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25

2010.03.02

“애들이 사투리 배우면 어떡해요”

지방 이전 공공기관 직원들 싱숭생숭 … 10명 중 6명 “나 홀로 이주” 공동화 우려

  • 배수강 기자 bsk@donga.com

    입력2010-02-23 1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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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들이 사투리 배우면 어떡해요”
    “어쩌겠습니까? 가라니 가는 건데. 거참, 할 말이 없네요.”

    입이라도 맞춘 듯 비슷한 반응이었다. 2012년까지 지방 10개 혁신도시로 옮겨 일을 해야 하는 공공기관 직원들 말이다.

    세종시 수정안 발표 이후 혁신도시 역차별 논란이 일자, 정부는 혁신도시 지원 보완책을 내놓았지만 정작 떠나야 하는 직원들은 (수도권에) ‘남는 이들의 탁상행정’이라고 일축한다.

    “국토해양부는 ‘혁신도시 이전기관 부지 매입 등 차질 없이 추진 중’(1월7일)이라고 발표하고, 야당은 ‘혁신도시 계획대로 추진되는 기관 전무하다’(민주당 이시종 의원) ‘세종시 수정안으로 혁신도시 기업도시 망칠 것’(민주당 양승조 의원)이라며 반박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정치놀음에 관심 없다. 이전 일정이 다소 늦춰지더라도 결국은 가야 한다. 끝까지 버텨보다가 지원책이라도 많이 받고 가는 게 그나마 현실적인 목표다.”

    경북으로 이전 예정인 한 공공기관의 직원은 한때 공공기관 이전 백지화 투쟁을 벌이기도 했지만, 이제는 직원들이 대세를 인정하고 이왕이면 더 좋은 (이전) 조건을 따내서 이전하려 한다며 분위기를 전했다. 그는 “전학 가기 싫다고 보채는 아이 꼴이 됐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기자는 2월8~11일, 17일 지방 이전 공공기관 직원(교수 포함) 12명과 대면 혹은 전화 인터뷰를 가졌다. 직원들은 법(혁신도시특별법)을 바꿔서라도 어떻게든 내려가지 않으려는 ‘저항파’에서부터 최소 인원만 이전하려는 ‘눈 가리고 아웅파’, 이전 지역의 아파트 시세를 알아보는 ‘적응파’까지 다양한 모습을 보여줬다.

    직원 절반만 이전 계획 … “2012년 이전은 어렵다”

    “우리는 절반 정도만 이전하려고요. 지방 출신 직원은 출신지 근처의 지사로 순환 배치하고, 자금운용팀이나 대외협력팀 등은 수도권에 남길 거예요. 경영지원팀 일부만 내려보내는 거죠. 행정안전부에서는 대거 이전하라고 ‘푸시’하지만 직원들도 생각해야 하잖아요.”

    2월17일 오전 경기도 모처에서 만난 공기업 고위직 B씨는 직원들의 고충과 정부 시책 사이에서 절묘한 줄타기를 꿈꾸고 있었다. 전날 전화통화에서 “여기(직장)에서 전화로 말하기 어렵다. 내일 만나서 이야기하자”며 상세하게 대중교통편을 알려준 이유도 곧 알 수 있었다.

    그의 한마디 한마디에 “할 말을 하지 않으면 못 살겠다”는 답답함이 묻어났다. 직원들의 불만과 정부 시책 사이에서 고민하던 그는 서류가방에서 직장 조직도를 꺼낸 뒤 설명을 이어갔다.

    “본사 직원을 적절히 배분해 각 지사로 내려보낼 거예요. 지방 출신 직원들은 출신지 인근 광역시 지사로 가기를 희망하죠. (조직도를 가리키며) 각 시도에 ○○명씩 남기고 본사에는 주요 업무부서만 두면, 대략 경영지원 업무부서 직원 40% 정도가 옮겨가게 돼요. 물론 정부의 눈치를 보면서 끝까지 ‘개기다’가 마지막에 베팅해서 많은 지원을 얻는 것이 우리로선 최선이죠. 언론에서도 이런 움직임을 나쁘게만 봐서는 안 됩니다.”

