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89

2009.06.09

살아남은 자들, 애증의 상징을 잃다

혼란·상실감 원인을 ‘밖’에서 찾는 보복심리로 이어지기도

  • 하지현 건국대 의대 교수·정신과 jhnha@naver.com

    입력2009-06-05 10: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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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아남은 자들, 애증의 상징을 잃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영결식이 열린 5월29일 서울 시청앞 광장에서 영결식 장면을 바라보던 한 추모객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

    늦은 봄날 토요일 아침의 나른한 여유와 상쾌함은 한 줄의 속보로 산산이 부서졌다. ‘노무현 전 대통령 사망’. 처음 포털사이트의 뉴스 제목만 접하고는 그가 정치적으로 ‘사망선고’를 받았다는 내용인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그가 정말 죽었다. 몇십 분 지나지 않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내 휴대전화는 불이 나기 시작했다. 기자들은 왜 그가 죽음을 택했는지 물어댔다. 그를 직접 만나본 적 없는 내가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었을까.

    살아서 남겨진 이들은 궁금함을 참지 못한다. 해결되지 않으면 머릿속이 근질거리고 혼란스럽다. 예측하지 못한, 아니 막연하게 추측했더라도 ‘설마’ 하던 일이 실제 벌어지자 그를 지지하던 사람들도, 공격하던 사람들도 패닉에 빠지기는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왜’에 집착한다.

    그러나 대개 ‘왜’에 대한 정답은 결국 자기 마음속의 무의식적 환상과 바람을 투사한 것일 뿐이다. 남겨진 자들이 세워주는 묘비명은 먼저 간 자에게 자신들이 바라는 모습을 반영한다. 우리는 스스로의 마음속에 가버린 사람에 대한 묘비를 만들어 세운다. 그러나 매우 주관적인 묘비명이 있을 뿐, 객관적이고 실제적인 이유를 우리는 영원히 알 수 없다.

    누가 마릴린 먼로를 죽였나



    1962년 8월5일 여배우 마릴린 먼로가 자택에서 시체로 발견됐다. 자살로 추정될 뿐, 4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의 죽음에 이견이 분분하다. 이렇게 대중의 사랑을 받던 사람이 갑자기 떠나면 남겨진 사람들은 반복해서 이유를 찾고 싶어 한다.

    그래야 안심이 되고 떠나보낼 명분이 생기니까. 한편으로 지금 와서 그걸 아는 것, 진실을 밝혀낸다는 것이 무슨 명분과 의미가 있겠는가 하는 생각도 든다. 초등학생에게 수학계의 난제인 ‘리만의 가설’을 풀라는 것이나 진배없는 일일지도 모르니까.

    그러니 문제를 받아든 사람은 패닉에 빠진다. 그것도 각기 다른 방향으로 말이다. 그를 지지하고 사랑하던 사람들은 심한 상실감에 따른 공황에 빠졌다. 비록 퇴임 후 최근의 수사과정에서 그에게 실망을 느낀 사람도 많았지만. 이런 그의 극단적 선택은 그와 함께 2002년 변화의 꿈을 꿨던 많은 이의 ‘아름다운 기억’을 산산이 부순 꼴이 됐다. 노무현 한 사람의 사라짐이 아니라 민주화와 변혁이라는 수십 년간의 상징이 허망하게 사라져버린 셈이기 때문이다.

    대중은 어렵지 않게 한 리더의 문제점을 발견하고 그를 부정한다. 그리고 부정과 대안의 모색 과정을 통해 나와 리더의 거리를 확인하고, 집단 속에서 개인 정체성을 강화하게 된다. 그러나 정서적 끈으로 연결돼 있다고 믿던 리더가 갑자기, 또 이유 없이 사라질 때는 다르다.

    살아남은 자들, 애증의 상징을 잃다

    경남 김해시 봉하마을 빈소를 찾은 조문객들이 슬픔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애증의 아이콘’이던 노 전 대통령의 자살에 많은 이들은 정신적 충격을 받았다.

    리더는 그를 지지하는 집단 구성원들에게 공유할 가치와 판단기준을 제공한다. 그런데 대체할 대상이 없거나, 아직 충분히 내재화하지 않을 때 리더를 잃어버린 구성원은 가치체계와 판단기준의 일부를 잃는 경험을 한다. 게다가 그에게 애정이 있었다면? 그 상실감은 더욱 커질 것이다.

