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89

2009.06.09

‘꿈’을 떠나보낸 ‘盧의 남자’ 문재인

친구로 주군으로 노무현과 27년 동고동락 … 악역에서 해결사까지 변함없는 신뢰

  • 유재영 기자 elegant@donga.com

    입력2009-06-05 10:4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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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꿈’을 떠나보낸 ‘盧의 남자’ 문재인

    분향소에서 추모객들을 맞이하는 ‘맏상제’ 문재인 전 청와대 비서실장. 씁쓸한 웃음 뒤에 형용할 수 없는 슬픔이 비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최측근인 문재인 전 청와대 비서실장을 잘 안다는 법조인은 ‘봉화산 비극’ 직후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조용필의 ‘친구여’를 읊조리며 이 노래를 아느냐고 물었다. 이 법조인은 문 전 실장과 경희대 법학과 동문이다.

    “서거하신 다음 날 차에서 이 노래가 흘러나오는데, 문득 ‘문변’(변호사인 문 전 실장을 지칭) 생각이 나는 겁니다. 노래 속의 화자(話者)와 딱 들어맞는 것 같지 않나요? 문변은 사석에서 노 전 대통령을 자신의 꿈이자 친구라고 자주 말했다고 들었어요. 앞으로 고인이 계신 구름을 따라 내일을 꿈꾸는 대신 추억만 회상하게 될 텐데….”

    문 전 실장은 ‘노무현 청와대’에서 ‘왕(王)수석’ ‘군기반장’으로 통했다. 두 사람은 27년 전 부산에서 선후배 변호사로 만나 동업한 이후 각각 대통령과 비서실장으로 새로운 인연을 맺었고, 화창한 5월의 토요일 운명이 갈라놓을 때까지 떨어진 적이 없다. 노 전 대통령이 유서에 남긴 의미심장한 말처럼 두 사람은 서로에게 ‘운명’이었다.

    노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알리기 직전까지 애써 차분함을 유지하던 문 전 실장은 결국 마이크를 입에 대기 전 ‘주군’과의 운명이 다했음을 직감했는지 브리핑 쪽지를 쥔 손을 떨며 말을 잇지 못했다. 아마 그는 노 전 대통령을 처음 만났을 때의 호칭을 가슴속으로 되뇌었을 것이다.

    “노변….”



    ‘주마감편’, 방패막이, ‘또 다른 노무현’

    문 전 실장은 노무현 정부에서 청와대 민정수석을 두 차례, 그리고 시민사회수석과 비서실장을 한 차례씩 맡았다. 대통령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보필하는 직책들이다. 인사 배경은 누구보다 확실했다. 노 전 대통령과 20년 넘게 동지 관계를 맺어온 것만으로도 설명은 충분했다. 노 전 대통령은 특히 문 전 실장의 원칙적이고 강직한 성격과 성실한 일처리 능력을 높이 샀다. 부산지역 정치권 인사들 사이에선 “서류 작성은 물론 법원에 가서 서류 제출하는 것까지 직접 챙기던 노 전 대통령의 업무 스타일을 오랫동안 지켜보면서 문 전 실장이 노 전 대통령을 넘어서는 내공을 쌓았을 것”이라는 말이 나왔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박연차 게이트’로 노 전 대통령의 수많은 측근이 자금수수 의혹에 휩쓸리거나 사법처리되는 와중에도 노 전 대통령과 그처럼 긴밀한 친분을 맺어온 문 전 실장의 이름이 한 차례도 언급된 적 없다는 점이다. 이 또한 모시는 분에게 눈곱만큼이라도 누가 될 만한 일은 하지 않는다는, 그의 ‘원칙적’이고 ‘강직한’ 성격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박연차 게이트 수사과정에서 사실상 노 전 대통령의 대리인을 자임해온 그는 노 전 대통령이 서거한 뒤에는 ‘봉하마을 대변인’ 노릇은 물론, 경황이 없는 가족을 대신해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노 전 대통령의 빈소를 찾은 여권 인사들이 봉변을 당하고, 이명박 대통령이 보낸 조화가 훼손되는 등 불미스런 상황이 빚어지자 앞장서서 이를 뜯어말리며 자제를 호소한 사람도 그다.

    ‘꿈’을 떠나보낸 ‘盧의 남자’ 문재인

    노무현 전 대통령과 문재인 전 청와대 비서실장은 눈빛만 봐도 서로를 이해하는 ‘꿈’이자 ‘친구’ 사이였다.

    문 전 실장은 노 전 대통령이 코너에 몰릴 때마다, 혹은 조언이 필요할 때마다 방패막이와 해결사가 되고, ‘또 다른 노무현’이 됐다. 간혹 업무 영역을 넘나드는 행보로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불구덩이로 뛰어들었다. 노 정부 초기에 대통령 측근 비리, 부산고속철 노선 변경, 보길도 댐 건설 논란, 한총련 합법화 및 교육행정정보시스템 논란 등 굵직굵직한 갈등이 터질 때마다 중재와 진화에 나선 사람은 다름 아닌 문 전 실장이다.

