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10

2009.11.10

“아빠와 함께한 추억 돈으로 계산할 수 있나요?”

육아 위해 직장 포기한 ‘홈대디’ 표승범 씨 “문화센터 놀러 가면 엄마들 카운슬러 노릇도”

  • 백경선 자유기고가 sudaqueen@hanmail.net

    입력2009-11-04 14:4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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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빠와 함께한 추억 돈으로 계산할 수 있나요?”
    “취업은 다시 할 수 있겠지만 지금 이 순간은 또 오지 않잖아요. 아이가 초등학교 들어갈 때까지는 함께 보내고 싶습니다.”

    아이를 낳고 육아 때문에 직장을 그만둔 엄마의 말이 아니다. 육아를 위해 경제활동을 포기하고 이른바 ‘홈대디’가 된 표승범(40) 씨의 얘기다. 2006년 3월, 결혼 10년 만에 딸 재이가 태어나면서 표씨의 인생은 완전히 달라졌다. 아내 이소임(40) 씨 대신 그가 딸을 키우기 위해 하던 일을 접고 집에 들어앉은 것.

    “사실 아이를 갖기보다는 맞벌이하면서 둘이 잘 먹고 잘 살자는 생각이 컸어요. 그러다 10년 만에 아이가 생기니까 모든 게 달라지더군요.”

    아빠와 노는 딸 부러워하는 아이들

    홈대디 전업 이전 표씨는 ‘자그마한’ 사무실을 차려놓고 가구 디자인을 하는 사업가였다. 재이가 태어나자 아무래도 안정적인 수입이 있어야겠다는 생각에 사업을 접고 전에 다니던 직장으로 돌아가려 했단다. 그런데 갑자기 회사 사정이 안 좋아져서 재취업이 어렵게 됐다고. ‘이왕 이렇게 된 것,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을 충분히 갖자’는 생각에 사업도 정리했다. 아이를 낳고 3개월 후 아내는 직장에 복귀했고 그는 집에 남았다.



    어차피 내친걸음. 취업하겠다고 다른 곳을 알아보지도 않았다. 표씨처럼(사실 그는 완전히 경제활동을 포기한 것은 아니다. 간간이 프리랜서로 집에서 일한다) 육아 때문에 취업을 포기한 남성 비경제활동인구는 518명에 이른다. 비경제활동인구는 만 15세가 넘은 인구 중 취업을 포기하거나 미룬 사람으로 실업자와는 구별된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통계청의 고용 동향을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6월 현재 남성 비경제활동인구는 501만1170명, 여성 비경제활동인구는 1014만명이다. 이 중 근로능력이 있는데도 구직활동을 하지 않는 남성 25만2890명과 여성 23만6338명에게 그 이유를 물었더니 남성 518명(0.2%), 여성 2만2215명(9.4%)이 ‘육아 때문’이라고 답했다. 비록 여성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육아를 이유로 한 남성 비경제활동인구가 통계로 나타난 것은 올해가 처음이다. 통계상 지난해까진 전무(全無)했다.

    표씨의 집은 경기도 수원에 있고 아내 이씨의 직장은 서울 광화문이다. 이씨가 오전 7시에 집을 나서기 때문에 그는 솔직히 아내 출근하는 것을 못 볼 때가 많다고 털어놨다. 모든 것을 딸에게 맞추다 보니 아내에겐 소홀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

    “아이 자는 시간에 맞춰 자고, 일어나는 시간에 맞춰 일어나게 돼요. 제 생활 패턴은 모두 아이한테 맞춰져 있죠. 아이가 조금 더 자라면 나아지겠지만 지금은 그래요. 그러다 보니 아내와 살림에는 신경을 많이 못 쓰게 돼요.”(웃음)

    아이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 아이를 키워본 엄마라면 누구나 공감한다. 이에 대해 아내 이씨는 “남편의 살림 솜씨가 좀 아쉽지만 그래도 육아 솜씨는 훌륭하다”며 웃는다. 대한민국 시어머니들이 들으면 혀를 찰 수도 있지만 이씨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아이 돌보는 일은 육체적으로 참 힘들어요. 남편이 아이 키우는 걸 보면 여성보다 체력이 강한 남성이 육아를 맡는 것도 좋은 것 같아요.”

