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간동아 로고

  • Magazine dongA
통합검색 전체메뉴열기

이영철 교수의 5분 한국사

조선 운명 바꾼 ‘역관의 휴머니즘’

선조 때 홍순언, 명에서 만난 여인 공금으로 도와 … 후일 종계변무·임란 파병 보은

조선 운명 바꾼 ‘역관의 휴머니즘’

조선 운명 바꾼 ‘역관의 휴머니즘’

조선 사신들의 중국 사행길 풍경을 그린 18세기 연행도. 전체 14폭의 그림 가운데 조양문(朝陽門) 부분이다. 역관 홍순언은 공금으로 장례비용을 대줬던 여인을 조양문 밖 비단 장막에서 다시 만났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별집 사대전고(事大典故) 역설(譯舌·역관)조에 따르면, 조선 선조 때 역관 홍순언(洪純彦)이라는 인물은 젊어서 낙척(落拓·어렵거나 불행한 환경에 빠짐)했으나 의기는 있었다. 일찍이 중국 연경에 갈 때 압록강 통주(通州)에 이르러 청루(靑樓)에서 놀다, 자태가 유난히 아름다운 한 여인을 보고 마음속으로 기뻐하며 주인 노파에게 부탁해 서로 즐기기를 요구했다.

그런데 그 여인이 소복(素服)을 입어 연유를 물었더니 “첩의 부모는 본시 절강(浙江) 사람인데, 경사(京師)에서 벼슬하다가 불행히도 염병에 걸려 모두 돌아가셨습니다. 부모님 널이 사관(舍館)에 있으나, 첩 한 몸이라 고향으로 옮겨 장례 치르려는데 돈이 없어 부득이 제 몸을 파는 것입니다”라고 말하고는 목메어 울었다. 순언이 불쌍히 여겨 장례비용을 물으니 300금(金)이면 된다 하여 공금(公金)을 유용해주고 그 여인을 가까이하진 않았다.

그때 여인이 순언의 성명을 물었으나 말하지 않았다. 그러자 여인이 “대인(大人)께서 성명을 말씀하시지 않는다면 첩도 주시는 것을 감히 받을 수 없습니다” 하므로, 홍씨 성(姓)만 말하고 나왔다. 동행한 무리는 그 얘기를 듣고 오활함에 웃지 않은 자가 없었다. 그런데 여인이 후일 명(明) 조정의 예부시랑(禮部侍郞) 석성(石星)의 계실(繼室·후실)이 됐다. 그리고 석성은 순언의 의로움을 높이 여겨 동사(東使·조선 사신)를 볼 때마다 반드시 홍 통관(通官)이 왔는지 안 왔는지를 물었다.

은인 기다리며 비단 10필에 ‘報恩’ 수놓아

그 후 순언은 환국했으나 공금 빚을 갚지 못해 여러 해 감옥에 갇혀 있었다. 이때 조선에서는 명의 ‘태조실록’과 ‘대명회전(大明會典)’에 이성계가 이자춘(李子春)이 아닌 성주 이씨 이인임(李仁任)의 아들로 돼 있을 뿐 아니라 고려 왕씨 네 왕을 차례로 시해했다고 기록돼, 그 오명을 벗기려는 종계변무(宗系辨誣) 문제로 전후 10여 명의 사신이 명에 갔다 왔으나 아무도 청(請)을 허락받지 못하고 돌아왔다.



200여 년이 지나도록 종계변무가 해결을 보지 못하자, 선조(宣祖·1552∼1608, 재위 1567∼1608)가 노해 교지 내리기를 “이것은 역관의 죄로다. 이번에 가서 또 청을 허락받지 못하면 마땅히 수석통역관 한 사람을 목 베리라”라고 하명했다. 이에 모든 역관이 감히 가고자 하지 않았는데, 역관들이 “홍순언은 살아서 옥문 밖으로 나올 희망이 없으니 우리가 빚진 돈을 갚아주고 풀려나오게 해 그를 중국에 보내자. 만일 그 일을 허락받고 돌아오면 그에게 행복이 될 것이고, 비록 죽는다 해도 진실로 한(恨) 될 바는 없을 것이다”라고 의논하고 모두 함께 가서 그 뜻을 알리니 순언이 개연히 허락했다.

선조 갑신년(1584)에 순언이 주청사(奏請使) 황정욱(黃廷彧·1532∼1607, 황희의 후손)을 수행해 북경에 이르러 조양문(朝陽門) 쪽을 바라보니 밖에 비단 장막이 구름처럼 펼쳐져 있었다. 한 기병(騎兵)이 쏜살같이 달려와 홍 판사(判事)가 누구시냐고 묻고는 “예부의 석 시랑(侍郞)께서 공(公)이 오신다는 말을 듣고 부인과 함께 마중 나왔습니다”라고 말했다. 조금 있다가 보니 계집종 10여 명이 부인을 옹위하고 장막에서 나왔다. 순언이 몹시 놀라 물러가고자 하니 석성이 “당신은 통주에서 은혜 베푼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까? 내 아내의 말을 들으니 당신은 참으로 천하의 의사(義士)입니다”라고 말했다.

