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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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동지’에서 ‘변절한 저격수’까지

60년 정치史 함께한 ‘DJ의 사람들’

  • 배수강 기자 bsk@donga.com

    입력2009-08-28 10:5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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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원한 동지’에서 ‘변절한 저격수’까지

    권노갑, 한화갑, 김옥두, 김상현, 한광옥, 조비오 신부, 박지원, 이해찬, 천정배, 정동영, 김근태, 추미애, 홍사덕, 이신범(작은 인물사진-좌측부터)

    아리스토텔레스(BC 384∼322)는 저서 ‘정치학(Politika)’에서 인간은 본성적으로 국가적 동물이고, 국가 공동체는 인간의 행복을 성취하기 위해 만들어진다는 지론을 편다. 인간은 행복을 추구하는 이기적인 동물인 셈이고, 따라서 정치적 행위를 통하지 않고는 행복을 얻을 수 없다는 얘기다. 사람이 정치적 동물이라는 말이나 다름없다.

    이런 서양철학의 연장선상에서 본다면, 사람사회가 개미사회와 달리 ‘전면적 협동’ 관계가 적용되지 않는 이유도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려는 이기심과 욕심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은 이기적이고 탐욕스럽지만 이익을 위해서는 타협을 한다. 싸움만 하다가는 서로 손해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서로 이익을 조절하면서 타협을 통해 풀어나가는 과정을 ‘정치’라고 하며, 사람사회가 유지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러한 정치적 과정에서 만나는 동지(同志)와 갈등으로 생기는 적(敵)은 정치적 파생물이라고 할 수 있다.

    1961년 제5대 민의원 재선거(강원도 인제)에서 당선돼 정치활동을 시작한 고(故) 김대중(DJ) 전 대통령도 60년 넘는 정치활동 기간만큼 숱한 동지와 적을 만들었다. 그의 가신, 비서, 측근 그룹을 일컫는 ‘동교동계’는 김영삼(YS) 전 대통령의 ‘상도동계’와 더불어 한국 현대사를 써내려간 양대 정치세력이었다.

    권노갑 한화갑 김옥두로 대표되는 동교동계는 김 전 대통령과 50여 년간 동고동락한 측근 중 측근이다. 우리가 흔히 쓰는 ‘동교동계’라는 말은 언론자유가 보장되지 않던 1973년께 신인 정치인 시절부터 동교동에 거주하던 김 전 대통령의 실명 대신 ‘동교동계 재야인사’라는 말을 사용하면서부터라고 하니 벌써 36년이나 된 고유명사다.

    김 전 대통령의 목포상고 후배인 권노갑 전 민주당 고문은 동교동계의 맏형으로 인제 선거 때부터 50년을 함께한 분신이다. 겨울에 김 전 대통령의 신발을 가슴에 품고 기다렸다는 ‘DJ 경호대장’ 이윤수 전 의원과 김옥두 전 의원은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 합류하면서 동교동계에 발을 들였다.



    김 전 대통령이 제6대 국회의원 시절 ‘내외문제연구소’를 설립해 본격적인 계보 관리에 나서면서 동교동계는 연구소 간판 아래 외연을 확장한다. 김장곤 김원식 천명기 조진혁 씨 등 지구당 위원장들이 이때 모였고, ‘리틀 DJ’ 한화갑 전 민주당 대표는 김 전 대통령이 목포에 출마하는 제7대 국회의원선거 때부터 뜻을 같이했다. 당시 서울대 외교학과를 졸업하고 고시를 준비하던 한 전 대표는 이후 동교동 캠프에서 조직관리를 담당하며 평생 김 전 대통령을 따르게 된다.

    김상현 전 의원은 1957년경 동양웅변학원 이사장이던 김 전 대통령과 사제 간으로 만나 정치적 동지가 됐다. 한광옥 최재승 설훈 조재환 윤철상 전 의원, 서거 순간까지 함께한 박지원 의원, 문희상 국회부의장, 이석현 의원은 대표적인 김 전 대통령의 비서 출신. ‘영원한 비서실장’ 박 의원은 김 전 대통령이 1980년 신군부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은 뒤 미국 망명길에 올랐을 때 김경재 전 의원의 소개로 인연을 맺었고 이후 ‘신동교동계’ 본류를 형성한다.

    김근태 민주당 상임고문의 계보로 청와대 대변인을 지낸 박선숙 의원과 국정상황실장을 지낸 장성민 전 의원도 동교동 비서실 ‘막내급’ 인사들이다. 언론인 출신 동교동계 인사로는 고(故) 채영석 전 의원, 이협 정동채 전 의원 등이 있다. 박권상 전 KBS 사장은 동교동계는 아니었지만 김 전 대통령과 가깝게 지냈다. 하지만 ‘국민의 정부’가 출범하면서 동교동계는 막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한다며 측근정치의 폐해를 상징하는 단어로 전락하는 신세가 됐다.

