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92

2009.06.30

죽음의 순간 삶은 완성된다

‘해피엔딩’을 위해 기억해야 할 것

  • 이정옥 시인·‘반만 버려도 행복하다’ 저자

    입력2009-06-25 15:4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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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음의 순간 삶은 완성된다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이 물음은 영원한 화두다. 이를 시작으로 철학과 종교가 태어났지만 명쾌한 답은 어느 종교학자, 철학자도 찾지 못한 것 같다. 이 삶의 끝인 죽음은 어떤 곳일까? 키케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일 죽음이 영혼을 아주 없앤다면 죽음은 확실히 무시돼야 한다. 만일 죽음이 영혼을 영생할 수 있는 곳으로 이끌어간다면 오히려 죽음은 열망돼야 한다. 제3의 경우란 있을 수 없다.” 그렇다. 삶 아니면 죽음이다.

    죽음의 귀띔을 듣지 못하는 사람

    며느리에게도 그녀만의 삶이 있어야 한다며 고질인 천식을 약봉지에 담아 실비노인요양시설로 온 라자로 할아버지. 사업도, 골프도 접고 왔지만 지난 삶을 뽐내지 않았다. 현재를 탄식하지도 않았다. 할아버지의 노년은 평화롭고 격조 높았다. 간혹 복도에서 마주칠 때면 할아버지의 인사말에선 위트가 넘쳤다.

    “나이를 거꾸로 먹는 비결 있으면 공개해도 되는데….” 저녁식사 후 로비에서 한담을 즐기던 할아버지가 다음 날 아침, 식사시간에 보이지 않았다. 웬일이지? 방문을 열자 꿈을 꾸듯 평화로운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심장마비!

    10년을 지내온 당신 방에 여든다섯 해 입었던 육신을 벗어놓고 할아버지의 영혼은 어디로 갔을까? 연락받고 온 아들과 며느리가 가슴을 쳤다. 며느리의 회한이다. “제 휴대전화로 한 번도 전화하신 적이 없어요. 외출 중인 저를 배려해서지요. 그런 아버님께서 이틀 전에 전화를 하셨어요. 그냥 안부전화라며 ‘넌 몸이 약하니 늘 건강 주의하고 무리하지 말라’ 하셨어요. 그때 이상하게 여기고 달려왔어야 했는데….”

    살면서 때를 놓치고 가슴 치는 일이 어디 한두 번 있는가? 그칠 줄 모르고 흐르는 며느리의 눈물을 닦아주며 생각했다.

    ‘영혼이 맑으면 죽음의 귀띔을 들을 수 있구나.’

    실비노인요양시설에서의 10년. 그동안 스물세 분을 떠나보냈다. 삶의 모습이 다양하듯 죽음의 모습도 각양각색이었다. 하지만 죽음은 모든 이에게 공평했다. 백만장자도 비껴가지 못했고, 장군도 이기지 못했다. 죽음이 모든 사람에게 공평한 것이라면 죽음의 귀띔 또한 공평할 것이다. 그런데 귀띔을 듣지 못하는 이도 있다.

    글라라 할머니는 학력과 재력을 뽐내고 다녔다. 그런 할머니의 둘째 아들이 사업에 실패했다. 며느리가 파출부로 나섰다는 소문까지 들렸다. 아들이 찾아와 통사정했지만 끝내 주머니를 풀지 않았다. 그랬던 할머니가 위루술을 받고 6개월을 버티다 떠났다. 침대 시트 아래 숨겨둔 통장을 들고 며느리가 통곡했다. 우리 모두 민망하고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글라라 할머니는 숨이 넘어가는 순간까지도 죽음의 귀띔을 듣지 못했다. 그때 키케로의 탄식이 내 귓전을 때렸다.

    “현명한 자는 평정한 마음을 지닌 채 죽지만, 우둔한 자는 그렇지 못한다.”

    ‘어떤 사람의 죽음은 태산처럼 거룩하고, 어떤 사람의 죽음은 깃털처럼 가볍다’는 사마천의 좌우명을 들먹일 필요도 없다. 자기 삶이 자기 죽음인 것을.

    누구나 자신의 죽음이 품위 있기를 바란다. 의학박사 M. 스캇 펙이 품위 있는 죽음의 조건으로 들려준 말은 이러하다. 자살이나 살해가 아닌 자연사일 것, 육체적인 통증이 없을 것, 죽음을 받아들이고 남은 이들과 화해한 뒤 작별인사를 나눌 것 등.

    촛불이 잦아들듯 삭고 삭아서 떠나는 자연사가 있는가 하면 타살, 사고사, 병사, 자살, 돌연사가 있다. 새삼스럽게 요즘 들어 다릴 앙카의 말이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보통의 죽음은 터널을 끝까지 걸어가는 것인 데 반해 자살은 거기서 도망치는 것이다.”

