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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판 ‘터미널’의 버티기

핀란드 여의사, 공항서 9개월간 숙식 … 송환 둘러싸고 獨-핀란드 신경전

독일판 ‘터미널’의 버티기

수많은 인파가 드나드는 독일 수도 베를린의 테겔 공항. 그러나 항공편의 왕래가 뜸한 자정 넘게까지 이곳에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항공사 창구는 거의 다 문을 닫았고, 상점들도 셔터를 내렸다. 공항 청사에 여전히 불은 환히 켜져 있지만, 한적한 심야의 분위기는 소란스럽던 저녁시간과는 사뭇 다르다. 이런 고요한 분위기를 즐기는 사람이 있을까?

의도치 않게 발이 묶여본 사람, 연결 항공편을 기다리느라 밤을 새워본 환승객이라면 그 심정을 알 것이다. 공항이라는 폐쇄된 공간이 얼마나 지겨운 곳인지를. 그런데 만일 그런 공항에 며칠씩 묵어야 한다면? 상상만으로도 진저리쳐질 것이다. 하지만 세상에는 남들과 다르게 사는 사람이 더러 있는 법. 테겔 공항에서 일곱 달째 살고 있는 한 여인도 그런 사람이다.

정신질환 앓는 40세 여의사

야나는 핀란드인으로 나이는 40세, 직업은 의사다. 한창 바쁘게 일할 나이지만, 요즘 그가 하는 일이라고는 공항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닥치는 대로 버튼을 누르는 게 전부다. 밤에는 터미널 D에서 자고, 아침에는 터미널 A로 ‘출근’한다. 의자에 앉아 오가는 사람들을 지켜보다가 가끔 친절하게 말을 건네기도 하는데, 이때는 반드시 영어를 쓴다.

야나가 관심을 나타내는 사람의 부류는 정해져 있다. 말쑥한 정장을 입고 비싼 가방을 든 사람들이다. 경제적으로 능력 있어 보이고, 자기를 고용해줄 수 있을 것 같은 사람들을 야나는 좋아한다. 금발에 키가 크고 날씬한 야나는 겉보기엔 비즈니스 여성처럼 보인다. 하지만 검은 코트를 입은 채 매일 아침 11번 게이트 앞 의자에서 자는 그의 모습은 금세 공항 직원의 눈에 띄었다.



게다가 화장실에서 샤워하고 빨래하는 모습도 목격됐다. 공항 측은 주(駐)베를린 핀란드센터에서 근무하는 핀란드인 목사 헨토넨에게 연락을 취했다. 지난해 12월의 일이다. 헨토넨은 공항으로 야나를 찾아갔다. 등산화를 신고 배낭을 메고 온 목사를 야나는 외면했다. 헨토넨의 핀란드어 인사에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겠다”며 영어로 대답했다. 헨토넨은 그래도 거듭 야나를 찾아갔고, 한편으로는 그의 숨겨진 사연을 백방으로 수소문했다.

그가 알아본 바에 따르면 야나는 핀란드의 한적한 시골에서 자랐다. 일찍부터 야심만만했던 그는 늘 대도시에서의 삶을 동경했다. 탐페레 의대를 졸업, 32세부터 내과의사로 일했으며 박사학위도 받았다. 여기까지는 모든 것이 그의 뜻대로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했다. 그렇지만 얼마 못 가 병원에서 해고되면서 그는 우울증에 빠졌다.

그러다 야나는 핀란드 수도 헬싱키에서 차로 1시간 떨어진 작은 마을 라티에서 다시 일자리를 얻었다. 그러나 작은 마을에 사는 것이 싫어서 ‘헬싱키의 베벌리힐스’로 불리는, 돈 많은 스웨덴인이 모여 사는 카우냐이넨에 집을 얻어 출퇴근했다. 그는 벤츠 C-클래스 신형 모델을 몰았고, 씀씀이가 큰 편이었다.

2005년 야나는 또 실직했다. 설상가상으로 일종의 정신질환 진단까지 받았다. 그 후로는 선진적인 핀란드 사회보장제도의 도움을 받아 생활하며 통원치료를 받았다. 다행히 급성 질환이 아니어서 평소에는 증세가 드러나지 않았다. 그러나 어느 순간 발작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에 약물치료로 병세의 진행을 지연시켜야 했다. 그래서 매주 카우냐이넨의 약국에서 약을 받아갔는데, 언제부턴가 야나가 나타나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여긴 약사가 그를 찾아나섰다. 지난해 12월 핀란드 경찰은 그를 실종자로 처리했다.

개인 자유 존중 vs 국민 보호

그런데 이때 이미 야나는 두 달여 동안 런던과 이스탄불을 유랑하다가 베를린에 온 지 이틀째였다. 그사이 헬싱키에도 다녀왔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헬싱키 공항만 밟고 다시왔다. 이스탄불 공항에서 숙식하던 야나를 터키 당국이 강제로 헬싱키로 보냈는데, 야나는 헬싱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베를린행 비행기에 올랐던 것이다.

그는 헬싱키가 싫었고, 핀란드 의사들과 관청의 지나친 간섭이 짜증스러웠다. 말하자면 야나는 ‘자유를 찾아 도피 중’이다. 기왕이면 영어권 나라로 가고 싶지만, 지긋지긋한 핀란드만 아니라면 유럽 어디라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왜 여행국에 입국하지 않고 공항에만 머물고 있는가? 딱히 갈 곳이 없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그럴듯하다.

야나는 그러니까 노숙인이다. 그것도 고국의 제 집을 놔두고 여러 해외 공항을 전전하며 숙식하는 국제 노숙인이다. 공항에서 노숙하는 것이 법적으로 허용될까? 독일 경찰은 원칙적으로 공항 노숙이 가능하다고 본다. 당사자가 공항에서 별문제만 일으키지 않는다면 말이다. 야나는 외관상 말끔하고 주위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때문에 공항 경찰은 그를 한동안 지켜만 보았다.