    당시 여당이던 새천년민주당의 소장파 리더 정동영 의원과 김근태 전 의원은 동교동계를 겨냥해 ‘2선 후퇴론’과 ‘해체론’을 주장했다. 2003년 민주당의 분당과 2004년 총선 과정을 거치면서 동교동계 내에서도 구파와 신파 간 대립 양상이 빚어졌다. 그래서일까. 김 전 대통령은 2003년 2월 퇴임과 동시에 동교동계의 해체를 지시했다.

    ‘이 사람이다’ 싶으면 반드시 자기 사람 만들기

    제14대 대통령선거(이하 대선)에서 YS에 패한 뒤 영국 유학길에 오른 김 전 대통령은 1995년 귀국하면서 아시아태평양평화재단(아태평화재단)을 설립, 정계 복귀의 발판을 마련했다. 이때 신진 재야인사들을 대거 끌어들이면서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게 되는데 김근태 상임고문, 정세균 민주당 대표, 추미애 천정배 정동영 의원, 김한길 전 의원 등이 새로운 동지로 합류한다. 이해찬 전 총리와 박상천 전 대표 등은 이보다 앞선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시절부터 김 전 대통령을 보좌했다.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 김원기 전 국회의장, 김정길 전 대한체육회장, 유인태 전 청와대 정무수석 등은 김 전 대통령의 정계 복귀를 반대하다 1997년 대선 직전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하면서 그의 동지가 됐다. “DJ는 ‘이 사람이다’ 싶으면 반드시 자기 사람으로 만들고, 당장 자기 사람이 되지 못하더라도 눈여겨봤다가 언젠가는 기용했다.”

    비서 출신 인사들이 전하는 김 전 대통령의 인사원칙처럼 그는 ‘될 만한 사람’은 피아 구분 없이 발탁해 곁에 뒀다. ‘국민의 정부’ 초기 금융감독위원장으로 점찍은 이헌재 씨에 대해 “이회창 캠프에서 일한 인물”이라는 보고가 올라오자 김 전 대통령은 “과거에 잘한 사람에게는 감사패를 주면 된다. 현재와 미래에도 잘할 사람을 기용해야 한다”며 그를 감쌌고 5·6공화국에서 국회의원 3선과 청와대 정무수석비서관을 지낸 김중권 씨를 과감히 대통령비서실장에 앉히기도 했다.

    임동원·신건 전 국정원장, 한승헌 전 감사원장, 전윤철 전 부총리, 김태동 전 청와대 경제수석, 김대환 전 노동부장관 등은 당시 정부 요직에서 DJ의 정치철학을 전파했다. 재야인사 시절 인연을 맺은 동지들도 적지 않다. 5·18의 진상을 외부에 알리려다 1년간 옥고를 치른 조비오 신부, 김 전 대통령이 주도한 ‘명동성당 구국선언’에 힘입어 유신헌법 철폐를 결의했다가 ‘전남노회사건’으로 구속 기소된 강신석 목사가 대표적이다. 이들은 훗날 차례로 5·18기념재단 이사장을 지냈다.

    ‘영원한 동지’에서 ‘변절한 저격수’까지

    2001년 12월 민주당 범동교동계 인사 1000여 명이 송년 모임을 갖고 있다. 동교동계 인사들은 DJ를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 늘 총대를 멨지만 DJ는 2003년 퇴임 직전 “동교동계라는 표현을 쓰지 말라”며 해체를 지시했다.

    항룡유회(亢龍有悔·하늘 끝까지 올라간 용은 내려올 길밖에 없음을 후회한다)라고 했던가. ‘국민의 정부’에서 고공 행진하던 ‘DJ맨’ 상당수는 노 전 대통령의 ‘참여정부’가 들어선 이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권노갑 한화갑 등 핵심 인사들은 노무현 정부 때 대거 사법처리 됐고, 임동원 신건 등 고위 공직자들 역시 대북 송금과 불법 도·감청 사건에 휘말려 곤욕을 치렀다.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으로 1980년대 초 군사정권에서 고문과 옥고를 치른 동교동계의 핵심 김옥두 의원도 제17대 총선 과정에서 돈을 뿌린 혐의로 구속됐다.

