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10

2009.11.10

인간의 광기는 기록으로 남는다

레이첼 화이트리드 ‘홀로코스트 추모비’

  • 김지은 MBC 아나운서·‘예술가의 방’ 저자 artattack1@hanmail.net

    입력2009-11-04 16:5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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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의 광기는 기록으로 남는다

    홀로코스트 추모비, 1995

    여류작가 레이첼 화이트리드(46)는 주변의 익숙한 사물을 석고나 고무, 합성수지를 이용해 만들어내는 데 탁월합니다. 그는 대학시절 자신의 귀에 석고를 발라 떠낸 ‘귀’라는 작품을 제작했는데요.

    이렇게 시작된 화이트리드의 작품은 책상 밑이나 옷장 속, 신발 밑창 등 사람들이 눈여겨보지 않는 사물들의 사이 혹은 위아래 공간을 주조해내는 작업으로 발전했죠.

    급기야는 런던의 대표적 빈민가인 이스트엔드의 허름한 집 내부를 석고로 떠내기에 이릅니다. 그는 모든 벽에 석고를 발라 굳힌 후 일정한 크기로 잘라냈고, 벽에 닿았던 부분을 바깥으로 향하게 한 뒤 다시 붙여 집 내부를 외부화했는데요.

    즉 장갑을 뒤집어놓듯 집을 통째로 뒤집어놓은 거죠. 이렇게 완성한 작품 ‘집(house)’은 연일 신문 헤드라인을 장식할 만큼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프라이버시를 목숨처럼 생각하는 영국인들에게 개인의 집을 고스란히 만인에게 보여준 이 작품은 마치 공개하고 싶지 않았던 쇠락한 영국을 보여주는 것 같아 사람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죠. ‘예술 지원’이라는 이름으로 아무도 살 수 없는 집을 만들 돈 있으면 차라리 빈민들을 위한 집을 지으라는 항의가 빗발쳤고, 결국 작품은 태어난 지 1년 만에 철거되는 운명을 맞았습니다.



    이렇듯 그의 작품은 늘 이슈를 만들어냈는데요. 오스트리아 빈의 유대인 광장에 세워진 기념비도 마찬가지였죠. 홀로코스트의 비극을 잊지 않으려고 만든 이 기념비는 기존 기념비 형식을 완전히 넘어선 것이었습니다. 도서관 내부의 책이 꽂힌 선반을 석고로 주조한 후 역시 바깥을 향하게 해 다시 접합한 거죠. 책에 낀 곰팡이, 찢어진 모서리, 책 사이의 공간, 선반 뒤쪽이 그대로 드러난 ‘거꾸로 된 도서관’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의 대학살에 희생된 유대인들을 추모하는 기념비로 왜 그는 도서관을 택했을까요? 1948년 이스라엘에서는 홀로코스트 당시 실종되거나 죽임을 당한 유대인들을 기리는 추모비를 건립하자는 의견과 그와 관련된 책을 발간해 도서관을 건립하자는 의견이 팽팽했는데요. 당시 벤 구리온 총리는 도서관을 건립하자는 쪽의 손을 들어줬죠.

    그가 도서관을 선택한 배경에도 비슷한 이유가 있었는데, 즉 지식이 물질화한 공간, 도서관에서 역사와 인류의 경험이 축적된 책을 보여주고자 한 거죠. 하지만 이 도서관의 책은 한 페이지도 열어볼 수 없습니다. 유대인 광장의 ‘홀로코스트 추모비’(1995)는 광기 어린 홀로코스트가 자행되도록 묵인한 역사, 실종된 사람들에 대한 누락된 기록의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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