그러다 지난 3월 공항에서 다른 승객들과 실랑이가 일자 독일 법원은 간소한 절차의 소액재판을 열어 야나를 베를린 시내 훔볼트 병원에서 검사받게 했다. 독일 의사들의 검진 결과 야나에게서 큰 문제는 발견되지 않았다. 한편 헨토넨은 주독일 핀란드 대사관과 야나의 주치의에게 연락했다. 주치의는 야나의 소재를 알려준 헨토넨 목사에게 고마워하며, 그가 약물처방을 받지 않으면 병세가 급격히 악화될 가능성이 있다고 급히 헬싱키에서 베를린으로 날아왔다.

그는 환자를 강제로 인도할 생각까지 하고 동료 둘을 데리고 왔는데, 이런 의료조치는 핀란드 법에 합치하는 것이다(그러나 독일에서는 이런 조치가 의료진의 판단만으로 허용될 수 없고, 별도로 법원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주치의는 훔볼트 병원을 찾아가 입원 중인 야나를 검사했다. 그리고 야나가 의약 처방 없이 공항에 더 머물다가는 건강에 심각한 손상이 있을 것이라 진단하고, 진단 결과를 핀란드 대사관에서 공증케 했다.

그는 야나를 데려갈 비행기 티켓도 마련했고, 공항에 연락해 신속한 출국 절차도 부탁해놓았다. 그러나 훔볼트 병원 측의 진단을 더욱 신뢰한 독일 법원은 야나를 퇴원시켜버렸다. 결국 빈손으로 돌아가게 된 핀란드 의료진은 독일의 관료주의와 독일 의사들의 태만한 의료정신을 맹비난했다.

야나는 퇴원 후 노숙인 보호시설로 보내졌다. 그러나 그곳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지, 이내 시설을 뛰쳐나가 지나가던 차를 얻어 타고 다시 테겔 공항으로 돌아왔다. 어느덧 그는 여권도, 신용카드도 다 잃어버린 빈털터리가 됐다. 핀란드 언론들은 야나의 소식을 크게 보도하며 독일을 비난했다. ‘어려운 형편에 처한 그를 제대로 돌봐주지 않으면서 왜 모국 핀란드가 그를 돕지도 못하게 하는가’라고.

3월 말 핀란드 외무부는 공식적으로 독일 외무부에 야나의 신병인도를 요청했다. 엄연히 핀란드 국적을 가진 자국민 보호 명분에서다. 게다가 2000년 발효된 헤이그협약에 따르면 위기에 처한 환자를 돌볼 권한은 환자가 ‘통상적으로’ 거주하는 국가에 속한다. 야나는 ‘통상적으로’ 핀란드에 살았기 때문에 핀란드 정부와 의료진은 야나를 강제로라도 본국에 데려올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독일 측의 생각은 달랐다. 이 사안에 대해 법률적인 검토를 한 독일 법무부는, 일종의 정치적 망명처럼 ‘독일로 도피한’ 야나는 독일 법의 적용을 받는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독일 법은 개인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기에 그가 스스로 내린 판단을 존중해야 하며, 국가 공권력이 이에 개입하는 일을 엄격히 규제한다는 것이다. 요컨대 강제인도 같은 강력한 조치는 법의 이름으로 허락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핀란드 법보다 독일 법이 국가의 개입을 훨씬 강력하게 제한하는 배경에는 물론 1933~45년 나치 시대의 오류에 대한 반성과 경계심이 깔려 있다. 나치 비밀경찰인 게슈타포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영장 없이도 국민을 마구잡이로 연행해갈 때―당시에는 모두 합법이었다―개인의 인권이 얼마만큼 유린될 수 있는지 독일은 치가 떨리게 경험한 바 있다.

어떤 사람이 남들과 좀 다른 방식으로 산다고 해서, 예컨대 공항에서 노숙한다고 공권력이 간섭할 수 있는가? 물론 국민 보호 역시 대다수 민주국가에서 숭고한 의무로 받아들이는 가치다. 복지제도가 고도로 발달한 몇몇 국가에서는 이것이 매우 적극적인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렇지만 국민에 대한 적극적 보호와 지나친 간섭은 종이 한 장 차이다.

야나는 핀란드 정부의 적극적인 보호를 짜증스럽게 느꼈고, 그래서 스스로 고국을 떠났다. 헨토넨 목사를 비롯한 핀란드 당국은 이런 야나의 자발적 결정이 병든 심신에서 나왔기에 그것을 무작정 존중하는 것은 옳지 않고, 좀더 합리적 조치를 취하는 것이 옳다고 여전히 생각한다.

겨울 코트 입은 채 공항에서 웹서핑 중

7월 초, 공항 한구석에서 야나의 여권이 구겨진 채 발견됐다. 그는 다시 출국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아직도 테겔 공항에 머물고 있다. 그는 예전보다 더 눈에 띈다. 한여름인데도 두툼한 겨울 코트를 입었기 때문이다. 헨토넨 목사는 가끔 야나를 찾아와 약간의 돈이 담긴 봉투를 내민다.

봉투 겉면에는 세계 각국의 인사말이 야나가 좋아하는 영어로 적혀 있다. 그 돈으로 야나는 공항 편의점에서 샌드위치를 사먹고, 인터넷 카페에 앉아 웹서핑으로 세계를 여행한다. 하지만 그는 고국 핀란드로는 여행가지 않을 것 같다.



주간동아 2009.09.01 701호 (p62~64)

  • 슈투트가르트=안윤기 통신원 friedensstifter@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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