    그는 시도 지사 근무자 수와 기관명은 끝까지 비밀로 해달라며 신신당부했다.

    “애들이 사투리 배우면 어떡해요”
    서울 역삼동 공무원연금관리공단(이하 공단) 직원은 한국노총, 민주노총과 연계해 혁신도시특별법을 개정해서라도 이전을 막아야 한다는 분위기와, 대세는 이미 정해졌다는 자포자기가 교차했다.

    “공무원연금 수급권자가 28만명이 넘고, 그중 제주도에는 1.4%가 공무원연금을 받고 있어요. 미미한 수준이죠. 그런 지역으로 이전하라니 답답할 수밖에요. 고객이 많은 곳에 기관이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공단 노조 관계자는 여전히 ‘제주도 이전’은 상식 밖 정치놀음이라며 개탄했다.

    “서울~제주 왕복교통비만 20만원이에요. 가족은 서울에 남고 ‘나 홀로 이주’하는 직원이 대부분인 상황에서 교통비도 큰 문제죠. 민주노총 등과 공청회, 간사단 모임을 가지면서 제주 이전의 부당성을 알리고, 한편 직원 항공료 보전 같은 지원책을 촉구할 계획입니다.”

    “두 집 살림 각오… 여차하면 그만 둘 생각도”

    그는 기자에게 법 개정에 나서달라고 요청했다.

    공단의 또 다른 직원은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지방 이전 백지화를 기대하는 직원이 많았다. 하지만 대통령이 두 번이나 ‘혁신도시는 그대로 간다’고 밝혔으니 그런 기대는 접었다. 그 대신 최대한 (서울 본사와 서울지부에) 인원을 남기려고 한다”며 분위기를 전했다. 그는 법무팀, 임대주택 관리부서, 연기금운용팀 등은 서울에 남고 각 지사의 필수인력을 제외하면 직원 50% 정도가 이전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지방 이전이 현실화되면 이직을 고려하겠다는 움직임도 포착됐다. 충남으로 이전하는 국방대의 한 관계자는 “학교 내 분위기가 좋지 않다. 교수 중에는 다른 학교를 알아보는 사람도 있다. 교수들은 대체로 교육열이 높아, 이전하더라도 대부분 두 집 살림을 하려고 한다. 지난해까지는 이전 반대 움직임이 많았는데, 요즘은 포기했는지 적극적이지가 않다. 2015년은 돼야 이전할 것 같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의 말처럼 정부는 ‘2012년 이전을 목표로 차질 없이 진행 중’이라고 했지만 취재 결과 곳곳에서 ‘차질’이 감지됐다.

    경북으로 이전하는 한국전력기술의 한 관계자는 “이전과 관련해 구체화된 것이 하나도 없다. 이전하면 나를 포함해 대부분이 ‘홀아비 직원’이 될 것이다. 직원들은 이전 시점을 2014년으로 본다”고 말했다. 한국전력기술은 정식 직원만 1830명. 여기에 협력업체 직원을 포함하면 2500여 명에 이르는 큰 기관이다.

    부산으로 이전하는 한 연구원의 직원은 “연구원 이전 예정지가 지반이 약한 매립지여서 고가의 연구시설을 설치할 수 있을지 논란이 많다. 내부적으로는 2015년에 이전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부산에 가면 ‘자녀들이 사투리를 쓰면 어쩌나’ 걱정하는 예비 엄마도 많다”고 말했다.