이어 부인이 무릎을 꿇고 절을 하므로 순언이 굳이 사양하니 석성이 “이것은 보은의 절(報恩拜)이니 당신은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고는 크게 연회를 베푼 뒤 “동사가 이번에 온 것은 무슨 일 때문입니까” 물었다. 순언이 종계변무 문제를 꺼냈더니 석성은 염려하지 말라고 했다. 그리고 사관에 머문 지 한 달 남짓한 동안에 그 일이 과연 청한 대로 허가됐으니, 석성이 참으로 그 터전을 마련해준 것이었다.

순언이 돌아올 때 부인이 전함(鈿函) 10개에 각각 비단 10필을 담고 말하기를 “이것은 첩이 손으로 짜가지고 공(公)이 오시기를 기다린 것입니다”라고 했다. 순언이 사양해 받지 않고 돌아왔는데, 압록강에 이르니 깃대를 든 자가 그 비단을 놓고 가는 것이 보였다. 비로소 비단을 보니 자락 끝에 모두 ‘보은(報恩)’이라는 글자가 수놓여 있었다.

순언이 돌아온 뒤 조정에서는 왕실의 계보를 바로잡아 왕실의 정통성을 회복해준 공적을 치하해 선조 23년(1590)에 그를 광국공신(光國功臣) 이등훈(二等勳)에 책봉하고, 역관으로는 처음으로 공신 작호인 당릉군(唐陵君)을 봉했다. 이런 사실이 알려지자 사람들은 그가 사는 동리를 보은단동(報恩緞洞)이라 불렀다.

후손들 황해도 해주에 정착 인연 이어가

몇 년 후 동아시아 지축을 흔드는 임진왜란이 발발해 선조가 몽진길에 올랐다. 국왕의 피란 행차가 의주에 도착해 명나라 조정에 구원을 청했는데, 그들은 조선과 일본이 손잡고 명을 공격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의구심을 갖고 있었다. 사신이 명나라에서 돌아와 이렇게 말했다.

“여러 사람의 의논이, 조선이 갑자기 왜병의 침범을 받아 나라를 잃고 새처럼 도망쳐 숨는 것은 반드시 스스로 저지른 일이 있을 것이요, 또한 우리나라의 정세나 형편을 충분히 알지 못하니 함부로 군사를 내어 멀리 외국에서 일을 벌이는 것은 옳지 않다고 했는데, 유독 병부상서(兵部尙書) 석성만 군사를 보내 구원할 것을 극력 주장했습니다. 석성이 홍순언을 불러 ‘나 혼자 힘을 다하고 있으나 여러 사람의 의논이 이러하니 귀국의 사신이 오면 내가 마땅히 힘쓰겠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명나라에선 논쟁이 분분했으나 석성의 부인이 남편을 움직여 파병이 결정됐다. 당시 명나라에 들어간 홍순언은 명장(明將) 동정제독(東征提督) 이여송(李如松)의 통역관이 돼 평양성 탈환에 일조했다. 이렇듯 홍순언과 석성 부인의 인연은 임진왜란으로 다시 이어졌다.

그 후 석성은 조선 파병에 따른 반대파 심유경(沈惟敬)의 책임론에 몰려 옥사했다. 석성은 가족에게 명나라를 떠나 조선으로 가라고 유언했고, 이에 석성의 부인과 두 아들은 조선으로 넘어와 황해도 해주(海州)에 정착했다. 그러자 선조는 석성의 아들 석담(石潭)을 수양군(首陽君)에 봉하고 토지를 하사했으며, 후손들은 본관을 해주로 삼았다.

홍순언과 한 여인의 짧은 만남이 200여 년을 끌어온 외교적 난제를 해결했고, 임란이라는 국가위기 상황에서 명군의 파병을 끌어냈으니 사람의 인연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 깨닫게 한다. 그리고 석성과 그 부인의 후손이 이 땅에서 홍순언의 후손과 함께 살고 있으니 홍순언과 그 여인의 인연은 아직도 끝난 것이 아니지 않은가.

얼마 전 한미 정상회담에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첫 방한을 수행한 미국 측 통역은 미 국무부 소속의 한국계 여성 이연향(52) 씨다. 그는 지난해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방한을 비롯해 지난 2월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의 방한 때도 통역을 맡았다고 한다. 그가 유창한 영어 실력으로 조선의 홍순언처럼 국익을 위해 통역했을지 궁금하다.



주간동아 2009.12.08 714호 (p78~79)

  • 이영철 목원대 겸임교수 hanguksaok@hanmail.net
다른호 더보기 목록 닫기
1213

제 1213호

2019.11.08

매장 차별화와 플랫폼 서비스로 ‘한국의 아마존’을 시험하는 편의점

목차보기구독신청이번 호 구입하기

지면보기 서비스는 유료 서비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