    노 전 대통령만큼 애증이 극단적으로 교차하는 이도 없을 것이다.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그러한 감정의 편차는 컸으니 말이다. 자기 기사 하단에 달리는 ‘악플’보다 아무 반응 없는 ‘무플’이 더 두렵다는 연예인들의 말처럼 실망 또한 감정의 한 형태이므로 노 전 대통령과 대중의 ‘감정의 끈’은 단단히 엮여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은 불편함과 괴로움이 생기면 원인을 찾아 없애면 될 것이라 여긴다. 그리고 이왕이면 자기 밖에서 원인을 찾는다. 지금 지지자들이 ‘누가 노무현을 죽였는가’라는 ‘원죄’를 묻고 따지려는 시도가 바로 그런 예이다. 사람들은 분명한 원인과 해명을 듣고 그에 따라 납득할 만한 보복을 취하지 않으면 이 상황을 용인하기 어렵다고 여긴다. 왜냐하면 노무현 당사자가 아니라 그를 지지하던 사람 하나하나의 삶의 상처와 좌절이 이번 일로 역류해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열망은 과도하리만큼 강렬하고, 이성의 탈을 썼지만 감정적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그를 싫어하고 비판하던 사람들도 허탈해하기는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왜 그럴까. 나쁘게 말해서 앓던 이가 쏙 빠진 것처럼 느낄 수도 있을 텐데 말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설명이 가능하다. 첫째는 무의식적 공격성이 현실화한 것에 대한 죄의식이다. 만나면 늘 다투는 친구가 있다. 그 친구의 뒤통수에 대고 속으로 ‘교통사고나 나라’고 저주했다. 그런데 다음 날 친구가 결석해서 알아보니 실제 교통사고가 났다는 것이다. 자기가 차도로 등을 떠민 것이 아님에도 그런 생각을 했던 게 자책과 죄의식의 원인이 된다. 지금 사람들의 심정이 그럴지 모른다.

    두 번째는 대차게 맞받아치며 싸워주던 라이벌의 상실이다. 김연아 선수는 “아사다 마오가 없었다면 이렇게 열심히 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펠프스가 없는 박태환은 어떨까? 주적이 없는 군대는? 그를 비판하던 사람들의 지금 심리가 이럴 것이다. 늘 평행선을 그으며 대립해오던 두 집단이 있다. 평행선을 그으려면 건너편의 선을 끊임없이 보면서 자기 방향성을 다잡아줘야 한다. 그런데 반대쪽 선이 없어진다면? 남은 선에도 균형이 깨져 방향을 잃고 헤맬 수 있다.

    이렇게 어느 한쪽도 평온하지 않다. 원죄를 묻는 한 집단과, 다소간의 죄의식에 경계심을 보이는 다른 집단의 골은 갈수록 깊어진다. 복수는 복수를 낳을 수 있고, 감정에 휩싸여 사회는 분열의 위험에 빠진다.

    인디언의 지혜 “이제 도끼를 땅에 묻자”

    ‘이제 손도끼를 땅에 묻자(Let’s bury the hatchet)’. ‘이제 화해하자’는 뜻의 미국 속담이다. 옛 북미 인디언들은 한쪽이 죽을 때까지 결투를 벌였다고 한다. 이 싸움은 승부가 나더라도 양쪽 모두에게 큰 상처를 입힌다. 이런 게임의 위험을 알기에 진짜 결투에 들어가기보다 당시 무기로 쓰인 손도끼를 묻어버리자고 화해를 제안하는 것이다.

    지금 상황에 대한 해법 역시 인디언의 지혜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두 집단 모두 명분이 있다. 이대로 가면 제로섬 게임이 된다. 피는 피를 부를 수밖에 없다. 어느 한쪽이 죽으면 다른 한쪽은 최소 중상이고, 상처가 아물어도 나쁜 기억은 사라지지 않는다. 따라서 지금은 어느 한쪽에 과실이 있다며 잘잘못을 가릴 시점이 아니다.

    노 전 대통령이 우리에게 던져준 숙제가 있다. 그런데 그 문제를 양쪽 모두 자기 식대로 해석하려 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그가 사회에 던진 숙제를 함께 읽고 풀어내려는 화해의 노력이다. 그런 능동적 노력만이 국가 지도자가 우리에게 던진 마지막 승부수이며 화두인 이 숙제를 슬기롭게 풀어내는 방법이다. 또 이것은 덧없는 상실감에서 회복될 수 있는 가장 빠르고 효과적인 방법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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