    ‘홀아비 직원’이니 ‘나 홀로 이주’니 하는 대목에서 짐작은 했겠지만, 공공기관 직원이 지방 이전을 꺼리는 주된 이유는 자녀 교육 문제와 가족 별거로 인한 생활비 문제가 가장 컸다. ‘주간동아’가 입수한 직원 500명 이상인 한 공공기관의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응답자의 60.2%가 지방 이전 시 ‘단독 부임’하겠다고 답했다. 그 이유는 △자녀 학교 문제(61.2%) △배우자 맞벌이(29.6%) △부모 부양(7.5%) 순이었다. 취학자녀가 있는데도 별거하는 이유로는 ‘우수한 학교 부족’(70.9%)이 압도적이었다. 지방 이전 시 문제점으로는 ‘가족 별거로 인한 생활비 증액’(23.4%), ‘병원과 복지공간 등 편의시설 부족’(16.8%)을 꼽았다.

    교육 문제와 집값 때문에 갈수록 고민

    “애들이 사투리 배우면 어떡해요”
    강원도로 이전 예정인 직원의 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정부는 2012년까지 3만9000여 명의 직원, 가족 포함 27만4000여 명이 ‘수도권 엑소더스 행렬’에 참여할 것으로 보지만 이는 정부의 기대치일 뿐입니다. 교육이나 편의시설이 거의 없는 곳으로 누가 가려고 하겠습니까. 특수목적고등학교나 영재학교 유치 등도 계획안에 있지만, 이는 직원 자녀들을 위한 학교가 아닙니다. 직원 자녀 중심으로 입학시키면 지역주민들이 가만있겠습니까. 대부분 혼자 부임할 예정이어서, 이전 인구는 가족을 포함해 10만명도 채 안 될 겁니다.”

    그는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는 주거, 교육, 의료, 문화 등 우수한 정주 여건 조성을 적극 지원한다’는 공공기관의 지방 이전 관련 노정(勞政) 합의사항을 충실히 지키라고 요구할 뿐, 대안도 없다고 푸념했다.

    이는 공공기관의 지방 이전 시기에만 초점을 맞춰 일을 진행하는 정부가 새겨들어야 할 대목이다. 가족 단위의 인구 유입 차질과 일정 지연은 자칫 혁신도시 공동화 현상을 빚을 수 있으며, 이는 ‘혁신도시 실패’라는 결과로 나타날 수도 있다.

    교육 문제와 함께 집값에 대한 고민도 깊어지고 있다. 세종시로 이전 예정인 산업기술연구회의 한 직원은 “대전 대덕특구가 생기고 연구원들이 서울에서 대전으로 대거 내려갈 당시 서울에 있는 부동산을 판 사람은 큰 손해를 봤다. 서울의 집값은 계속 올랐지만 대전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육 문제와 함께 집을 팔 경우에 예상되는 자산 가치의 하락을 염려하는 사람이 많다”고 말했다.

    이전 예정지의 미분양 아파트 시세를 알아보는 발 빠른 움직임도 나타났다. 전남으로 이전하는 한 공공기관 직원의 말이다.

    “1월 말 이전 예정지에 다녀왔는데 85㎡의 아파트 시세가 8000만~9000만원이었어요. 현지 부동산에서도 공공기관 이전이 본격화될 때 한 번, 그리고 혁신도시 정주환경이 개선될 때 또 한 번 집값 상승 호재가 있을 것으로 내다보더군요. 시세차익을 위해 조만간 아파트를 살 계획입니다.”

    이에 대해 국토해양부 공공기관지방이전추진단 김기석 기획국장은 “혁신도시는 공공기관이 먼저 입주해 불쏘시개 구실을 하고 이후 학교와 상업시설, 편의시설이 들어서면서 신도시를 만드는 것이 목표다. 청사 설계와 공사기간을 감안해 최소 올해 안에 착공하면 2012년 이전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지역균형발전을 위해 ‘가라’는 정부와 ‘등 떠밀려 내려간다’는 직원들, 그들이 빚어내는 앙상블이 기립박수를 받을지, 야유를 받을지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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