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97

2009.08.04

영재육성 취지 실종 명문大 진학기관으로 변모

고교평준화의 사생아 특목고, 그 왜곡의 역사

  • 손영일 기자 scud2007@donga.com

    입력2009-07-29 13:5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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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뜨거운 감자’ 특목고는 어떻게 생겨났을까? 특목고를 둘러싼 논쟁은 설립 초기부터 만만치 않았다. 특목고는 충분한 타당성 검토를 하지 않은 채 학문적, 교육적 배려가 아닌 정치적 입장에서 성급히 도입됐다. 그 결과 특목고의 역사는 ‘왜곡으로 점철됐다’고 할 만큼 비정상적으로 운영됐던 것이 사실이다. 첫 단추를 잘못 끼워버린 지난 30여 년간의 특목고 역사를 되짚어봤다.

    ‘특수목적의 고등학교’, 즉 특목고라는 말은 1973년 고교평준화제도 도입이 논의되면서 등장했다. 74년 고교평준화 도입 직전, 특별한 설립목적을 가진 특수목적 고교에도 고교평준화에 따른 추첨 배정을 하는 것이 불리하다는 지적으로 당시 문교부는 입학제도연구위원회를 만들었다. 이 위원회는 평준화의 보완책으로 특목고를 인정하고 전국 범위 학생모집을 허용하는 방안을 마련했다.

    1973년 6월 민관식 문교부 장관은 ‘새 입학제도의 확정안’을 통해 인문계 3개교(삼육·성심·중경)를 비롯해 국악고, 서울예술고, 서울체육고, 철도고, 부산해양고 등 8개 학교를 특목고로 지정해 이들의 학생선발 자율권을 인정했다. 하지만 특혜 시비가 불거지자 77년 말 개정된 교육법과 교육법 시행령에서는 일반고와 우수학생 유치 경쟁을 벌이지 않는 실업계 고교로 특목고 지정을 한정했다.

    1980년 신군부는 과외금지 조치와 아울러 영재교육을 위한 특수고교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나섰다. 80년 10월 이규호 문교부 장관이 “영재교육을 위해 예술·체육고교처럼 과학고교, 어학고교 등 특수고교를 신설하겠다”고 발표하면서 과학고 설립 논의가 공론화했다. 83년 경기도 과학관 부설 과학고등학교가 최초의 영재교육기관으로 문을 열었다. 86년 개정교육법 시행령에서 ‘과학계열’이 추가돼 과학고는 특목고로 정식 지정됐다.

    고교평준화 보완책으로 등장



    영재육성 취지 실종 명문大 진학기관으로 변모
    하지만 영재 기준의 모호함 때문에 어학 영재를 위한 외국어고 설립은 불발에 그쳤다. 대신 ‘각종 학교’ 형태의 외국어학교가 등장했다. 이는 직업기능 교육을 중심으로 하는 학교로, 이 가운데 ‘학력인정학교’는 일반고와 마찬가지로 대입예비고사 응시가 가능했다. 1983년 대원외국어학교가 첫 외국어학교로 설립 인가받은 것을 필두로 그해 연말 대일외국어학교도 인가를 받아 84년 두 학교가 개교했다. 90년에는 한영외국어학교가 문을 열었다.

    1992년 ‘각종 학교’이던 외국어학교는 정규학교에 편입되고 어학 영재를 위한 특목고로 지정됐다. 특목고 지정 배경에는 정권 차원의 정책적 의도가 있었다. 한국교육연구소 이종태 소장은 “3김(金)의 분열을 뚫고 어렵게 당선된 노태우 대통령의 지지기반은 중산층이었다. 50년대 후반에 출생한 이들 중산층은 옛 입시 명문고에 대한 향수가 강했다. 이들은 학생들이 하향평준화하는 데 큰 불만을 갖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노태우 대통령은 평준화 폐지까지 염두에 두고 정책 드라이브를 걸었으나 문교부는 평준화 폐지가 어렵다고 판단, 개선과 보완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그 결과 1990년 8월 “각종 학교 형태의 외국어학교를 정식 교육과정으로 채택, 92년부터 외국어학교 신설을 인가해주며 신입생 전형방법과 절차는 현행 과학고, 예체능고와 마찬가지로 특례를 인정한다”는 내용이 담긴 ‘고교평준화제도 개선안’을 발표했다.