    그렇다고 무작정 대통령을 싸고돈 것은 아니다. 전 청와대 관계자는 문 전 실장이 “대통령 앞에서 조용히 ‘노(No)’라고 쓴소리를 할 수 있는 직언자”라고 했다. 개혁 의지에 충만한 대통령이 속도를 지나치게 낼 경우 그것을 제어하는 ‘주마감편(走馬減鞭)’의 악역을 맡은 것도 그였다고 한다.

    “노통에게 두 가지 빚을 졌다”

    노 전 대통령도 문 전 실장 앞에선 그 유별난 자존심을 내세우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국가정보원 등 정부부처 간부급 인사를 놓고 청와대 내에서 의견충돌이 일어날 경우 문 전 실장의 ‘원칙’을 상당 부분 반영했다는 것. 노 정부 초기에 민정수석인 그가 “대통령 측근에 속한 사람 중 소문 차원의 좋지 않은 정보와 관련된 이가 있다”고 말해 대통령 측근 비리 수사의 시발점이 됐고, 2006년 5월 지방선거를 앞두고는 “부산 시민들이 (우리를) 왜 부산정권으로 받아들이지 않는지 이해가 안 된다”고 했다가 열린우리당으로부터 선거 참패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비난을 받았지만 대통령은 그에게 변함없는 신뢰를 보냈다.

    노 전 대통령은 사석은 물론 공식적인 자리에서도 문 전 실장 얘기가 나오면 “술잔을 기울이면서 심경을 토로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사람을 무척 가려서 만난다는 노 전 대통령 입에서 ‘평생지기’라는 말도 자주 나왔다고 한다. 노 전 대통령은 문 전 실장보다 일곱 살 많고 사법시험도 5기수 선배지만, “노무현 친구 문재인이 아니라 문재인 친구 노무현”이라며 돈독한 우애를 드러냈다.

    이처럼 노 전 대통령의 총애를 받았지만 문 전 실장은 자신을 돋보이지 않게 하려고 자제했다. 청와대에 들어간 뒤에는 술을 끊고 인맥이나 지연, 학연을 노출하지 않고 몸을 낮췄다. 괜한 스캔들 때문에 ‘주군’의 국정 운영에 방해가 돼서는 안 된다는 판단에서였다. 문 전 실장이 민정수석이 되면서 일부 검찰 인사들이 문 전 실장과 동기인 사법시험 22회 인사들과 접촉해 다리를 놓아보려 했지만 “도저히 라인이 드러나지 않아 포기했다”는 일화도 있다. 문 전 실장이 청와대에 입성한 뒤 경희대 법대 동문이 축하연을 열었는데 문 전 실장이 인사만 하고 자리를 뜨는 바람에 동문들이 주인공 없이 밥만 먹고 일어섰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문 전 실장은 노무현 청와대의 첫 민정수석 제의를 받아들이면서 노 전 대통령에 대한 ‘빚 청산’ 얘기를 꺼냈다. 1988년 노 전 대통령의 정치권 입문을 자신이 적극 권유한지라 힘겨운 정치무대에 발을 들이게 한 미안함을 갚고자 노 전 대통령을 보좌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 이후 문 전 실장은 또 한 가지 빚을 졌다고 한다. 노 전 대통령은 줄기차게 그를 주요 보직 혹은 지방선거 무대에 기용하려 했다. 민정수석과 비서실장 자리를 그에게 내줬고, 법무부 장관에 앉히려고도 했다. 또한 지방선거와 재보궐 선거가 있을 때마다 부산지역 출마를 권유했다. 그러나 문 전 실장은 “다음 자리를 고민하다 보면 여러 가지를 고려하게 되고, 결국 사심이 개입한다”는 이유로 노 전 대통령의 제안을 거절했다. “크게 정치력을 요구하지 않고 원리원칙대로만 하는 일, 개혁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하겠다”는 청와대 입성 때의 초심을 그대로 지켰다. 하지만 자신을 그토록 배려한 노 전 대통령의 바람을 들어주지 못한 것은 고스란히 빚으로 남았다는 것.

    문 전 실장은 ‘빚’을 갚기 위해서뿐 아니라 대통령이 외로울 것 같아서 청와대로 오게 됐다는 말도 했다. 6년이 지난 지금, 그는 그 빚을 제대로 갚지 못한 데다 노 전 대통령을 외롭게 홀로 세상을 떠나게 해 큰 충격에 빠졌다고 한다. 친노(親盧), 반노(反盧)를 불문하고 수많은 사람이 노 전 대통령을 추모고자 봉하마을과 전국 각지의 분향소로 모여들고 있다. 그렇지만 노 전 대통령의 죽음을 가장 슬퍼하는 사람은 문 전 실장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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