    피타고라스도 말했다. “신의 명령 없이 삶이라는 정류장으로부터 떠나서는 안 된다.” 우리는 안락사를 반대하고 자살을 말리고 사고사를 경계한다. 가장 품위 있는 죽음은 자연사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다릴 앙카가 말한 보통의 죽음이 바로 자연사다.

    하지만 터널을 끝까지 걸어온 사람에게 신이 떠날 것을 허락했는데도, 죽음이 여러 차례 호명했는데도 들은 척 않고 죽음을 손안에 틀어쥐고 놓지 않는 낯선 이름이 등장했다. 냉정하고 단호한 이름! 자연사에 족쇄를 채우는 그를 우리는 연명장치라 부른다.

    60대 후반의 아가다 할머니가 췌장암 수술 후 세상살이를 정리하고 요양시설에 들어왔다. 정기검진을 열심히 받던 할머니가 어느 날 진료카드를 쓰레기통에 던졌다. 그러고는 부드러운 어조와 태연한 눈빛으로 원장수녀에게 말했다.

    “쉬고 싶어요. 제 영혼이 그걸 원해요. 죽음으로부터 도망치는 일, 더 이상은 싫어요. 그냥 아프지만 않게 해주세요.”

    아이가 없어 20대 초반에 소박당한 할머니는 평생 외롭고 고달팠다. 젊은 시절 여러 번 자살 생각도 했다는 할머니는 인생이라는 터널의 마지막 지점까지 오느라 혼신의 힘을 쏟았다.

    우리는 자기 앞의 삶을 당당히 받아들인 할머니의 인내에 박수를 보냈고 연명장치를 거부한 그의 결정을 존중했다. 위루술 시술 후 식물인간 상태로 700일의 문턱을 넘어선 93세 마리아 할머니. 할머니의 삶을 행운이라고도 불운이라고도 말할 수 없는 나는 참으로 슬프다. 삶이 존엄하다면 죽음도 존엄해야 하지 않겠는가?

    죽음은 집으로 돌아가는 것

    밀알이 죽지 않으면 밀밭은 없다.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는 죽음! 죽음은 생명을 지닌 모든 것의 위대한 소명이다. 그런데 인간은 천만년, 아니 영원히 살기를 원하다. 냉동인간, 복제인간을 운운하며 육신의 영생을 꿈꾼다. 죽음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육신이 아니라 영혼이라는 사실을 외면한다.

    육신의 죽음으로 자유로워진 영혼은 어디로 가는가? 오스 기니스가 그의 저서 ‘소명’에서 한 말이다.

    “죽음은 세속적인 관점에서는 종결을 의미하지만, 영적인 관점에서는 인생의 절정이다. 우리는 평생에 걸쳐 여행을 한 다음 드디어 집으로 간다. 수십 년 동안 목소리만 들어오다가 이제는 얼굴을 보고 실체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우리를 부르신 분은 신이고, 우리의 마지막 소명은 그 부르심에 따라 떠나왔던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인간은 왜 죽음으로부터 도망치려는 것일까? 두려움, 특히 실패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란다. 무슨 실패? 허송세월에 대한 자책, 시기 질투에 대한 부끄러움, 탕진에 대한 후회…. 그건 실패도 부끄러움도 아니다. 죄는 더더욱 아니다. 삶이었을 뿐이다. 이제 우리는 지옥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날 때가 됐다. 신은 단죄하는 분이 아니라 용서하고 사랑하는 분이기 때문이다.

    죽음의 순간 삶은 완성된다. 명예로웠든 비참했든, 충만했든 부족했든, 그릇이 컸든 작았든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는 순간 죽음은 이 세상 삶을 완성의 반열에 올려놓는다. 그래서 죽음은 신비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들에게 에리히 프롬의 말을 전하고 싶다. “모든 형태의 소유에 대한 갈망, 특히 자아의 속박을 버리면 버릴수록 죽음에 대한 공포는 약해진다. 잃어버릴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이정옥 시인은 1939년에 태어나 잡지 기자로 20년간 활동하다 은퇴 후 2권의 시집과 1권의 수필집을 냈다. 1999년부터 이 시인은 65~99세 노인 69명이 살고 있는 실비노인요양시설에서 10년을 지냈다. 그 세월 동안 어떻게 하면 아름다운 노년을 보내고, 품위 있게 세상을 마무리할 수 있는지 고민했다. 신간 ‘반만 버려도 행복하다’는 그 고민의 결과물이다. 위 글은 삶의 진정한 해피엔딩이 무엇인지에 대한 이 시인의 소박하지만 진실한 성찰을 담고 있다. 등장인물들은 이름 대신 세례명으로 표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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