    특목고 인정과 함께 특목고생들을 위한 비교내신제가 적용되면서 특목고는 호랑이 등에 날개 단 격이 되었다. 특목고 학생의 수능점수를 일반고 학생의 수능점수에 견줘 내신등급을 부여하는 비교내신제는 1987년 과학고 학생들이 동일 계열로 진학할 경우에 한해 시행됐다. 외국어고는 92년 특목고로 인정받았으나 비교내신제가 적용되지 않았다.

    그러자 학생들이 불리한 내신을 상쇄하기 위해 졸업을 앞두고 대규모로 자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른바 ‘제1차 특목고 집단자퇴 사태’다. 1994년 2월 말 대원외고는 졸업 예정이던 3학년생 588명 중 223명이 이미 자퇴해 졸업생 좌석 대부분이 텅 비었다. 학생 10명 중 4명꼴에 이르는 자퇴생 숫자는 교육계를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이에 따라 1995년부터 외국어고 학생들도 ‘어문계열로 진학할 경우’에 한해 비교내신제가 적용됐다. 그 결과 96~98년은 유례없는 ‘특목고 최전성시대’였다. 비교내신제 실시 이전에도 특목고 학생들은 입시에서 좋은 성적을 거뒀다. 예컨대 94학년도 입시에서 서울과학고의 경우 과학기술대로 조기 진학한 33명을 제외한 학생 138명이 서울대 126명, 고려대 6명, 연세대 3명, 과기대 1명, 기타대 2명 진학해 100% 합격률을 기록했다. 특히 서울대의 경우 ‘원서접수 인원 전원 합격’이라는 대기록을 세웠다.

    외국어고도 이에 못지않았다. 대원외고(재수생 포함)가 서울대 188명, 연세대 127명, 고려대 118명의 합격자를 냈고 대일외고도 서울대 85명, 연세대 74명, 고려대 124명을 합격시켰다. 한영외고는 서울대 54명, 연세대 44명, 고려대 71명.

    불리한 내신에 반발, 1·2차 집단자퇴 사태

    하지만 외국어고에 비교내신제가 적용되면서 1996학년도 입시는 특목고 ‘돌풍’을 넘어 가히 쓰나미 수준이라 할 만했다. 그해 대원외고는 서울대에 199명의 합격자를 내 2년 연속 최다 합격을 기록했다. 특례를 포함하면 단일 고교로서 서울대 합격자 200명 돌파라는 놀라운 기록을 세운 것이다.

    서울과학고는 150명(재수생 7명 포함)의 합격자를 내 2위에 올랐다. 서울과학고는 재학생 160명 중 143명이 서울대에 합격하는 진기록을 세웠다. 수능시험에서도 전체 수석과 자연계 수석을 석권한 데 이어, 본고사에서도 서울대와 연세대 수석을 차지했다. 한영외고가 128명의 합격자로 3위, 한성과학고가 120명으로 그 뒤를 이었다.

    이렇게 되자 특목고가 본래의 취지를 잃고 명문대 인기학과 진학을 위한 입시기관으로 전락했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거세졌다. 동일계열 조기진학은 줄고, 타계열 진학은 늘어나는 실정이었다. 그나마 과학고 학생은 70% 이상이 이공계열로 진학했지만, 외국어고의 어문계열 진학률은 20%대에 그쳤다.

    여론이 악화되자 1996년 2월 서울대는 “1999학년도 입시부터 서울대 입시에 특목고생에 대한 비교내신을 적용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이에 특목고 학생들과 학부모는 ‘특목고생의 교육받을 권리, 평등권 등의 기본권 침해’ 등을 내세워 헌법소원을 제기했다. 하지만 97년 7월 헌법재판소는 특목고 헌법소원을 기각했고, 결국 2학년 학생들을 중심으로 대규모 특목고 자퇴생이 발생하는 ‘제2차 특목고 집단자퇴 사태’가 벌어졌다.

    영재육성 취지 실종 명문大 진학기관으로 변모
    1998학년도 입시는 특목고 동일계열 비교내신제가 적용된 마지막 입시다. 그해 대원외고는 마지막으로 서울대 합격자를 세 자릿수대(170여 명)로 배출하고 99학년도 입시부터 두 자릿수대로 떨어졌다. 다른 특목고들도 사정은 마찬가지. 99학년도 서울대 입시에서 최다 합격생을 배출한 것은 특목고가 아니라 검정고시였다. 특목고를 집단자퇴하고 검정고시를 치른 학생들이 대거 서울대에 합격했던 것이다.

