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12

2009.11.24

우릴 매혹시킨 드라마 작가 10인 탐구

그들의 작품은 어떻게 시대와 ‘通’하였을까?

  •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 mansuri@osen.co.kr

    입력2009-11-18 11:4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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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중이 발을 딛고 선 현실, 현실에서 한 발짝 정도 떨어진 지점에 놓인 작품, 그리고 그 현실과 작품의 연결고리가 하나의 그림을 완성해 ‘저건 바로 내 얘기!’라는 즉각적 반응을 만들어내는 것. 독특한 세계를 구축한 작가들의 공통점은 바로 이 현실과 작품 사이에서 자신만의 연결고리로 재주를 부려 대중과 소통한다는 점이다.
    우릴 매혹시킨 드라마 작가 10인 탐구
    [김수현] 가족관계에 묶인 인간을 바라보다

    김수현 작가만큼 한국 드라마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인물이 있을까. 그는 오랜 세월 우리 사회 속의 가족을 관찰했고, 가족이라는 보편적 틀을 활용해 각종 실험을 해왔으며, 지금도 그 실험을 계속하는 작가다.

    그의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은 익숙한 세계와 낯선 세계가 교묘하게 교차한다는 것이다. 익숙함은 가족 드라마라는 장르적 특징에서 오는 것이고, 낯섦은 달라진 시대상을 반영한 작가의 도발적 질문에서 비롯된 것이다.

    ‘내 남자의 여자’는 불륜이라는 친숙한 주제 속에서 ‘불륜의 탐구’라는 낯선 질문을 던진다. ‘엄마가 뿔났다’는 전형적인 가족 드라마의 틀에서 엄마의 휴가, ‘프리 선언’이라는 파격적 실험을 감행한다.

    그리고 이런 실험이 어색하지 않은 것은 작가의 낯선 질문들이 시대와 공감하기 때문이다. ‘내 남자의 여자’는 결혼이라는 제도적, 윤리적 틀이 한 인간의 욕망과 부딪치는 이 시대의 감성을 여성의 관점에서 포착했고, ‘엄마가 뿔났다’는 감내하고 희생하는 엄마가 아닌 개인적 삶과 행복을 추구하는 엄마의 시대라는 사회 변화를 그려냈다.



    [최완규] 남자들의 세상, 그 욕망을 그리다

    최완규가 처음 ‘종합병원’을 들고 나왔을 때 사람들을 놀라게 한 것은 세세한 디테일의 힘이었다. 그는 이 드라마를 준비하며 실제 병원에서 살다시피 했다고 전해진다. 지독스럽게 디테일을 추구한 것이 드라마의 완성도를 높이는 데 도움이 됐음은 물론이다. 이 드라마에서 보여준 직업의 디테일한 묘사는, 남자들의 욕망을 효과적으로 그려내는 밑바탕이 되는 동시에 그만의 독특한 드라마 세상을 구축하게 했다.

    그것은 의술이라는 디테일 속에서 명의의 성장 드라마가 되기도(‘허준’), 상술이라는 디테일 속에서 임상옥이라는 대상(大商)의 성장 드라마가 되기도 한다(‘상도’). 또 도박과 주먹의 세계에서 사랑하고 성장하는 이야기가 되기도(‘올인’), 고구려를 세우는 대업을 달성하는 주몽의 성공담으로 재현되기도 한다(‘주몽’).

    직업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고난과 목표 달성의 과정을 그린 성장 드라마의 구조는 대중의 성취욕을 대리만족시켜주는 기능을 하기도 한다. 현대인, 특히 남성들이 점점 왜소해지고 그 삶이 비루해질수록 그의 작품이 가진 판타지성은 더욱 강력해진다. 디테일이 갖는 리얼리티 위에 성장 드라마의 판타지를 덧입히는 것이 그의 작품이 대중과 호흡하는 방법이다.

    우릴 매혹시킨 드라마 작가 10인 탐구

    최완규 작가의 ‘종합병원’, 송지나 작가의 ‘모래시계’, 김영현 작가의 ‘선덕여왕’(왼쪽부터).

    [송지나] 드라마를 넘어 시대를 그리다

    송지나의 세계는 시대라는 거대한 주제를 밑그림으로 그려넣는다. ‘여명의 눈동자’의 일제강점기와 ‘모래시계’의 1980년대 초 민주화 시기는 그의 작품에서 암울하면서도 진중한 밑그림으로 새겨진다.송지나의 드라마에서는 극적 설정으로 생생히 살아 있는 인물들의 이야기가 전면에 부각되지만, 밑바탕에는 시대정신이라 할 만한 당대의 사건들이 숨어 있다.

    그 시대 자체가 주는 비극과 아픔은 그의 드라마를 공감하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다. 그의 작품에 드리운 운명적이고 비장한 분위기가 그 표현의 과잉성에도 대중의 공감을 살 수 있었던 것은 당대의 공기가 운명적 이야기를 허용했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것은 여성작가인 그가 남성적 카리스마에 천착한다는 사실이다.

