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91

2009.06.23

‘압구정 현대’와 이상한 회의

  • 배수강 기자 bsk@donga.com

    입력2009-06-17 10: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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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교에서도, 성당에서도, 슈퍼마켓에서도 만나는 이웃끼리 이게 뭡니까? 요즘은 집 나서기가 겁나요.”
    서울의 ‘대표 아파트’로 33년간 명성을 날린 압구정동 현대아파트의 분위기가 요즘 ‘싸~’합니다. 현 동대표 회장 신모 씨를 중심으로 한 ‘왕당파’와 이들을 불신임하는 ‘공화파’ 주민들 사이에 몸싸움까지 가는 극한 대치를 보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갈등은 지난 5월 왕당파에서 관리규약 개정을 위한 주민투표를 하면서 불거졌습니다. 동별 대표자의 임기 2년(연임 가능) 조항을 4년으로 늘리고 임원 임기도 1차 중임 제한을 삭제하는 내용을 뼈대로 한 주민투표였습니다. 왕당파의 승리, 그리고 즉각 공화파의 반발이 시작됐죠. 그들은 일련번호와 간인(間印·사잇도장)이 없는 투표용지가 나돌았고 한 가구에서 2표가 나오는 부정투표가 자행됐다며, 원천무효와 규약 원상회복을 주장했습니다. 왕당파가 찬성 투표율을 높이기 위해 경비원에게 특별상여금까지 줬다고 흥분했습니다.

    6월2일 오후 압구정동 주민자치센터 3층 회의실에서 열린 주민회의는 양측 대립의 결정판이었습니다.
    “2010년 2월 임기가 끝나는 현 회장이 규약을 바꿔 장기집권하려고 한다. 유신헌법도 아니고….” “재건축 때까지 해먹으려는 불순한 의도다.” “53%의 주민이 규약 개정에 찬성했다. 불법투표였다면 선거 책임자를 처벌해야지, 회장에게 왜 괜한 시비냐.”
    양측의 야유와 박수, ‘이놈’ ‘저놈’ 막말에 기자는 귀가 멍했습니다.

    아파트 주민인 박재승 변호사(전 민주당 공천심사위원장)가 ‘모처럼’ 마이크를 잡더군요. 그는 “무슨 이런 투표가 있느냐. 절차에 문제가 있다. 절차에 문제가 있으면 큰 문제가 생긴다”며 공화파의 손을 들어줬습니다. 회의가 끝날 무렵에는 비방전이 이어졌습니다. 상가를 헐값에 팔아넘겼다느니, 엘리베이터 내 광고 수입을 해먹었다느니 하는….

    ‘압구정 현대’와 이상한 회의
    연예인 등 유명인과 사회지도층 인사들이 많이 살아 자부심도 강하다는 ‘압구정 현대’ 주민들. 그들도 재건축을 둘러싼 이해관계 앞에선 자부심이나 이웃사촌을 생각할 겨를이 없나봅니다. 오죽했으면 관내 치안센터장이 회의실을 찾아 ‘원만한 타결’을 요청했을까요. 치안센터장은 회의 내내 1층에서 ‘유사시’에 대비했습니다.



    마침 6월10일 서울시가 재개발과 재건축, 뉴타운 사업에 공공기관이 적극 개입하는 ‘정비사업 프로세스 혁신안’을 발표했네요. 각종 정비·철거·설계·시공 업체가 이권 다툼에 끼어들면서 리베이트 등 잡음이 끊이지 않았는데 이를 공공기관이 맡아 투명성을 높이겠다는 겁니다.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압구정동 주민 여럿 나오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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