    그 대신 노 전 대통령과 ‘코드’를 맞춘 천정배 정동영 김두관 문희상 염동연 정찬용 김완기 등 많은 인사들이 요직에 발탁되거나 막후 실세로 군림했으며, 이 때문에 “호남 인맥에 대한 노무현 정권의 배신인사”라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지난해 총선에서 김 전 대통령의 정서적 고향인 목포에서 대통합민주신당의 깃발을 달고 승리한 박지원 의원, 김대중 정부 시절 청와대 대변인을 지내며 ‘DJ의 입’ 노릇을 한 박준영 전남지사, 오랜 시간 지근거리에서 김 전 대통령을 보필한 박광태 광주시장과 전갑길 광주 광산구청장 등은 여전히 현실 정치에서 건재하고 있다.

    DJ 그늘 벗어나 各自圖生하기도

    한때 DJ와 의기투합했지만 정치적 지형에 따라 대립과 동반을 거듭하거나 정적으로 맞선 인연도 있다. 노 전 대통령은 제14대 대선에서 패해 은퇴한 김 전 대통령이 1995년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해 정치에 복귀하자 ‘3김정치’라며 비판의 날을 세웠다. 그러나 2년 뒤 김 전 대통령이 대선 4수(修)를 강행할 때는 영남 정치인 가운데 유일하게 그의 편에 섰다.

    김 전 대통령은 노 전 대통령을 1998년 보궐선거(서울 종로)에서 당선시키고 2000년 해양수산부장관 임명으로 화답했으며,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 과정에서도 암묵적으로 지원했다. 하지만 노무현 정부 출범 이후 대북송금 특검으로 박지원 의원과 임동원 전 국정원장이 구속 수감됐고, 민주당의 분당과 열린우리당의 창당 과정을 거치면서 둘 사이는 틀어지게 된다.

    한나라당 홍사덕 의원도 비슷한 경우. 1991년 9월 김 전 대통령의 신민당과 이기택 총재의 ‘꼬마민주당’이 통합민주당을 탄생시켰을 때 홍 의원은 꼬마민주당 소속으로 김 전 대통령과 인연을 맺었다. 이기택 진영이던 홍 의원은 1992년 대선 때 민주당 후보이던 김 전 대통령의 간곡한 부탁으로 당시 3선 중진의원으로서의 격을 낮춰 주로 초선의원이 담당하던 대변인직을 맡아 ‘DJ 대통령 만들기’에 앞장섰다.

    그 후 김 전 대통령은 “우리 홍 동지”라고 부르며 그를 가까이했고, 대선에서 패하고 정계은퇴 선언을 한 뒤 며칠간 백암온천에서 휴식을 취할 때도 홍 대변인만 대동했다. 그러나 홍 의원이 1995년 서울시장 후보 경선에서 동교동계의 비협조로 조순 씨에게 고배를 마신 뒤 둘 사이는 냉각됐다. 동교동계가 “홍 의원이 서울시장이 되면 세대교체 바람이 불어 DJ의 정계복귀가 어려워진다”며 김 전 대통령을 설득한 것이 주효했던 것.

    1995년 8월 김 전 대통령이 국민회의 창당에 분주할 무렵 홍 의원은 결국 김 전 대통령과 결별했다. “떠나면 안 된다”는 김 전 대통령의 만류에 그는 “지역구도가 재현된다”고 맞받았다. 그가 영남 출신의 서울 강남을 지역구 의원이었다는 점에서 김 전 대통령에게 미친 충격파는 컸다. 여의도 정치판에서 ‘DJ 저격수’로 명성을 날린 이신범 전 의원은 사실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에 연루돼 옥고를 치른 인물이다.

    이 전 의원의 남동생이 이희호 여사의 조카사위여서 김 전 대통령과는 ‘한 다리 건너 사돈’이기도 하다. 내란음모 사건으로 복역한 후 미국으로 건너간 이 전 의원은 뉴욕에서 김 전 대통령을 다시 만났고, 85년 2월 김 전 대통령의 귀국 때는 ‘DJ 안전귀국 동행단’ 구성의 책임을 맡을 정도로 각별한 사이였다. 하지만 1988년 제13대 총선을 앞둔 시점에 YS를 선택했고, YS를 도울수록 김 전 대통령과는 껄끄러운 관계로 변해갔다.

    “1987년 대선 때 DJ의 4자 필승론(노태우 김영삼 후보가 모두 영남권이어서 자신의 승리 가능성이 높다는 논리)에 대한 실망감이 크게 작용했다”는 게 그가 YS를 선택한 이유였다. 어쨌든 그는 김 전 대통령의 3남 김홍걸 씨의 미국 로스앤젤레스(LA) 호화주택 거주, 국정원의 도청 문제, 대선 전 대북접촉설 등을 폭로해 숱한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됐지만, 일부는 사실로 밝혀져 당사자들이 사법처리를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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