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01

2009.09.01

후광(後廣)을 든든히 지킨 후광(後光)

DJ의 가족 … 이희호 여사는 정신적 지주이자 동지, 세 아들과 후손들에 각별한 애정

  • 유재영 기자 elegant@donga.com

    입력2009-08-28 11: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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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광(後廣)을 든든히 지킨 후광(後光)

    대통령 당선 이후 청와대에 모인 세 아들과 며느리, 손자 손녀들.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의 측근들은 부인 이희호(87) 여사를 김 전 대통령의 ‘정신적 지주이자 동지’라고 표현한다. 남편에게 정치적으로 많은 깨우침을 줬고, 같은 눈높이에서 서로가 추구하는 꿈으로 하나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인연을 맺은 ‘시작’ 단계만 봐도 김 전 대통령에게 이 여사는 ‘아내’를 뛰어넘는 특별한 존재였다. 1962년 이 여사는 위기에 빠진 김 전 대통령 앞에 구세주처럼 나타났다.

    1959년 김 전 대통령은 첫 부인 차용애 씨와 사별하고 용공 정치인으로 몰려 민주당 국회의원으로서의 입지까지 흔들리는 불안한 처지였다. 그런 김 전 대통령을, 더구나 두 아이(홍일, 홍업)까지 딸린 초짜 정치 입문생을 이 여사는 과감히 남편으로 받아들였다.

    김 전 대통령이 결혼 후 이 여사에게 두고두고 감사해하고 미안해한 이유는 이 여사가 그의 청혼을 받아들이면서 자신이 원하던 바를 모두 포기했기 때문이다. 이 여사는 김 전 대통령의 청혼을 받아들이면서 오래도록 연정을 품었던 서울대 정치학과 출신의 재야운동가 계훈제 씨(1999년 작고)와의 ‘미래’를 접었고, 여성운동가로서 그와 함께 남녀평등 사회를 만들고자 했던 ‘꿈’도 포기했다.

    계씨를 포기하는 일은 이 여사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아픔이었다. 이 여사는 지난해 펴낸 자서전 ‘동행’에서 “그에 대한 미안함과 죄책감은 오래 떠나지 않았다”며 계씨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을 표현한 바 있다. 김 전 대통령 처지에선 이처럼 복잡한 심경을 딛고 자신만을 믿고 따라준 이 여사가 남다르게 보이지 않을 수 없었다. 배포 큰 전라도 사나이였지만, 인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그에게 아내는 ‘경애하는 당신’ ‘존경하는 당신’이었다.



    “내가 이 정도로 유지된 것은 당신이 있으므로 해서라는 것을 어찌 부인할 수 있겠소. 당신을 위해 간절한 마음으로 언제나 기도하고 있소.”(‘후광김대중대전집’ 제8권 ‘옥중서간집’ 중 1982년 4월26일 내란음모 혐의로 복역할 당시 이 여사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

    사랑 포기하고 초짜 정치인 아내로 변신

    김 전 대통령의 세 아들 또한 그의 파란만장한 인생 역정과 궤를 함께한다. 아버지처럼 짧은 기쁨, 그리고 긴 탄식의 역사가 이들의 과거와 현재 속에 공존하고 있다. 장남 김홍일(61) 전 의원(제15·16대)은 김 전 대통령이 “내가 후천적 장애자로 만들었다”며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도 미안함을 감추지 못하던 아들이다. 1970~80년대 ‘김대중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신체적, 정신적 고초를 겪은 큰아들이기에 그에 대한 김 전 대통령의 애착은 남달랐다.

    그는 김 전 의원에게 “내가 ‘우리 집안은 네 증조부 이래 아주 장수하고 건강한 집안’이라고 자주 말했는데, 그것을 이 아비가 지켜주지 못했다”며 늘 가슴 아파했다는 후문이다. ‘한(恨)’에 가까운 감정이다. 김 전 대통령은 “내 일을 대신할 수 있을 것”이라며 정치인으로서 김 전 의원의 발전 가능성을 내다보고 장자로서 기를 살려줬다. 그러면서도 늘 그의 건강을 염려했다.

    “홍일이의 체중이 는 것을 알고 놀랐다. 밥과 고기를 줄이고, 야채 생선 등으로 배를 채우도록 해라.”(‘후광김대중대전집’ 제8권 ‘옥중서간집’ 중 1981년 7월29일 가족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 하지만 김 전 의원의 건강 상태는 계속 악화됐다. 김 전 대통령이 서거한 후 장례식장에 나타난 김 전 의원은 의원 시절과는 무척 달라진 모습이었다. 파킨슨병으로 근육 및 안면 경직과 지적 장애 증세가 심각하게 진행된 상태로 알려졌다.

    후광(後廣)을 든든히 지킨 후광(後光)

    김대중 전 대통령이 1981년 내란음모 사건으로 청주교도소에 수감됐을 당시 이희호 여사(가운데)와 홍일(왼쪽), 홍업 두 아들과 면회하고 있다(좌측사진). 파킨슨병으로 몰라보게 수척해진 김홍일 전 의원. 휠체어에 의지한 채 부친의 영정에 분향하고 있다(우측사진).

