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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철 교수의 5분 한국사

“재물은 샘, 버려두면 말라버린다”

북학파 박지원·박제가, 200년 전 혁신적인 선진문물 도입 주장

“재물은 샘, 버려두면 말라버린다”

“재물은 샘, 버려두면 말라버린다”

1863년 1월29일(음력) 청나라 베이징의 러시아공사관에서 사진 촬영을 요청한 연행사 사절단의 관리(맨 왼쪽). 사진을 찍은 최초의 한국인이지만 그 표정과 포즈가 자못 세련됐다. 난생처음 카메라 앞에 선 역관 16명의 표정도 다채롭고 흥미롭다.

조선 후기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1737∼1805)과 초정(楚亭) 박제가(朴齊家·1750∼1805)는 사제지간으로 북학파의 거두다. 그들은 청이 비록 이적(夷狄) 국가라고 하나 배울 것은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며 기존의 화이론(華夷論)을 배격했는데, 이것은 자기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없고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박지원은 정조 4년(1780)에 압록강을 건너 중국 땅을 밟았는데 벽돌로 지은 반듯한 집들과 자로 재서 만든 듯한 직선 거리를 보고 상당히 놀랐다. 조선에서 집이든, 담이든, 성곽이든 모두 돌로 만든 것만 보다가 중국의 벽돌집을 보는 순간 충격이 매우 컸다.

박지원은 돌보다 벽돌이 낫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중국인이 어떻게 벽돌을 굽는지, 또 어떻게 아궁이와 온돌을 만드는지를 소상하게 물어봤다. 선각자의 진보적인 행동철학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저 여자는 내 것”…‘구첩(口妾)’에도 질서

그의 역저 ‘열하일기(熱河日記)’는 수레와 선박을 이용한 사회간접자본의 확충, 화폐를 사용하는 유통경제론 등 근대사상의 맹아(萌芽)를 제시하고 있다. ‘열하일기’는 성(性) 문제에 대해서도 진솔하게 기술하고 있어 흥미롭다. 연행사 일행이 중국에 들어가면 나팔을 불어 마을 사람들에게 조선의 국사(國使)가 지나간다는 것을 알렸는데, 이때 마을의 남녀노소 모두 거리에 나와 조선에서 온 귀한 손님들을 구경했다.



말을 타고 지나가는 조선 사람이나 이들을 보는 중국 사람이나 서로 구경한 셈이다. 조선의 선비들은 아내를 떠나 홑몸이 된 지 오래돼 거리의 여자만 봐도 호기심이 발동했다. 그래서 젊고 예쁜 여인을 보면 다퉈가며 “저 여자는 내 것이야”라고 했다. 물론 말로만 내 것이지 실제로 그리 되는 건 아니어서 이런 경우 ‘말로만 내 여자’라는 의미의 ‘구첩(口妾)’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 구첩에는 규율이 엄격해서 누가 먼저 한 여자를 자기 첩이라 주장하면 다른 사람이 그 여자를 내 것이라 주장할 수 없었다. 즉 구첩의 불문율이 정해져 나름대로 질서가 지켜진 것이다. 이는 사대부들이 무더운 여름날에 등나무나 대나무로 엮어 만든 죽부인(竹夫人)을 안고 잘 때와도 상통하는 면이 있다. 흥미로운 것은 남편이 죽부인을 안고 자면 부인은 그에 대해 보복이라도 하듯 같은 모양의 죽노(竹奴)를 안고 잤다는 사실.

남편이 대나무로 만든 첩(竹妾)을 거느렸다면 아내는 대나무로 만든 정부(竹夫)를 거느렸던 셈이다. 이 대용품 첩과 정부는 절대로 아들이나 딸에게 물려주지 않았다고 하니 여기에도 엄격한 불문율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또 하나 재미있는 에피소드. 연암이 하루는 저녁을 먹고 숙소에 무료하게 앉아 있는데, 부엌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찌나 청아한 목소리인지 꼭 한 번 얼굴이라도 보고 싶어 담뱃대로 재를 쑤시는 척하는데 여인이 등 뒤에서 말을 걸었다.

아찔해 뒤를 돌아보니 여인은 머리에 꽃을 꽂은 채 쪽마루에 오른쪽 다리를 세우고 앉아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여인의 얼굴이 깊은 주름으로 패어 있었다. 육순도 훨씬 넘어 보이는 노파였다. 연암은 기겁을 하고 방으로 도망쳤다. 이처럼 박지원은 ‘열하일기’에서 사대부로서는 숨기고 싶은 사실까지 솔직하게 토로하는 문체 혁신을 시도했다. 그러나 조선적 색채가 강한 그의 패관소품체(중국 소설의 문체)는 한당대(漢唐代)에 비해 순정하지 못하다고 홍재왕 정조(正祖)에게 비판받는 문체반정운동에 몰렸다.

