)가 쓰고, 비문은 당대의 문장가 권근(權 近, 1352∼1409, 조선의 개국공신)이 글을 짓고, 음기의 글은 변계량(卞季良, 1369~1430)이 지었다. 글씨는 성석린(成石璘, 1338~1423, 고려 말·조선 초의 서예가)이 썼다. 이를 태종이 극찬했다.

    수릉 대신 도성 밖 10리에 새 왕조 시작 의미 담아 조성

    능침에서 내려다본 건원릉의 겨울 풍경.

    신도비 앞에는 조선 개국의 업적과 치적을 새기고, 뒤편에는 개국공신들의 이름을 기록했다. 묘표는 500년 후 태조를 황제로 추존하면서 세운 것으로 고종이 친히 썼다. 형태는 신도비와 비슷하며 용의 조각상이 아름답다.

    탁 트인 열린 경관, 신하가 읍조리는 능선

    건원릉은 능침을 둘러싼 송림과 능침 앞으로 시야가 탁 트인 경관이 아름답다. 앞에 펼쳐진 능선들은 신하가 읍조리는 형상이라고 하며 여러 겹의 능선을 꽃잎, 능침을 꽃심으로 보았다. 병풍석을 두른 봉분 위의 흙과 억새풀은 이성계의 고향 함흥에서 가져다 조영했다. 봉분 위 억새풀은 태조의 유언에 따라 벌초하지 않고 4월 5일 한식 때만 한 차례 하는 것이 특이하다. 가을에 흰색 억새풀이 바람에 휘날리는 모습이 마치 요동 벌판을 말 달리던 맹장 이성계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태조는 74세를 향수하는 동안 2명의 왕후에게서 8남 3녀, 1명의 후궁에게서 2녀를 두었다. 태조의 첫째 부인 신의왕후 한씨의 능은 능호를 제릉(齊陵)이라 했고, 현재 북한의 개성군 판문면 상도리에 있다. 둘째 부인 신덕왕후 강씨의 능호는 정릉(貞陵)이며 서울시 성북구 정릉동에 있다.

    능제시설 장명등

    명당 오래 밝힌다는 의미 … 팔각 또는 사각으로 화려하게 장식


    수릉 대신 도성 밖 10리에 새 왕조 시작 의미 담아 조성

    고려시대 현정릉의 장명등과 조선시대 건원릉의 장명등. 사각형에서 팔각형으로 양식이 바뀐 것을 볼 수 있다.

    장명등(長明燈)은 능침 공간의 중심시설이다. 능침 혈 앞의 명당을 오랫동안 밝힌다는 의미로, 왕조의 영원성을 나타내는 듯하다. 사찰에서 볼 수 있는 탑, 석등과 유사한 형태로 유교적인 무덤 양식에 불교가 더해진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능묘의 혼유석 바로 앞 문인 공간에 설치했으나 후기에 와서 무인 공간에 배치하기도 했다. 영조 이후에 문·무인 공간이 높낮이와 공간을 구분하지 않고 하나가 됐는데 이런 흐름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다시 말해 신분제도의 변화를 볼 수 있는 것이다.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오면서 나타난 능제의 대표적인 변화가 장명등이다. 고려시대의 사각 장명등이 조선시대는 팔각 장명등으로 변한 것이다. 팔각 장명등은 보주가 있는 지붕돌 아래 가운데에 등을 넣을 수 있는 화창(火窓)이 뚫린 몸체가 있고, 그 아래에 안정적인 받침대가 있다. 팔각 혹은 사각의 외면에 각종 문양으로 화려하게 장식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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