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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VER STORY | SOS! 대한민국 어린이로 살아가기 04

가장 무서운 상처 남기는 ‘방임’

우리 아이 위험에 빠뜨리는 ‘5대 惡’과 대처법 ② 사랑도 보호도 관심도 못 받는 아이들, 정서적 후유증 심각

가장 무서운 상처 남기는 ‘방임’

가장 무서운 상처 남기는 ‘방임’
초등학교 3학년 태윤(가명·여)이는 학교가 끝난 후 학원 두 곳을 갔다가 저녁 6시쯤 집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태윤이를 기다리는 사람은 없다. 맞벌이를 하는 엄마 아빠는 밤 10시는 돼야 집에 들어온다. 간혹 엄마가 일찍 오기도 하지만 그래 봤자 8시가 넘어서다.

태윤이는 해가 지기 전에 마루와 방, 부엌 등 집 안의 불을 모두 켠다. 어두우면 귀신이 나올 것 같기 때문. 깜빡 잊고 화장실 불을 켜지 못한 날엔 엄마가 올 때까지 화장실에도 못 간다. 혼자 있을 때 태윤이는 TV를 보거나 인터넷을 한다. TV 소리가 없으면 무섭기 때문에 숙제할 때도 TV를 켜놓는다.

집중이 안 돼도 하는 수 없다. 밤 10시, 피곤에 찌든 얼굴로 집에 온 엄마는 태윤이 숙제부터 챙긴다. 숙제를 제대로 하지 못한 날엔 불호령이 떨어진다. 아빠는 언제 얼굴을 봤는지 가물가물하다. 갈수록 엄마는 무섭고 아빠는 낯설어진다는 태윤이. ‘과연 엄마 아빠가 나를 사랑하기는 하는 걸까?’ 갑자기 눈물이 핑 돈다.

최근 보건복지가족부와 중앙아동보호전문기관이 펴낸 ‘2008 전국 아동학대 현황 보고서’에 따르면 아동학대 가해자 중 84.5%가 부모였다. 학대 발생 장소도 83.1%가 ‘가정’으로 나타났다. 아이를 가장 잘 보살펴야 할 부모와 사랑의 공간이어야 할 가정이 아동학대의 주범이자 주무대가 됐다.

“혼자 있으면 너무 무서워” … 멀쩡한 가정에서도 방치



일반적으로 아동학대라고 하면 아동을 대상으로 한 폭력·폭언, 성추행이나 성폭행 등을 떠올린다. 하지만 보호자가 양육과 보호를 소홀히 해 아동의 정상적 발달을 저해하는 ‘방임’이 39.8%(3105건)로 아동학대 유형 가운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다. 방임은 빈곤가정뿐 아니라 겉보기엔 멀쩡한 가정에서도 나타난다. 부모들이 방임을 아동학대로 여기지 않기 때문.

하지만 명지대 아동심리치료학과 선우현 교수는 “방임은 가장 무섭고 심각한 아동학대”라며 “방임된 아이는 물리적 학대와 달리 밖으로 드러나는 상처가 없어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기 때문에 그 후유증이 크다”고 말했다. 서울아산병원 소아청소년정신과 유한익 교수도 “신체적 안전을 생각하더라도 아이를 혼자 두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화재 등 사고가 발생했을 때 혼자 남은 아이는 아무런 응급조치도 받을 수 없기 때문.

실제로 어린이 사망원인 1위가 사고사인데, 그 현장에 어른이 1명만 있어도 살 수 있었던 경우가 적지 않다고 한다. 방임은 크게 물리적 방임과 정서적 방임으로 나뉜다. 물리적 방임은 의·식·주 같은 기초적인 보살핌조차 이뤄지지 않는 경우. 주로 빈곤가정에 많으며 부모나 보호자가 아이를 돌볼 육체적, 정신적 능력이 없는 경우가 많다. 물리적 방임 아동은 신체발육이 좋지 않고 언어발달이 늦어 학습장애로 이어지기도 한다.

선우현 교수는 “체격이나 학습 면에서 또래보다 떨어지면, 성격이 삐뚤어지고 범죄의 길로 빠질 가능성도 크다”고 우려했다. 정서적 방임은 의·식·주는 물론 아이에게 필요한 웬만한 물질적 보살핌은 제공하지만, 아이가 진정으로 원하는 정서적 반응을 못 해주는 경우를 의미한다. 물리적 방임도 크게는 정신적 방임에 포함된다. 최근 맞벌이가 늘고 집에 혼자 있는 아이가 많아지면서 정서적 방임 상태에 놓인 아이들도 급증했다.

이 경우 아이가 도움을 필요로 할 때 부모나 보호자가 즉각 조치해주지 못하고, 이런 경험이 반복되면 아이는 자신이 관심과 보호, 사랑을 못 받고 있다고 여긴다. 그 결과 쉽게 불안해하고 다른 사람을 믿지 못하며, 학습의욕이나 주의력도 떨어진다. 유한익 교수는 “학습장애, 산만함, 우울증, 게임중독 등으로 병원을 찾는 아이들의 문제행동 이면엔 대개 부모의 방임이 있다”며 그 심각성을 강조했다.

“아이가 밤늦게까지 혼자 있으면 무섭기도 하거니와 사랑받지 못한다, 심지어 버림받았다는 생각까지 하게 됩니다. 여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아이들은 TV나 인터넷 게임 등에 몰두하죠. 그러다 음란물을 접하거나 일탈행동을 할 가능성도 높아집니다.”