그 결과 ‘열하일기’는 금서(禁書)가 됐고 박지원은 도망 다니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정조 때 규장각 4검서(檢書)로 유명한 박제가는 우부승지를 지낸 박평(朴坪)의 서자로 ‘초정’ 말고도 ‘정유(貞)’라는 아호를 사용했는데 정유는 상록수를 의미한다. 그의 어의동(於義洞) 집 마당에 대반송(大盤松)이 있어 실로 32주(柱)로 받치고 있었는데, 정조가 어느 날 이곳을 찾아 그 소나무를 칭찬하고 ‘어애송(御愛松)’이라 명명하며 소나무의 기상을 흠모해 ‘정유’란 호를 지은 것 같다.

강화도조약 100년 전 개국통상 주장

박제가는 소년시절부터 시·서·화에 뛰어나 문명을 떨쳤다. 18세를 전후해 박지원을 비롯해 이덕무(李德懋), 유득공(柳得恭) 등 서울에 사는 북학파들과 교유해 정조 즉위년(1776)에는 이덕무, 유득공, 이서구(李書九) 등과 함께 ‘건연집(巾衍集)’이라는 사가시집(四家詩集)을 내어 문명을 청나라에까지 떨쳤다. 29세 되던 정조 2년(1778)에 사은사 채제공(蔡濟恭)을 따라 이덕무와 함께 청나라에 가서 이조원(李調元), 반정균(潘庭筠) 등의 청나라 학자들과 교유했다.

연행은 3개월 걸렸는데 연경에서는 30일간 머물렀으며, 돌아와 3개월 만인 그해 9월에 탈고한 것이 ‘북학의(北學議)’ 내·외편이다. 이는 경국제민(經國濟民)의 명론(名論)인 동시에 당시 우리나라 도시와 농촌의 의식주에 관한 솔직하고 귀중한 자료인데, 내편은 생활도구의 개선을, 외편은 정치·사회제도의 모순점과 개혁방안을 다뤘다.

‘북학의’는 20년 후인 정조 22년(1798) 그가 경기도 영평(永平) 현령으로 있을 때 농서를 구하라는 국왕의 요청에 따라 ‘응지농정소(應旨農政疏)’의 형식으로 왕에게 바쳤는데, ‘북학’이란 ‘맹자(孟子)’에 나오는 말로 중국을 선진문명으로 인정하고 ‘손지원학(遜志願學)’, 즉 겸손한 마음으로 배우고자 하는 뜻이 함축돼 있다. 지극히 당연한 이런 주장이 저항과 개혁의 사상이 된 까닭은 당시 청을 오랑캐로 보고 적대시하는 시대 풍조의 벽이 너무나 높았기 때문이다.

당시 진보적 신유학자임을 자처하는 대부분의 실학자마저도 농업과 상업의 관계를 대본(大本)과 말업(末業)으로 보고 화폐 유통의 억제를 주장하고 소비 억제, 사치 금지론 일색이던 시절에 박제가는 상업의 의의와 필요성을 제대로 인식하고 적극적인 상업 장려와 그 바탕이 되는 생산의 진흥을 강조했다.

그는 “무릇 재물은 대체로 샘과 같은 것이다. 퍼내면 차고, 버려두면 말라버린다. 그러므로 비단옷을 입지 않아서 나라에 비단 짜는 사람이 없어지면 여공이 쇠퇴한다”라고 하며 생산된 것이 소비돼야 재생산이 가능하니, 덮어놓고 소비를 억제할 것이 아니라 생산 진흥에 치중해야 된다는 주장을 폈다. 근대 경제학을 방불케 하는 독특한 이론이었다. 더구나 쇄국의 시대에 이미 동남아 및 서양과 개국통상을 주장해 강화도조약보다 100여 년 앞서 자주적 개국을 주장했다.

이러한 그의 급진성은 정조조차 우려했고 북학파 내부에서도 더욱 보수적이고 온건한 의견을 가진 박지원이나 이덕무의 지지를 얻지 못했지만, 그의 고독하고 용감한 신념과 진보성은 북학파 중에서도 으뜸이었다. 박제가는 북학파의 최대 지원자이던 정조의 급서 후 순조 원년(1801)에 사은사 윤행임(尹行恁)을 따라 이덕무와 함께 네 번째 연행길에 올랐다. 그러나 돌아오자마자 동남성문의 흉서사건 주모자인 윤가기(尹可基)와 사돈이라 이 사건에 혐의가 있다 하여 함경도 종성부에 유배됐다가 3년 후인 순조 5년(1805)에 풀려났다.

그 후 그의 소식은 알 길이 없는데, 일설에 따르면 그의 스승이자 동지인 박지원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그도 식음을 전폐해 바로 그해에 죽었다고 한다. 이 깊어가는 가을에 참으로 어둡고 긴 터널을 빠져나가야 할 우리로서는 그들의 혜안(慧眼)이 그립고, 그들의 아름답고 고결한 사제의 의리가 부러울 뿐이다.



주간동아 2009.11.10 710호 (p78~79)

  • 이영철 목원대 겸임교수 hanguksao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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