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89

2009.06.09

‘제왕적 대통령제’ 의 저주

입법·사법·행정 3권 융합의 중심에 선 권력 … 퇴임 후 비참한 운명 되풀이

  • 강원택 숭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kangwt@ssu.ac.kr

    입력2009-06-05 10:3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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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왕적 대통령제’ 의 저주

    <b>1</b>노태우 전 대통령. <b>2</b>전두환 전 대통령. <b>3</b>홍인길 전 대통령비서실 총무수석.<b>4</b> 김영삼 전 대통령 차남 김현철 씨. <b>5</b>임동원 전 국정원장. <b>6</b>박지원 전 대통령비서실장. <b>7</b> 이광재 전 의원. <b>8</b> 강금원 창신섬유 회장.

    노무현 전 대통령의 급작스러운 서거는 우리 정치의 현주소, 특히 대통령이라는 자리가 갖는 구조적 한계와 문제점을 돌아보게 한다. 대한민국 대통령치고 퇴임 이후 무사한 경우는 없었다. 현직에서 물러나면 후임 권력에 의해 예외 없이 조사받고 처벌을 감수해야 했다.

    노태우 대통령은 전두환 전 대통령을 백담사로 보냈고 김영삼 대통령은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5·18 민주화운동 진압 등의 책임을 물어 감옥에 보냈다. 김대중 정부는 외환위기 이후 한보철강, 기아자동차 비리와 관련해 홍인길 전 대통령비서실 총무수석 등 김영삼 전 대통령의 측근을 법정에 세웠다.

    노무현 정부 역시 대북 불법송금 사건과 관련해 박지원 전 대통령비서실장, 임동원 전 국정원장 등 김대중 전 대통령의 측근들을 구속했다. 물론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은 군사정권 시대의 유산을 청산한다는 역사적 의미가 있다는 점에서 민주화 이후의 대통령들과 같은 차원에서 평가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왜 이런 일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것일까. 세 가지 원인을 생각해볼 수 있다.

    첫째, 정치적 경쟁자에 대한 보복 차원이다. 노 전 대통령 수사는 진보세력에 대한 보수권력의 정치 보복이었다는 세간의 평가가 하나의 예다.

    둘째, 차별성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전임 대통령 흠집 내기로 현 정부와의 차별성을 부각하고, 현 정부의 노선과 정책이 올바르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다. 즉, 현재의 권력은 과거 권력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김대중 정부에서의 한보철강, 기아자동차 처리는 이런 의미가 강한 것으로 보인다.



    ‘관용의 정치’ 통치체제 근본적 변화 논의 필요

    이 두 원인은 우리나라의 정치문화와 관련돼 있다. 후임자의 ‘전임 대통령 때리기’라는 나쁜 관행을 끊기 위해서는 관용의 정치라는 새로운 정치문화를 만들어낼 필요가 있다. 이번 노 전 대통령 사건은 이를 위한 매우 중요한 계기를 마련했다.

    세 번째이자 가장 중요한 원인은 구조적이고 제도적인 것으로, 인식 전환이나 새로운 정치문화 확립으로도 쉽게 해결하기 어려울 듯하다. ‘전임 대통령 때리기’가 가능한 근본적인 이유는 우리나라 대통령이 너무 막강한 권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권력이 대통령 1인에게 집중되다 보니, 특정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지연이나 혈연 등을 이용해 대통령 혹은 대통령의 가족, 측근 등 그 주변에 접근하려 들고, 이 과정에서 금품 제공 같은 불법이 개입될 여지가 생겨난다. 이런 상황에서는 깨끗하고 공정하게 업무를 수행하려는 대통령이라고 해도 그 덫에서 쉽게 헤어나기 어려우며, 후임 권력은 이러한 ‘약점’을 정치적으로 최대한 활용할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대통령의 막강한 권력은 왜 줄어들지 않을까. 민주화 이후 20여 년이 흘렀고 그동안 이른바 ‘제왕적 대통령’의 폐단을 막기 위한 많은 노력이 있었다. 특히 노 전 대통령은 탈권위주의 정치 개혁을 부르짖으며 대통령에 당선됐고 당정 분리, 권력기관의 자율성 증대 등 가시적 성과를 거두려 노력했지만 그 역시 ‘덫’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미국에서 탄생한 대통령제의 가장 중요한 운영 원리는 권력 분산이다. 잘 알려진 ‘견제와 균형’이 핵심 가치로, 입법·행정·사법 권력이 각기 독립성을 갖고 서로를 견제하는 가운데 전체적인 정치 체제가 힘의 균형을 이루는 것이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은 힘이 한 곳에 집중되는 상황을 개인의 자유나 재산권 보호에 가장 위험한 요소로 봤다. 따라서 철저한 힘의 분산을 추구했다. 3권 분립뿐 아니라 동일한 권한을 갖는 상원과 하원의 분리, 연방정부와 주 정부의 권한 분리 등 여러 차원에서 권력 분산의 체제를 만든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대통령제는 형식상 3권 분립돼 있지만 실제로는 대통령 1인에게 모든 권한이 집중된다. 무엇보다 입법부의 자율성이 보장되지 않는다. 여당 의원들이 대통령의 ‘통제’를 받기 때문이다. 제도적으로야 입법과 행정이 분리됐다고 하지만, 대통령은 실질적인 여당의 지도자이며, 여당의 법안 처리와 관련된 최종 결정권을 행사한다. 대통령이 결정한 사안을 여당의 개별 국회의원이 공개적으로 저항하기는 어렵다.

    잘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그동안 대통령은 여러 선거의 공천 과정에도 개입했다. 그래서 국회를 여당이 장악하면 입법부는 사실상 대통령의 수중에 들어간다. 입법과 행정의 분리가 아니라, 입법과 행정의 융합인 것이다.

    여기에 사법부가 (촛불집회의 경우처럼) 정치적으로 예민한 사안에 대해 대통령의 눈치를 보면 대통령은 3권 융합의 중심에 놓이게 된다. 그럼 특정 이해관계를 좇는 무리는 대통령과 그 주변에 접근하고 싶어한다. 막강 권력을 가진 대통령 주변에 접근할 수만 있다면 손쉽게 원하는 결정을 얻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구조가 어떤 대통령도, 그리고 그의 가족이나 측근도 퇴임 후 드러나게 되는 불법 거래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만들고 있다. 이처럼 노 전 대통령 사건은 정치적 관용이 허용되지 않는 정치문화의 문제점뿐 아니라 여전히 ‘제왕적’인 대통령제의 문제점을 낱낱이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우리나라 통치체제의 근본적 변화를 위한 진지한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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