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15

2009.12.15

짧은 문자 조각이 남긴 긴 여운

잭 피어슨 ‘Like Someone Alone’

  • 김지은 MBC 아나운서·‘예술가의 방’ 저자 artattack1@hanmail.net

    입력2009-12-10 13:4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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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짧은 문자 조각이 남긴 긴 여운

    잭 피어슨, ‘Like Someone Alone’, 91.4x132x2.5cm, 1994

    언론에 노출되는 것을 극도로 꺼리는, 뉴욕의 미술품 컬렉터의 집을 찾았을 때입니다. 이 컬렉터 부부는 몇십 년간 젊은 작가들의 작품을 체계적으로 소장해온 것은 물론, 큐레이터까지 고용해 개인 소장품으로 전시회를 열고 그 수익으로 버려진 아동들을 돕고 있었습니다. 부부가 살림하는 아파트의 3개 층은 미술관을 방불케 할 만큼 작품을 위한 공간으로 꾸며졌는데요. 특히 곳곳에 있는, 집에 맞게 만들어진 작품은 방문객의 탄성을 자아내게 했습니다. 이때 제 머릿속에 떠오른 단어는 ‘Houseum’, 즉 미술관의 기능을 가진 집이었어요.

    집 안 구석구석을 채운 아름답고 때로는 전위적인 작품을 다 보고 난 뒤 거실의 커다란 벽 한가운데 설치된 작품을 보는 순간, 부부에게 무언가 남다른 사연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살아 있음(Being Alive)’이란 알파벳 단어로 이뤄진 작품이었거든요. 언뜻 든 생각이었지만 ‘이 부부가 인생에 소중한 사람을 잃은 것은 아닐까’ 궁금했습니다. 살아 있는 사람을 보면서 그 사람이 ‘살기를 간절히 바라는’ 경우는 드물거든요. 물어볼까 말까 망설이다 이렇게 방대한 컬렉션을 하게 된 이유를 조심스레 물었습니다.

    “예술가의 꿈을 이루기도 전,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난 딸을 생각해서 작품을 모으기 시작했어요. 딸아이처럼 젊은 작가들의 작품을 마치 내 자식의 작품처럼 소장하게 됐죠. 거실에 걸린 잭 피어슨의 작품도 그가 젊었을 때의 것입니다.”

    잭 피어슨은 고철이나 플라스틱으로 만든 글자를 이용해 단어나 짧은 문장을 표현하는, 이른바 ‘문자 조각’ 작품을 제작하는데요. 작품이라고 하기엔 너무 간단하고 쉬워 보이지만, 이상하게도 관객에게 긴 여운을 남깁니다. 거리의 번쩍이는 간판에서 흔히 보는 ‘Chinese Food’라는 글귀가 흰 벽에 홀로 걸려 있습니다. ‘중국음식’이라는 뜻과 함께, 혼자 싸구려 중국음식을 시켜 먹는 사람들의 외로운 삶이 떠오릅니다. 십자가 모양으로 교차하는 ‘Desire/Despair’(욕망과 좌절)는 ‘큰 꿈은 더 큰 좌절을 불러온다’는 인생의 아픈 경험을 돌이키게 합니다. 그가 만든 ‘Heaven’(천국), ‘Paradise’(낙원)는 ‘Melancholy’(우울), ‘Real Life’(현실)와 언제든지 바꿀 수 있는 단어입니다. 이처럼 도시에서 누구나 볼 수 있는 간판을 연상시키지만, 표면적 의미를 넘어 그의 작품을 보는 사람 개개인에게 정서적 감염을 불러일으키죠. ‘Like Someone Alone’(외로운 그 누군가처럼)을 봤을 때처럼 말이죠. 최근 그의 작품은 단어의 낱글자가 벽에서 떨어져나와 의미를 완성하지 못한 채 설치돼 있습니다. 인간의 꿈과 희망은 결코 쉽게 언어화하지도, 성취되지도 않는다는 현실을 가장 간단한 방법으로 드러내주는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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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현미展

    양아치展 양아치의 이번 개인전은 아트센터 나비에서 진행 중인 ‘뉴시어터 시리즈’의 일환이자, 2008년 열렸던 ‘미들 코리아 : 양아치 에피소드’ 3부작의 마지막 편이다. 파괴, 교란, 새로운 세계라는 주제로 나뉜 전시에서 영상, 사운드, 입체, 사진, 드로잉 작품 24점을 선보인다. 12월28일까지/ 아트센터 나비/ 02-2121-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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