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20

2010.01.19

진부한 스토리 집어삼킨 3D 황홀경

고정관념과 모든 한계 뒤엎은 ‘아바타’, 미래 영화 패러다임 제시

  • 심영섭 영화평론가·대구사이버대 교수 chinablue9@hanmail.net

    입력2010-01-13 13:3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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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부한 스토리 집어삼킨 3D 황홀경

    영화 ‘아바타’는 심도 있는 3D 비주얼로 영화 속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허물었다.

    우리는 모두 그 대사를 알고 있다. “나는 세상의 왕이다.” 영화 ‘타이타닉’에서 뱃머리의 꼭대기에 올라선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한 말이다. 제임스 카메론 감독은 이 대사를 그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도 외쳤다. 영화 ‘아바타’로 올 3월 열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기술 부문의 상을 휩쓸 것이 분명한 그는 수상소감을 이렇게 바꿀지도 모른다. “나는 이 우주의 신이다!”

    “나는 이 우주의 신이다!”

    혹 당신은 우리가 보고 있는 영화가 지금과 같은 형태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 있는가. 관객들이 몇 개의 단추로 줄거리나 캐릭터를 선택하고, ‘딥 포커스(카메라와 피사체의 거리에 관계없이 초점을 중앙에 맞춰 모든 화면을 선명하게 찍는 촬영기법)’란 영화 용어가 말 그대로 3차원적 깊이를 지닌 영화가 돼 눈앞에서 튀어나와 솟아오르는 세상(이걸 봤더라면 ‘딥 포커스’의 아버지 오손 웰스 감독이 얼마나 좋아했을까). 게임은 영화를 하듯 영화는 게임을 하듯, 애니메이션이 영화가 되고 영화가 애니메이션이 돼 서로를 닮아가고 섞어놓는 디지시네마(digi-cinema)의 세상.

    1895년 뤼미에르가 영화 ‘공장문을 나서는 노동자들’을 튼 직후부터 영화를 만드는 모든 이가 처한 존재론적 속박이자 매체의 본질로 여겨졌던 도그마 중 하나는 실사 영화는 언제나 무언가를 복사해야 한다는 기록성의 문제였다. 그런데 제기랄. 이 원본이라는 것들이 때론 너무 값이 비쌌다. 스타들의 몸값은 하늘 높은 줄 몰랐고, 세계를 무대로 로케이션하는 것도 힘들었다. 원본 없는 원본 영화를 만들 수는 없을까.

    이 꿈을 위해 새로운 우주를 만들고자 했던 조지 루커스는 ‘스타워즈’의 별과 별 사이에 디지털 범벅 칠을 했고, 20년 전 ‘누가 로저 래빗을 모함했나’로 실사와 애니메이션의 합성을 꿈꾸던 로버트 저메키스는 오늘날 오로라가 둘러싼 북극의 하늘과 빅뱅이 솟은 런던 하늘을 편집 하나 없이 매끈하게 공중부양하게 했다.



    그러나 조지 루커스도 가상과 현실이 완벽히 섞인 미끈한 디지털 세상을 만들지 못했다. 로버트 저메키스조차 3D 영화를 동화나 애니메이션 취급했다. 그 모든 한계와 고정관념을 뒤엎은 것이 바로 ‘아바타’다. 아바타의 스토리, 캐릭터, 배경, 사운드, 미술, 기술은 지나치게 통합적이어서 관객이 3D 영화를 볼 때 느끼던 유치함, 반복되는 3D 기술에 대한 물림현상, 언캐니 밸리(uncanny valley·인간이 로봇이나 인간이 아닌 것들에게서 느끼는 감정에 관한 로보틱스 이론. ‘폴라 익스프레스’ 같은 3D 애니메이션은 오히려 캐릭터가 인간과 너무 흡사해서 유령처럼 느껴진다) 캐릭터에 대한 혐오감 같은 디지털 영화의 문턱을 없앴다.