    ‘여명의 눈동자’에서 ‘모래시계’ ‘태왕사신기’까지, 작품을 통해 드러난 남성의 카리스마와 리더십은 극의 전반을 지배한다. 이제 현대극으로는 그 굵직한 운명적 이야기가 공감을 얻지 못하는 시대에 들어서자 작가는 영민하게 사극으로 눈을 돌렸다. 사극은 운명적 세계를 여전히 진지하게 다룰 수 있는 유일한 틀이다.

    [김영현] 여성의 성장 스토리, ‘미션 사극’을 만나다

    최완규의 세계에서 성장한 김영현 작가는 그 둥지를 벗어나 자신만의 영역을 만들어낸다. 바로 여성의 성장 스토리를 사극에 구축한 것이다. ‘대장금’은 그간 사극의 주인공으로 주목해온 남성을 주변 인물로 두고, 대신 가녀린 여성 한 명을 끌어올려 대중의 시선을 주목시켰다. 이 여성은 그러나 수많은 위기상황과 상황이 주는 각각의 ‘미션’을 극복하며 차차 성장해간다. 주인공의 이러한 성장 스토리는 성취의식이 강한 현대 여성들을 매혹했다.

    여성의 사회진출에 한계가 있는 시대를 배경으로 한 사극에서, 현대여성들마저 매료되는 여성 영웅을 그려낸다는 이 역발상은 그간 남성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사극 앞에 여성 시청자를 불러모으게 했다. 그는 ‘선덕여왕’에 이르러 여성 사극의 극점이라 할 수 있는 여왕의 성장담을 그렸다. 미션 사극이라는 새로운 틀, 여성적 시각, 성장 스토리가 가진 판타지의 힘이 김영현 작가가 이 시대와 소통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다.

    [노희경] 문학성을 지닌 드라마, 드라마의 문학성

    드라마의 대중적인 속성과 문학이 지닌 진중함. 드라마와 문학의 거리는 생각보다 멀다. 하지만 둘이 만나는 지점은 존재한다. 이 두 장르가 다루는 소재가 결국 인간이라는 점이다. 그런 면에서 생생하게 살아 있는 인간, 또 그 인간의 따뜻함을 포착하는 노희경 작가의 작품은 문학과 상당히 가까운 거리에 있다.

    ‘굿바이 솔로’가 다중 스토리 구조(한두 인물이 드라마를 이끌어가는 게 아니라, 여러 인물이 등장해 각자의 이야기를 하는 구조)라는 낯선 형식을 취하면서도 낯선 느낌을 주지 않은 것은 작가가 균등하게 유지해온, 각각의 인물에 대한 애착 때문이다.

    ‘그들이 사는 세상’의 준영과 지오는 이야기를 끌고 가는 중심인물이지만, 드라마가 끝나는 지점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둘의 이야기가 아닌 ‘그들’의 이야기다. 문학이 퇴조하는 시대에 그의 드라마가 문학성을 갖고 대중과 호흡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 아이러니하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노희경의 작품이 대중의 사랑을 받는 이유다.

    우릴 매혹시킨 드라마 작가 10인 탐구

    노희경 작가의 ‘그들이 사는 세상’, 이경희 작가의 ‘고맙습니다’, 김병욱 PD팀의 ‘순풍산부인과’, 이윤정 PD·이정아 작가의 ‘커피프린스 1호점’의 장면들(위부터).

    [이경희] 소외된 이들을 감싸는 모성으로서의 멜로

    이경희 작가의 드라마에는 늘 소외된 이들이 나오고, 그들이 서 있는 소외된 공간이 등장한다. 이 척박한 지대가 이야기들의 시작점이다. 상처받고 벼랑 끝으로 내몰린 이들은 그러나 그 끝 지점에서 오히려 생명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그의 작품에는 절절한 멜로의 사랑을 진정성으로 이끌어주는 인간애가 들어 있다. ‘고맙습니다’의 공간이 되는 변방의 소외된 섬이 ‘푸른도’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은 바로 이 절망이 희망으로 전화되는 과정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상처받은 인물들은 절망의 끝에 서서 서로의 상처를 핥아주고, 이 지점에서 남녀 간의 사랑은 인간의 사랑으로 격상된다. 그의 멜로는 이를 통해 휴먼 드라마로 확장된다.

    [김병욱 팀] 일상에서 발견하는 웃음의 양상

    시트콤은 드라마와는 다른 틀을 갖고 있지만, 우리네 시트콤은 그 구분이 의미가 없을 정도로 드라마화해 있다. 웃음은 물론 감동과 눈물까지 끌어내는 시트콤을 굳이 예능의 한 부분으로 세워둘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바로 이런 시트콤의 위상을 만들어낸 이들이 김병욱 팀(김병욱 PD와 작가진)이다. 그들은 ‘순풍산부인과’를 통해 우리 일상에 숨겨진 웃음 코드를 끄집어냈고, ‘거침없이 하이킥’을 통해 거침없이 그 웃음폭탄을 날렸으며, ‘지붕 뚫고 하이킥’에 와서는 드라마적 틀마저 넘나드는 형식적 자유로움을 보이고 있다.