    옥중서신 “손녀가 싫어하는 별명 부르지 마라”

    김 전 의원은 1971년 ‘민주수호전국청년학생연맹’의 배후 조종자로 몰려 중앙정보부로 끌려가 고문을 받고 허리를 다쳤다. 80년 5·18민주화운동 때는 신군부에 끌려가 고문을 당했는데, 이때 책상 밑 땅바닥에 머리를 부딪히면서 떨어져 척추 상태가 크게 악화됐다. 90년대 중반엔 척추신경계통 장애와 함께 김 전 대통령이 늘 걱정하던 대로 당뇨 합병증이 나타나 건강이 더욱 악화됐다.

    2003년 나라종금 퇴출 저지 로비사건 수사 때 알선수재 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는 과정에선 파킨슨병과 고혈압 증세가 더해졌다. 차남 홍업(59·제17대 의원), 3남 홍걸(46) 씨도 거친 풍랑에 휘말리긴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도 아버지의 정치 역정을 함께하면서 많은 고초를 겪었다. 김 전 대통령의 재임 시절엔 ‘최규선 게이트’ 등 대형 사건에 연루, 구속되면서 아버지의 국정 운영에 큰 부담을 주기도 했다.

    김 전 대통령의 삶에서 손자 손녀들은 더없이 각별한 존재다. 아들들에게 커다란 죄의식을 갖고 있던 김 전 대통령은 손자 손녀들을 끔찍이 사랑했다. 한 동교동계 인사는 “1980년대 옥중에서, 그리고 87년과 92년 연이은 대선 패배와 정계 은퇴라는 힘든 과정에서 김 전 대통령이 마음을 추스를 수 있었던 것은 손자 손녀들의 존재감 때문”이라고 말했다. 전 대통령은 특히 김 전 의원의 딸들과 깊은 추억을 갖고 있다.

    김 전 의원은 부인 윤혜라(58) 씨(김구 선생의 경호책임자이던 윤경빈 대장의 맏딸로, 친오빠는 윤흥렬 전 스포츠서울 사장)와의 사이에 딸 셋을 뒀다. 지영(33), 정화(31), 화영(25) 씨가 그들. 지영, 정화 씨는 김 전 대통령이 내란음모 혐의로 복역하던 시기에 유년기를 보냈다. 김 전 대통령은 가족의 서신을 통해 두 손녀가 커가는 모습을 접했고, 김 전 의원과 큰며느리에게 이들의 인격 형성 방향을 제시하는 일을 낙으로 삼았다고 한다.

    “지영이와 정화의 소식이 얼마나 나를 위로하고 기쁘게 해주는지 모른다.” “정화에겐 제가 싫어하는 별명 부르지 마라. 내 경험으로 교육상 좋지 않다.” “지영이가 편지 글씨를 이제는 아주 놀랍게 잘 쓴다. 정화에 대해서도 친구를 만들어줘 외롭지 않게 하는 게 교육상 좋을 것이다.”(‘후광김대중대전집’ 제8권 ‘옥중서간집’ 중 1981년 가족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

    할아버지의 애정과 관심 덕인지 이들은 다방면에서 재능을 뽐내는 여성으로 성장했다. 지영 씨는 국내 굴지의 대기업 사원으로 근무한 바 있고, 정화 씨는 한때 웨딩플래너로 일했다. 서울대 음대 출신인 화영 씨는 일찍 결혼해 현재 두 아이의 엄마다.

    홍업 씨의 두 아들도 장성했다. 미국 LA에서 태어난 큰아들 종대(23) 씨는 김 전 대통령 서거 며칠 전 군에서 제대했다. 제대하자마자 장손으로 할아버지의 영정을 들어야만 했다. 이중국적이라 군 복무를 하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당당히 육군에 입대해 경기도 화성 부근 부대에서 국방의 의무를 마쳤다. 미국 코네티컷 주 럼지 홀 스쿨 재학시절 레슬링 선수로 활약한 바 있는 둘째 종민(20) 씨도 전도유망한 청년으로 성장했다.

    김 전 대통령에게 가족이란 지팡이에 의지해 외로운 길을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묵묵히 곁을 지켜준 든든한 후광(後光)이자 마음의 ‘빚’이었다. 자신에게 정치적으로 큰 부담을 안겨줄 때도 있었지만 김 전 대통령은 늘 가족에게 각별했다. 특히 세 며느리와 손자 손녀들에게 자신의 아내, 아들들이 겪은 아픔을 대물림하지 않기 위해 더욱 애착을 보였다.

    서거 직전 기력이 다했음에도 시선은 끝까지 가족을 향하고 있었던 김 전 대통령. 이승에서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가족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을 떨쳐내지 못했을까. 후광(後廣)이 눈을 감은 지금, 그가 마지막으로 응시하던 후광(後光)들에게 세상의 눈이 쏠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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