    이후 특목고 열풍은 주춤했다. 특목고 입시에서 서울의 명문 외고는 여전히 건재했지만 대다수 지방 외국어고와 과학고 경쟁률이 하락했으며, 일부 학교에서는 미달 사태까지 벌어졌다. 그러나 2000학년도 입시에서 연세대, 고려대 등 일부 사립대가 수능성적을 기준으로 한 비교내신 또는 ‘수우미양가’ 절대평가로 내신을 적용하면서 특목고는 화려하게 부활했다. 특히 고려대는 과학고 학생들의 의대 지원을 막던 단서 조항을 없애고 외국어고 학생들의 동일계 비교내신 적용을 문과대학 전체 학부와 사범대 영어교육과, 인문대 어문학부로 확대했다. 또한 학생부와 비교내신 중 지원자가 자신에게 유리한 쪽을 선택하도록 해 특목고 학생의 입지를 크게 넓혔다.

    ‘못 가도 연고대는 간다’… 특목고 2차 전성시대

    극도로 제한되던 특목고생 대입전형은 2000년대 중반 이후 숨통이 트였다. 2004년 발표된 ‘2008학년도 대입개선안’은 외국어고 학생은 어문계열, 과학고 학생은 자연계열 진학 시 동일계 특별전형을 실시하게 했다. 이에 명문 사립대들은 앞다퉈 글로벌 인재 전형 등 외국어 우수자 전형을 늘리고 국제학부를 확대했으며 입시에선 수능 및 논술 비중을 높여 특목고 출신에게 상대적으로 유리한 대입 전형을 확대했다. 그 결과 연세대와 고려대 인문계열 입학생 중 외고 출신이 10명 중 4명꼴에 이르렀다.

    이처럼 특목고생을 유치하려는 대학들의 경쟁이 치열해지고, ‘못 가도 연고대는 간다’는 인식이 높아지자 2006년도부터 ‘특목고 2차 전성시대’가 열렸다. 특목고 대비 학원 관계자는 “1990년대 중반 특목고 최전성시대 때 5대 1 수준이던 특목고 입학경쟁률이 내신 불리로 인한 자퇴파동으로 97년 이후 2대 1 아래로까지 떨어졌다”며 “이제는 예전 수준을 넘어 10대 1까지 올라갈 것으로 보인다”고 내다봤다.

    지자체들도 경쟁적으로 특목고 설립을 늘려가면서 왜곡된 특목고 열풍에 한몫했다. 2001년 3월 특목고 지정·고시권이 시도교육감에게 이양되면서 2001년 19개이던 외국어고는 2008년 30개로 늘어났다. 2004년 1월 경기도는 향후 25개 특목고를 설립해 인재를 양성하고 영어학습 인프라를 구축하겠다는 ‘특목고 교육벨트’ 조성계획을 발표, 특목고 설립 경쟁에 기름을 부었다.

    아름다운학교 운동본부 이인규 상임대표는 “지자체에서 우리만 왜 특목고가 없느냐며 전략적으로 특목고를 늘려 특목고 출신들이 전체 학생의 3%에 이르렀다. 비평준화 당시 일류 명문고 출신이 2% 안팎이었음을 감안하면 사실상 평준화 이전의 상태로 돌아간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지적했다.

    정부는 노무현 정부 이전까지 특목고 문제를 방치하다시피 해왔다. 2004년 10월 발표한 ‘특목고 정상화 방안’은 1983년 경기과학고가 문을 연 이래 20년 만에 나온 대책이었을 정도. 이후 정부는 특목고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특단책’을 내놓았지만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소리만 요란한 구호에 그칠 뿐, 특목고에 대한 관리와 감독에는 소홀했다.

    교육부는 2006년 6월 ‘외고 설립 및 운영 개선 방안’을 내놓으며 그해 연말 특목고 등 총 48개교를 대상으로 학교운영 전반에 걸친 실태조사에 나섰다. 2007년 1월 그 결과를 발표하며, 특목고를 신설하려면 교육부와 사전협의해야 한다는 제도를 도입했다. 그리고 같은 해 9월 서남수 교육부 차관은 특목고에 대한 종합적인 대책을 마련하기 전까지 특목고 신설을 위한 사전협의를 유보한다는 ‘폭탄선언’을 내놓았다.

    정권이 바뀐 지금도 특목고에 대한 논란은 여전하다. 백가쟁명식 정책 대안이 쏟아지지만, 특목고를 둘러싼 지난 30여 년간의 왜곡된 역사에 대한 인식은 부족하다.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면 어떤 정책도 백약이 무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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