콘텐츠진흥원이 민주당 변재일 의원에게 제출한 청소년 인터넷중독 현황 보고서에 따르면, 인터넷중독 고위험 사용자군의 56.3%는 부모가 맞벌이를 하고 있다고 답했다. 인터넷중독예방센터 이은실 선임연구원도 “게임중독으로 상담한 초등학생 중 부모가 맞벌이라 집에 혼자 있는 비율이 매우 높다”고 전했다.

“맞벌이 부모는 아이와 정서적으로 교감해야”

방임이 꼭 맞벌이 부부에게서만 나타나는 건 아니다. 부모가 자녀와 오랜 시간 함께 있어도 정작 아이가 필요로 하는 정서적 반응을 해주지 않으면 아이는 정서적 방임 상태에 놓인다. 삼성서울병원 소아청소년정신과 정유숙 교수는 “부모가 옆에 있어도 아이가 보챌 때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거나 짜증을 내면 아이는 심각한 상처를 받는다”고 했다. “이런 경험이 반복되면 아이는 무기력증에 빠져 더 이상 보채지 않게 됩니다.

그러면 부모는 ‘우리 아이는 순해서 일일이 반응해주지 않아도 돼’라고 생각하며 아이를 방치하는 악순환이 계속됩니다. 최근 급증한 산후우울증도 아이를 정서적 방임 상태에 빠지게 하는 주요인이고요. 엄마는 한순간의 우울증으로 아이를 방치하지만, 정서가 완성돼가는 시기에 상처를 받은 아이는 그 후유증이 평생을 갑니다. 남편들이 산후우울증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어요.”

선우현 교수는 최근 상담을 한 혜정(가명)이 모녀를 예로 들면서 “아이에게 사랑의 마음을 최대한 많이, 진솔하게 표현하라”고 조언했다.

“혜정이는 초등학교 2학년인데도 배변 조절을 못해 기저귀를 차고 다녔어요. 미혼모로 혜정이를 낳은 엄마는 아이가 보챌 때면 “너 때문에 내 인생을 망쳤는데, 조용히 못해!”라고 소리쳤다고 해요. 아이는 ‘나는 잘못 태어난 아이’ ‘엄마를 힘들게 하는 아이’라고 인식하게 됐죠.

하지만 상담을 받은 뒤 혜정이 엄마가 아이를 꼭 껴안고 ‘네가 태어난 것은 엄마한테 큰 축복이야. 그동안 잘못한 엄마를 용서해줘’라고 했어요. 혜정이는 바로 그날부터 기저귀를 뗐습니다. 아이들은 용변으로 분노를 표출하는 경향이 있는데, 분노의 원인이 없어지자 이상행동도 사라지게 된 거죠.”

유한익 교수는 “맞벌이 부모는 아이와 함께 있는 시간이 짧은 만큼, 그 시간만큼은 아이를 닦달하지 말고 정서적으로 교감하라”고 충고했다.

“맞벌이 엄마들은 아이와 같이 있는 그 짧고 소중한 시간에도 공부를 시키려고 합니다. 늦게 들어온 엄마가 짜증을 내며 공부 이야기만 하면 아이의 스트레스가 얼마나 크겠어요. 아이와 같이 노는 데 열중해야 합니다. 아이가 인터넷 게임을 좋아하면 같이 게임을 하고, 야구를 좋아하면 같이 야구를 하는 거죠. 또 30분이라도 일주일에 두세 번은 아이와 대화를 나누세요. 스킨십도 자주 하고요. 아이로 하여금 ‘엄마 아빠가 바빠서 나와 함께 있는 시간은 적지만, 나를 매우 사랑하고 있어’라는 확신을 갖게 해야 합니다.”

부모 또한 신체적, 정신적으로 건강한 상태에 있어야 한다. 일과 가정사를 조절해 지나치게 일에 매몰되거나 과로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 몸과 마음이 피곤하면 본의 아니게 아이를 내팽개쳐둘 가능성이 높다. 또 아이를 가진 형제, 자매 인근에 살면서 교류하거나 이웃과 친하게 지내는 것도 좋은 방법. 회사원 엄모 씨는 1년 전 처제 식구와 살림을 합쳤다. 비슷한 시기에 자매가 아이를 낳았는데, 한 집에 살면 서로 의지도 되고 아이 때문에 쌓인 스트레스와 우울증도 풀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

엄씨는 “아내와 처제가 아이를 데리고 함께 산책하고 쇼핑도 다니면서 산후우울증에서 빨리 벗어날 수 있었다”며 “아이들도 매일같이 놀 사촌이 있다 보니 사회성이 절로 길러지는 듯하다”고 했다. 그러나 방임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면 부모뿐 아니라 사회, 국가 차원의 노력이 필요하다. 정유숙 교수는 “아동의 보육을 기업이나 국가에서 어느 정도 책임지는 시스템이 확보된다면 물질적, 정서적으로 방임되는 아이가 크게 줄 것”이라며 “부모 또한 보육으로 인한 스트레스를 받지 않으면 자녀에게 질적으로 더 풍성한 사랑을 줄 수 있다”고 말했다.



주간동아 2009.11.03 709호 (p26~27)

  • 이지은 기자 smile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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