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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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해서 더 와닿는 아련한 슬픔

연극 ‘13월의 길목’

  • 현수정 공연칼럼니스트 eliza@paran.com

    입력2009-12-30 09: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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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용해서 더 와닿는 아련한 슬픔
    연극 ‘13월의 길목’에서는 이렇다 할 사건, 사고가 벌어지지 않는다. 갈등이 생겼다가 해결되는 구조도 찾아보기 힘들다. 대신 한 카페를 배경으로 인물들의 소소한 대화가 교차한다. 여기까지만 보면 일상의 단면을 옮겨놓은 듯한 극사실주의 연극이겠거니 싶을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에는 히든카드가 숨겨져 있으니, 바로 마지막의 반전이다. 인물들이 ‘모던’하다고 칭찬하는 카페가 왜 촌스럽고 허름해 보였는지, ‘턴테이블’에서는 왜 때 지난 노래들만 흘러나왔는지, 사람들의 의문스러운 태도에는 어떤 이야기가 숨겨졌는지, 카페 이름이 왜 ‘13월의 길목’인지 한꺼번에 깨닫게 된다. 의아함을 느끼게 한 부분들이 모두 복선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이 작품의 대본과 연출의 재치를 느낄 수 있다.

    혹시 눈치가 빨라서 이 정도 힌트만 보고 반전의 내용을 예측했다 해도 ‘김샜다’고 생각해선 안 된다. 이 연극은 요즘의 대사극들에서 보기 드문 언어구사력을 자랑하기 때문이다. 삶과 죽음, 사랑에 대한 순수한 고민과 갈망을 담은 대사들은 시적이고, 아예 기타 반주에 맞춰 시 낭송이 이뤄지기도 한다. 느슨한 줄거리인즉 다음과 같다.

    카페 ‘13월의 길목’을 운영하는 전직 연극배우 선재, 그녀의 친한 동생 가실, 그리고 친구 난주가 송년회를 준비한다. 세 여자는 테이블을 세팅하며 가실이 짝사랑하는 연하남 수현에 대해 수다를 떤다. 이때 바로 수현이 한참 연상의 대학 선생님과 나타난다.

    이어서 전 세계를 돌아다닌 사진작가 영수 커플이 떠들썩하게 등장해서는 탱고를 추며 분위기를 띄운다. 그리고 선재와 과거에 ‘섬싱’이 있어 보이는 신문기자 동호도 카페에 들어선다. 그런 식으로 카페에 모인 사람들은 두런두런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이들의 이야기는 모두 ‘전사’로 이뤄져 있다. 삼각관계의 연인이 두 그룹이나 있고 겉모습과 달리 균열이 엿보이는 부부도 있지만, 그 어떤 소동이나 화해도 없다. 인물들은 그저 언제인지 모를 과거의 일들과 상처만 난롯가에서 밤껍질 까듯 조용조용 나열할 뿐이다.

    차유경, 박윤희, 이서림 등이 출연한다. 1월3일까지, 행복한 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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