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28

2010.03.23

그래도 희망은 살아 있다

사카모토 준지 감독의 ‘어둠의 아이들’

  • 강유정 영화평론가·국문학 박사 noxkang@hanmail.net

    입력2010-03-17 17:5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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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도 희망은 살아 있다

    ‘어둠의 아이들’은 잔혹세상에 바치는 희망가다.

    사카모토 준지 감독의 ‘어둠의 아이들’은 르포와 다큐멘터리 중간쯤에 놓인 극영화다. 결론적으로 ‘극영화’이니 아무리 사실적 사건이거나 재현이라 할지라도 필름에 담긴 이상 허구다. 아니, 어쩌면 관객들은 ‘어둠의 아이들’을 보며 영화 속 일들이 허구이기를 간절히 바랄지도 모르겠다. ‘당신은 이 영화를 마주할 용기가 있습니까?’라는 홍보 문구처럼 간간이 얼굴을 들이미는 쓰마부키 사토시라는 배우가 얼마나 반가운지 모른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을 통해 알려진 이 배우는 우리가 스크린에서 보고 있는 일들이 ‘영화’라는 사실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엄밀히 말해 ‘어둠의 아이들’은 극영화 형식을 빌린 사실이다. 좀더 과장해서 말하면 뉴스에서 다룰 만한 사건이다. 문제는 이런 사건들을 사람들이 조직적으로, 구조적으로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사건화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 문제는 바로 태국을 비롯한 동남아시아에서 일어나고 있는 오래 묵은 아동학대로 압축된다.

    영화 속 아동학대는 ‘과연 인간에게 윤리와 도덕이라는 것이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지게 한다. 태국의 아이들은 산 채로 장기를 도난당하고, 남녀를 불문하고 소아 성도착자들에게 학대당한다. 부모는 이를 알면서도 가난 때문에 여러 남매 중 한 아이를 ‘판다’. 여행가방에, 쓰레기봉투에 담겨 아이들은 그렇게 매도되고 인계된다.

    이 끔찍한 풍경을 그대로 담아낸다면 포르노그래피의 잔혹성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사카모토 준지 감독은 사건의 사실성을 담보하는 수준에서 사태의 심각성을 간접적으로 알리는 데 성공한다. 직접적으로 노출되지는 않지만, 어른들의 혼탁한 상상력은 그런 상징적 장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쉽게 알아차린다. 세상에 나쁜 일이 얼마나 많은지 아는 어른이기에 이 참상의 비유를 무참히 발견하는 것이다.

    무참하다는 표현을 쓸 수밖에 없을 만큼 아이들이 당하는 고통은 사실적이며 험악하다. 최근에 벌어진 성도착증 환자의 살해행위처럼 ‘왜 어른들이 저렇게 험악한 욕망을 가져야 하는가’라고 인간성 자체에 회의를 느끼게 된다는 뜻이다. 집 안에 있는 아이들을 납치하고, 병에 걸리면 쓰레기와 함께 아이를 버리는 세상. 우리는 스마트폰으로 즉시 e메일을 확인하는 최첨단의 시대에 살면서 한편으론 극악한 범죄를 눈감는 이 시대의 한가운데 놓여 있는 것이다.



    사카모토 준지 감독은 영화 속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을 한 소녀의 구원을 보여준다. 이 구원은 영화적 결말이면서 한편으론 아직 남아 있는 희망을 의미한다. 소녀 한 명의 구원으로 이 말도 안 되는 참극의 공간이 사라질 수 있기를 바란다는 듯이 말이다.

    사람은 동물과 비교되고 대조되고 차별화되기도 하지만, 어떤 점에서는 사람이기 때문에 더 잔혹한 세상이 펼쳐진다는 생각도 든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인면수심이라는 사자성어 속 동물이라는 비유도 사치스럽다. 사카모토 준지 감독은 아마 이 영상들을 통해 사람들이 끔찍한 현실을 각인하고, 이에 조금이라도 관심 가져주기를 바라는 듯하다. 영화가 르포나 뉴스보다 힘이 세다면 바로 이 점일 것이다. 영화는 구원의 희망을 직설법으로 제시하고, 뉴스보다 더한 감정적 몰입을 유도할 수 있으니 말이다. 만일 이 영화를 보고 격분한다면, 감독의 의도에 가장 가깝게 다가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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