    김병욱 팀이 만들어내는 웃음이 여타 시트콤의 그것과 궤를 달리하는 것은, 그 속에 숨겨진 페이소스가 오랜 여운으로 남으면서 대중의 뇌리에 깊이 각인되기 때문이다.

    [이윤정 PD·이정아] 여성들만의 판타지 세상, 청춘에 대한 설렘

    드라마가 현실에 부재한 것을 채워주는 판타지 공간이라면, 이윤정 PD와 이정아 작가가 만들어낸 세계는 바로 여성들만의 세상, 그 여성들이 판타지를 만끽하는 공간이 될 것이다. 일상에 치여 휴식 같은 판타지가 그리운 현대 여성들은 현대판 왕자님이 우글대는 그 ‘스트레스 제로 지점’에 남장 여자로 들어간 고은찬이란 캐릭터에 열광했다.

    답답한 세상에 커피 한 잔이 주는 위안 같은 ‘커피프린스 1호점’은 하이틴 로맨스를 떠올리는 알콩달콩한 러브 스토리가 감성적인 연출을 만나 완성된 세계다. 이 달콤한 세계는 순정만화 1세대들로서 청춘을 보내고, 이제는 중년을 맞이하는 여성들의 가슴까지 설레게 만들었다.

    [홍정은·홍미란] 만화적 감수성으로 현실 없는 현실을 담아내다

    우릴 매혹시킨 드라마 작가 10인 탐구

    홍정은·홍미란 작가의 ‘쾌도 홍길동’(왼쪽)와 홍진아·홍자람 작가의 ‘베토벤 바이러스’.

    현실에는 없는 공간, 현실에는 있을 수 없는 사건. 과장과 압축, 비약의 세계. 홍정은·홍미란 자매 작가가 그리는 것은 바로 그 만화적 감수성의 세계다.

    ‘환상의 커플’ ‘쾌도 홍길동’ ‘미남이시네요’ 같은 일련의 작품은 화면의 구성을 지면으로 옮기면 그대로 만화가 될 만큼 가벼운 이야기지만, 이 완벽한 만화적 세계에서 우리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은 이 시대 청춘의 감성과도 잘 맞아떨어진다. 앞이 잘 보이지 않는 현실 속에서 잠시나마 현실을 잊고 펼쳐들게 되는 만화책처럼, 채널만 돌리면 존재하는 만화적 공간. 그것이 바로 홍정은·홍미란 작가가 세상과 만나는 지점이다.

    [홍진아·홍자람] 휴머니즘이 있는 성장 드라마

    억울하게 낮은 지대에 서게 된 인물들을 보면 떠오르는 인지상정의 마음. 이것이 홍진아·홍자람 자매 작가의 드라마에서 발견하게 되는 따뜻한 마음이다. ‘베토벤 바이러스’의 오합지졸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우리네 낮은 서민들의 자화상이다.

    그것은 우리가 매일 같은 현실에서 잊곤 하던 꿈의 이야기이기도 하고 그 꿈이 현실과 부딪쳐 상처를 입는 이야기이며, 작지만 꿈꾸었기에 얻었던 성취의 이야기이도 하다. 홍진아·홍자람 작가의 세계가 울림을 주는 것은 그 낮은 세계에 대한 휴머니즘이 지극히 현실적인 성장 드라마 틀 속에서 그려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드라마를 통해 잊힌 꿈을 상기한다. 10인의 작가(팀)가 세상과 만들어낸 공감의 지점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현실은 어떤 모습일까. 거기에는 수평적으로 변화해가는 가족과 남녀의 모습이 있고, 그 지점에서 과거를 돌아보는 남성들과 앞으로 달려 나가는 여성들이 있다.

    또 각박해진 세상을 말해주는 인간애에 대한 그리움이 있고, 웃음 없는 세상에 더 커지는 웃음에 대한 희구가 있다. 이것이 시사하는 바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지금 세상은 채워지지 못하는 욕망과 꿈으로 넘쳐난다는 점이다. 삶이 늘 부족하기에 드라마는 부족함을 채워주는 판타지로 쓰인다.

    또 하나는 드라마와 현실 사이의 화학반응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드라마가 만들어내는 판타지, 현실에서 이뤄지지 않는 꿈에 대한 공감은 거꾸로 조금씩 현실을 바꾸기도 한다. 또 드라마는 그 달라진 현실을 반영한다. 이처럼 현실이 드라마를 낳고, 드라마가 현실을 낳는 과정에서 좋은 드라마와 그 드라마를 만들어내는 작가의 가치를 발견할 수 있다. 시대와 소통하는 작가는 결국 시대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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