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10

2009.11.10

獨 베스터벨레 ‘별종의 리더십’

튀는 행동과 언행에 대중 환호 … 신임 외무장관 유력, 정치 행보에 주목

  • 슈투트가르트=안윤기 통신원 friedensstifter@gmail.com

    입력2009-11-04 16:2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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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월 치러진 독일 총선 결과, 지난 4년간 정권을 쥔 우파 기민련과 좌파 사민당의 어정쩡한 동거가 막을 내리고 기민련과 자민당의 보수 연정 시대가 열렸다. 앞으로 4년간 더 총리로 내각을 이끌 앙겔라 메르켈은 “선거 목표를 달성했다”며 기뻐했지만, 실상 기민련의 득표율은 33.8%로 4년 전 35%보다 오히려 떨어졌다. 이번 선거의 최대 승자는 누가 뭐래도 자민당. 자민당은 14.6%를 기록,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고 성적을 보였다.

    자민당의 득표율은 2002년 7.4%에서 2005년 9.8%로 올랐고, 이번에 또다시 4.8%포인트 오르며 급상승세를 보였다. 자민당은 한때 독일 정계의 킹메이커였다. 1961년부터 1998년까지 무려 37년간 좌·우파 파트너를 바꿔가며 정권의 한 축을 담당한 터줏대감이다. 그러나 1998년 슈뢰더의 사민당이 녹색당과 적·녹 연정을 구성하면서 권력의 자리에서 밀려났다가 이번에 11년 만에 보수 연정의 일원으로 화려하게 복귀했다.

    동성애, 실업고 출신 등 ‘콤플렉스 덩어리’

    자민당의 선전(善戰)에는 젊은 당수 귀도 베스터벨레(Guido Westerwelle)의 리더십이 단단히 한몫했다. 올해 47세인 그의 인지도나 인기는 소속 정당의 한계를 뛰어넘는다. 자민당은 양대 정당인 기민련과 사민당의 그늘에 가려 녹색당, 좌파당과 함께 중위권을 형성하는 정당의 하나로만 인식되지만, 베스터벨레가 워낙 매스컴에 자주 등장해 가십거리를 꾸준하게 제공하고 있기 때문에 독일인들은 그를 친숙하게 느낀다.

    우선 그는 TV 시사토론 프로그램의 단골 출연자다. 하이톤으로 간단명료하게 말하는 그의 직설적 발언은 대중에게 크게 어필한다. 정치인의 위엄 따위는 집어던지고 ‘빅브라더스’ 같은 리얼리티 쇼에 출연하고 비치발리볼, 모터사이클 경주장 등에도 자주 모습을 나타낸다. 2002년 총선 때는 ‘귀도모빌’(캠핑카를 개조해 만든 선거유세 차량)을 선보였다. 당시 자민당 지지율이 5% 안팎이던 상황에서 그는 구두 밑창에 꿈의 득표율 18%를 새기고 전국을 순회해 화제를 모았다.



    무엇보다도 그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은 빅뉴스였다. 베스터벨레는 2004년 7월 메르켈의 50세 생일파티에 남자 파트너 미카엘 므론츠와 함께 참석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그러나 이런 튀는 행동과 (다소 냉소적 뉘앙스가 담긴) ‘웃기는 정치인’ 이미지가 그에게 유리하게 작용한 것만은 아니다. 자민당의 원로정치인 한스 디트리히 겐셔는 베스터벨레는 너무 경망스럽다며 그의 지도력에 힘을 실어주지 않았다.

    당내에서는 전문직 종사자, 기업인 등 중산층 이상의 이익을 대변하는 오랜 역사를 지닌 점잖은 정당을 너무 헐값에 코미디 집단으로 만들어버렸다는 비난이 있었다. 마초들의 혈투장인 정치무대에 어울리지 않는 그의 동안(童顔)과 연소함, 말쑥하지만 다소 연약해 보이는 풍채도 불리하게 작용했다. 기사련 당수이던 슈토이버는 그를 ‘애송이 수습생’이라고 놀렸고, 그가 야당 당수로 의회 연설을 할 때 슈뢰더 총리와 피셔 부총리는 들은 체 만 체 자기들끼리 시시덕거리며 그에게 모욕감을 안겼다.

