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13

2009.12.01

‘낙태’ 단어가 무거운 이유

  • 이혜민 기자 behappy@donga.com

    입력2009-11-23 15: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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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빠(남자친구)가 그거 할 때 콘돔을 안 껴. 끼면 느낌이 안 온다고 그냥 해야 좋대. 난 좋은지 안 좋은지도 모르겠는데 너무 좋아하더라고. 혹시 임신하면 어떡하지? 너 그럼 정말 병원 같이 가줘야 해. 알았지? 너밖에 없어. 엄마가 알면 나 죽어.” -여자1

    “정말 최악이었어. 피임약도 안 먹은 상태에서 했는데, 다음 날부터 배에서 뭔가 꼼지락거리는 거야. 마침 그때가 배란기라 엄청 무서웠어. 산부인과에서 (관계 후 72시간 이내에 먹으면 수정을 막을 수 있다는) 사후피임약을 처방받아 먹긴 했는데, 그 뒤론 할 때마다 무서워. 생리통 때문에 생리하는 게 싫었는데 이젠 오히려 반가워. 임신이 아니니까.” -여자2

    “남자친구한테 임신한 것 같다고 하니까 반기진 않더라. 나하고 결혼할 마음이 없었나 보지. 뭐, 다행히 수술하라는 말을 직접적으로 들은 건 아닌데… 임신 아니라니까 화색이 도는 걸 보니, 이런 놈을 더 만나야 되나 싶더라.” -여자3

    “내가 변변한 직장이 없고 계속 시험 준비하니까 덜컥 애가 생기면 어쩌나 싶고…. 그래서 철저히 무장하고 하는데,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매달 불안해.” -여자4

    놀라실지 모르지만 위에 나열한 여자 1, 2, 3, 4는 제 친구들입니다. 아롱이가 있으면 다롱이가 있듯, 성적 자기결정권이 뚜렷한 친구도 있고 그렇지 못한 친구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1, 2, 3, 4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성관계 이후 생길 돌발상황을 두려워한다는 겁니다. 그들은 생리주기를 계산하며 자연히 ‘임신중절’이라는 단어를 떠올린다고 했습니다. 그래선지 드라마에서만 듣던 그 단어를 이젠 일상생활에서도 듣게 됐습니다.



    혹자는 “낙태를 두려워하지 말고 혼전 성관계를 갖지 말라”고 충고해주실 수도 있지만, 이는 현실을 모르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이 남자가 변태가 아닌지 확인하지 않고 결혼하는 것만큼 위험한 일이 또 있을까요. 화장품도 샘플을 써봐야 안다는데 사람이야 두말할 나위도 없지요(물론 ‘확인’만이 성관계의 목적은 아닙니다).

    나날이 혼전 성관계가 많아지는 세상에 살면서 낙태는 더 이상 남의 얘기가 아닙니다. 그래서 내 얘기라 생각하고 취재했지만 결론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무조건 찬성하거나 반대하기엔 낙태란 단어가 너무 무겁습니다. 이번 주말엔 이숙경 감독이 추천한 영화 ‘4개월, 3주… 그리고 2일’을 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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