    “아빠와 함께한 추억 돈으로 계산할 수 있나요?”

    홈대디 표승범 씨는 시간이 날 때마다 딸 재이에게 책을 읽어준다. 설거지와 집안 살림은 기본이다.

    아내가 인정한 것처럼 육아경력 4년차인 표씨는 육아에선 이제 프로급이 됐지만, 처음에는 기저귀 갈고 우유 먹이는 게 서툴러 애도 많이 먹었다. 그럴 땐 근처에 사는 처형에게 SOS를 요청했다고. 지난 4년 세월 동안 육아의 제1순위를 묻자 ‘함께하는 경험’이란 답이 돌아왔다.

    그래서 그는 늦은 아침을 먹고 아이와 함께 문화센터며 미술관, 공원에 다니는 것을 좋아한다. 한낮에 아빠가 아이와 있는 모습을 보고 주위에서는 호기심 어린 눈빛을 보낼 때도 있을 터.

    “그런 분들이 가끔 있어요. 그런데 주변의 눈빛은 연연해하지 않아요.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이 얼마나 큰 축복인데요.”

    재이가 가끔 가는 문화센터에서 재이는 오히려 아빠 때문에 친구들의 부러움 대상 1호가 됐다. 부모와 함께 노는 놀이시간에는 ‘힘쓰는’ 아빠가 단연 ‘준마’다. 재이는 늘 가장 빠른 말(아빠 등)을 타고, 가장 높은 목말을 탄다. 육아라는 공통분모로 엄마들과 친해지자 이젠 그들에게 카운슬러 노릇도 하게 됐다고 너스레다.

    “엄마들이 의외로 남편에 대한 얘기를 많이 물어봐요. 왜 남자는 아이에게 무관심하냐는 둥, 술 마시고 늦게 들어오느냐는 둥. 저도 남자니까 남자 처지를 대변하다 보면 ‘그럼 재이 아빠는 왜 잘하세요?’라고 물어요. 그냥 ‘천성인가 봐요’라고 답하죠.”

    사실 표씨의 홈대디 생활은 그의 부모가 모두 세상을 떴기 때문일 수도 있다. 두 동생도 외국에서 살아 아내는 ‘시(媤)’자 들어간 사람들에게서 상대적으로 자유롭다. 그래도 새벽달 보면서 아이 ‘맘마’를 만들다 보면 끊었던 담배 생각도 날 법한데.

    “뭐, 아내가 회식한다며 귀가시간을 넘겨 들어올 땐 육아가 축복인지 다시 생각해볼 때도 있죠.”(웃음)

    가족구성원 역할도 융통성 있게 바뀌어야

    요즘 그는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이 더욱 소중하고 아쉽다고 한다. 아이가 자라면 지금처럼 늘 함께하지 못할 게 벌써부터 걱정이라는 것. 재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면 집 근처에 작업실을 만들어 가구 디자인을 다시 할 계획이다. 아이가 언제든 와서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게 하기 위한 나름의 전략이다.

    과거엔 육아 때문에 일을 그만둬야 한다면 당연히 엄마 몫이었다. 하지만 그는 단호하게 말한다.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고.

    “사회가 변한 만큼 가족구성원 역할도 융통성 있게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요? 아이가 자라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는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어요. 그 기쁨을 이젠 아빠들도 느껴야 해요.”

    서울대 보건대학원 조영태 교수는 가사와 육아를 책임지는 홈대디가 생겨난 배경으로 경기침체가 길어지고 남녀 간 임금격차가 줄어들면서 수입이 많은 쪽이 일을 계속하게 된 트렌드를 꼽았다. 이와 함께 젊은 세대의 가치관 변화와 부성(父性)에 대한 인식 변화도 주요한 요인으로 들었다.

    “돈 많이 벌어다주면서 좋은 학원 보내는 것으로 아빠 노릇 다 했다고 자위하는 친구도 있어요. 저는 좋은 학원 보내거나 고액과외를 시켜주진 못할 거예요. 그래도 아빠와 함께한 추억을 줄 수 있어 행복합니다.”

    그는 아이를 위해 그 또래의 평범한 남자들이 가는 삶을 포기했다. 하지만 후회하지 않는다. 홈대디로 아이와 함께한 시간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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