    1981년 자민당 청년조직 부회장 선거에 떨어진 것도 동성애 성향 때문으로, 베스터벨레는 이후 오랫동안 동성애 성향을 감추고 언론에 ‘여자친구가 없다’고만 했다. 한편 총선 다음 날 기자회견에서 BBC 방송 기자가 향후 외무부 장관을 맡을 것으로 예상되는 베스터벨레에게 영어로 질문하자 그는 “여기는 독일이다. 독일어로 질문해달라”고 요구해 논란을 빚었다. 곧바로 유튜브에는 그가 2006년에 유창하지 못한 영어로 힘겹게 연설하는 모습을 담은 영상이 클릭 수 상위에 올랐다.

    또 녹색당 외즈데미르 당수는 “불행하게도 이것이 향후 4년간의 독일 외교”라며 전 세계에 사과하는 영상을 유튜브에 올리기도 했다. 베스터벨레는 분명 엘리트는 아니다. 어린 시절 부모의 이혼을 경험한 그는 인문계 중등학교인 9년제 김나지움 진학에 실패하고 6년제 실업계 학교인 레알슐레에 들어갔다. 여기서도 워낙 남들 앞에서 떠들기를 좋아하고 자기주장이 강해 교사들 사이에서 골칫거리로 통했다. 그는 졸업 후 김나지움에 편입했다.

    그러나 겁 없이 반장선거에 나섰다가 최하 득표를 얻었고, 반 친구들의 조롱을 샀다. 성적은 바닥을 기는데도 남의 속을 뒤집는 발칙한 발언을 도맡아 급우들 사이에는 ‘베스터벨레 어록’이 돌기도 했다.그러나 이 시절을 통해 베스터벨레가 체득한 것이 있었다. 바로 좌파에 대한 혐오였다. 1970년대 김나지움은 독일 68세대 젊은 교사들이 접수한 무대였다. 그들은 ‘근대화’ ‘자유화’의 명분으로 고루한 김나지움 체제를 와해시키는 한편, 학생들에게 좌경사상을 전파했다.

    이런 모습을 보며 베스터벨레의 마음속에 차곡차곡 쌓인 좌익에 대한 증오는 향후 그의 정치 일생을 결정지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학에 들어간 그는 곧바로 자민당 청년조직에 가입했고, 21세 나이로 전국대표가 됐다. 이후 3차례(1987, 1990, 1994년) 총선에서 연이어 낙선했고, 1998년 천신만고 끝에 하원 진입에 성공했다. 그러나 이 해 기민련-자민당에서 사민당-녹색당으로 정권교체가 일어나 내각 진입에는 아쉽게도 실패했다.

    자민당은 16년 만의 권력 상실, 신생 녹색당에게 밀린 제4당 추락 등으로 공황 상태에 빠졌다. 뭔가 참신한 혁신이 필요하던 차에, 2001년 5월 전당대회에 불어닥친 세대교체 바람을 타고 베스터벨레는 39세의 나이로 최연소 당수가 됐다. 2002년과 2005년 그가 진두지휘에 나서 치른 총선에서 자민당은 차츰 득표율을 회복하고 원내 제3당으로서의 지위도 되찾았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야당 지도자일 뿐이었다.

    특히 2005년 총선에서 좌·우파 어느 세력도 독자적으로 정부를 구성할 수 없는 모호한 결과가 나왔을 때 슈뢰더가 그에게 공식 제안한 ‘사민당+자민당+녹색당’의 이른바 ‘신호등 연정’은 매우 매력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야당의 길을 가겠노라고 결단을 내렸다. 여당이 전체 의석의 70%를 차지한 대연정 체제에서 야당에게 힘이 있을 리 없지만 그래도 베스터벨레가 이끄는 자민당은 제1야당 역할을 톡톡히 해낸 덕분에 오늘날 승리의 기쁨을 맛보게 됐다.

    메르켈과 돈독한 친분, 국정 운영에 도움?

    겉으로는 ‘웃기는 정치인’이지만 내면은 흠과 상처투성이어서 쉽게 삐치고 흥분을 잘하는 베스터벨레가 향후 4년간 국정의 한 축을 잘 감당할 수 있을지 우려하는 목소리가 많다. 관례대로 그가 부총리 겸 외무부 장관이 될 경우 그의 동성애가 독일 대외관계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인 베스터벨레지만 유독 메르켈 총리와는 돈독한 우의를 다져왔다.

    심지어 메르켈 정부에 맞서는 제1야당 당수이던 지난 4년 동안에도 친밀하게 문자메시지 연락을 주고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사실 두 사람은 공통점이 많다. 각각 총리(2000년)와 당수가 된 시기가 일치하고, 당내 기반이 탄탄하지 못하며, 좌경사상에 증오에 가까운 악감정을 가졌을 뿐 아니라 외모를 비아냥대는 말이 독일 정가에 수없이 떠돌아다닌다는 점도 공통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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