    또한 ‘아바타’는 평면 안의 예술이라는 패러다임조차 가뿐히 깨버린다. 이제 평면 안에서 구조와 배치를 잡았던 미장센의 정의를 어떻게 할 것인가. 영화의 회화적 요소가 아닌, 영화의 깊이까지 설계해야 하는 감독들에게는 미장센의 개념조차 바뀔 때가 되었다.

    여기에 시각적 피로도가 높아 영화를 끝까지 보기 어려운 기술 문제마저 피해갔다. ‘아바타’는 극장에서만 봐야 하는 ‘Must see movie’, 2D냐 3D냐 혹은 아이맥스냐 아니냐 하는 차별화된 배급환경과 관람문화 환경을 만들 것으로 보인다.

    변덕스런 관객들과 디지털 정체성

    결국 ‘아바타’의 흥행 돌풍은 ‘아마도 미국은 없었을지 모른다. 오직 디즈니랜드만 존재했을 뿐’이라는 장 보드리야르의 예언을 정확히 실현하고 있는 셈이다. ‘매트릭스’를 감독한 워쇼스키 형제는 매트릭스의 세계, 즉 가상현실에 대한 메타적 사고나 가상현실 비판론이란 양념이라도 첨가했다. 그러나 ‘아바타’ 속 판도라라는 가상 현실세계는 표면적으로 미국의 침략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포장했을 뿐, 더 강화된 가상현실 속으로 관객을 밀어넣는다.

    게다가 스토리는 진부해서 많은 평론가들이 ‘아바타’를 보며 ‘늑대와의 춤을’이나 ‘포카혼타스’를 떠올린다. 그리하여 ‘아바타’는 자가당착에 빠진 듯하다. 왜 카메론은 최첨단 신기술로 원시적 생명력을 찬양하는가. 왜 최첨단 신기술로 인간의 최첨단 기술을 비판하는가. 관객이 이런 문제를 깊이 생각해보려는 순간, 영화는 벌써 경천동지할 스펙터클로 시신경을 마비시킨다.

    결론적으로 ‘아바타’를 2D와 아이맥스 3D로 모두 본 사람으로서 두 시각적 세계의 현격한 차이가 바로 카메론의 웅변적 성취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을 듯하다. 영화 ‘어비스(심연)’에서 카메론은 신비로운 해저 세상의 완벽한 재현을 시도했지만, 흥행 패배의 치욕을 맛봤다. 그때 카메론은 어떤 신기술도 캐릭터와 스토리라는 아날로그에 대한 수용 없이는 관객들의 지지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 같다. 카메론은 ‘타이타닉’의 대성공 이후 원 소스 멀티유즈가 가능한 프랜차이즈 제국을 꿈꿨을 것이고, 그 결과 현재의 흥행수치를 모두 갈아엎을 ‘아바타’가 탄생했다.

    그러나 ‘아바타’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인간이 자신의 복수 정체성을 가지고 진짜 정체성을 의심하듯, 영화는 곧 자신의 진짜 정체성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사유해야 하는 날이 멀지 않았음을 예감케 한다. ‘아바타’에서 카메론이 진정 추구했던 것은 디지털 세계의 ‘매끄러움’이었다. 심지어 동물조차 잘빠진 스포츠카처럼 매끄럽고, 현실과 가상현실의 경계도 사라진다. 그러나 철학자 들뢰즈의 매끄러움이라는 개념과는 정반대로 이 세계는 개인에게 자유와 사유의 힘을 주기보다 영화의 환상성을 극대화하는 기존 영화의 전략과 보수성을 그대로 답습한다.

    ‘아바타’ 이후 3D 영화는 범람할 것이다. 변덕스러운 관객들이 얼마나 3D에 호응할지, 또한 영화에 얼마나 인터랙티브(inter-active)한 요소를 넣을지의 결정은 지금부터 시작이다. 이미 스필버그가 카메론의 모든 전략과 기술을 흡수해 ‘땡땡의 모험’을 찍기 시작했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다. 미래 영화는 이제 카메론의 손을 떠나 서서히 자신의 길을 가고 있다. 언젠가는 ‘아바타’조차 구식으로 느끼게 할 홈 파인 세계(striated space)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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