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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VER STORY | 노무현을 보낸다 10

낙엽은 가을에 떨어져야 하거늘…

유학(儒學)자의 노 전 대통령 유서 분석 … ‘생사일여(生死一如)’ 심오한 뜻 왜곡

낙엽은 가을에 떨어져야 하거늘…

낙엽은 가을에 떨어져야 하거늘…

1919년 3월 덕수궁 대한문 앞을 떠나는 고종의 국상행렬.

한국인은 숭고하고 거룩한 민족이다. 한국인은 마음이 따뜻하다. 오랜 역사를 통해 한국인은 이웃 나라를 침략하거나 괴롭힌 적이 없다. 그래서 고대로부터 중국인들은 한국을 ‘군자(君子)의 나라’로 불렀다.

한국인은 남의 잘못을 잘 용서한다. 특히 그가 죽은 뒤에는 동정을 하고 애도한다. 이는 임금에 대해서도 예외가 아니다. 신라를 망하게 한 마지막 임금도 죽은 뒤에는 ‘경건하고 순조로운 임금’이란 뜻에서 경순왕(敬順王)이라 불렀고, 고려의 마지막 임금은 ‘공경스럽고 사양을 잘하는 임금’이란 뜻에서 공양왕(恭讓王)이라 불렀으며, 조선의 마지막 임금도 고상하다는 의미의 고종(高宗), 순수하다는 의미의 순종(純宗)으로 불렀다.

이렇게 시호를 붙이는 것은 중국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주나라를 망하게 한 마지막 임금은 ‘부끄러워 얼굴이 빨갛게 됐다’는 의미로 난왕(王)이라 했고, 노나라를 망친 마지막 임금은 슬픈 일을 저질렀다는 의미로 애공(哀公)이라 불렀다. 또 답답하게 정치한 임금을 유왕(幽王), 사납게 정치한 임금을 여왕(王)으로 불렀다. 이러한 차이점을 보면 사실을 사실대로 표현하는 중국인은 냉철하지만, 생전에 잘못이 있더라도 죽은 뒤에는 용서하고 아름답게 표현하는 한국인은 마음이 따뜻함을 알 수 있다.

‘삶=죽음’ 기계적 이해 절대 금물

지금 한국에서는 노무현 전 대통령을 애도하고 추모하는 물결이 전국을 휩쓸고 있다. 그의 잘잘못이나 죽음의 경위가 어떠했는지를 따지는 냉철함보다 동정심이 먼저 발휘되는 한국인의 마음이 여실히 드러나는 장면이다. 참으로 감동적이다.



그러나 최근 우리나라에서 일어나는 염려스러운 일들을 생각하면 감동만 하고 있을 수가 없다. 그중에서도 매우 염려스러운 것이 자살이 많다는 사실이다. 한국인의 자살률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에서 1위를 차지한다.

한국인들은 예부터 죽음 앞에서 초연했다. 살고 죽는 것을 다른 것으로 보지 않았다. 고향에서 타향으로 왔다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 정도로 봤다. 그렇다면 삶과 죽음이 다른 것이 아니라는 ‘생사일여(生死一如)’의 사상이 쉽게 자살할 수 있는 이론적 바탕이 되지 않을까?

형식논리로만 보면 그렇게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삶과 죽음이 다르지 않다는 것은 ‘삶=죽음’이라는 기계적인 등식이 아니다. 여기에는 심오한 뜻이 담겨 있다.

봄이 되면 마른나무에서 새잎이 나고, 여름이 되면 무성하게 뻗어 탄소동화작용을 하다가 가을이 되면 단풍이 들어 땅으로 떨어진다. 이러한 자연현상에서 보면 땅으로 떨어지는 낙엽은 죽음을 맞이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나무 전체의 처지에서 보면 가을에 낙엽이 지는 것은 삶의 한 방식이다. 가을에 단풍이 들지 않고 떨어지지 않는다면 그 나무는 살 수 없다. 나뭇잎과 나무가 별개라면 나무의 삶을 위해 나뭇잎이 죽는 게 되지만, 나뭇잎과 나무는 별개의 것이 아니라 하나다. 그렇기 때문에 가을에 떨어지는 나뭇잎은 죽는 것이 아니라 사는 것이다. 죽음과 삶이 하나라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다. 그러므로 늦가을에 떨어지는 낙엽은 슬픈 것이 아니다. 할 일을 마친 뒤 떨어지는 것이다.

사람의 삶도 이와 같다. 할 일을 다 마치고 죽는 것은 슬픈 일이 아니다. 참다운 삶이고 충실한 삶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죽음을 사람들은 잘 마쳤다는 의미로 ‘졸(卒)’이라 한다. 죽음을 높여 부르는 말이다.

그러나 나뭇잎이 떨어지는 게 다 같은 것은 아니다. 봄이나 여름에 떨어지는 나뭇잎이 있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그 나뭇잎은 할 일을 다 하고 떨어지는 게 아니다. 그 나뭇잎의 떨어짐은 나무 전체의 삶을 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나무의 삶을 훼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렇게 떨어지는 나뭇잎은 생사일여가 아니다.

사람의 죽음도 이와 같다. 할 일을 다 하지 못하고 죽거나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면서 죽는 것은 생사일여가 아니다. 그러한 죽음은 졸(卒)이라 하지 않고 ‘폐(斃)’라 한다. 자살은 바로 여기에 해당한다. 자살은 자신의 삶을 망치고 다른 사람과 사회에 해악을 끼친다. 자살하는 풍조가 만연하면 사회는 황폐해진다.

봄이나 여름에 떨어지는 나뭇잎이라고 해서 다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것이 나무 전체의 삶을 위하는 것이라면 헛된 게 아니다. 그것은 죽음이 아니고 삶이다. 이순신 장군의 죽음이 그러하고 의병들의 죽음이 그러하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개인적인 고충이 얼마나 컸으면 그랬을까. 애석한 일이다. 애도의 마음을 금할 수 없다.

‘졸(卒)’과 ‘폐(斃)’의 차이

그러나 애도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대통령을 지낸 사람에게는 그에 상응하는 책임과 역할이 있게 마련이다. 대통령은 국민이 쳐다보고 따르는 사람이다. ‘대학’에 “임금이 어질면 온 백성이 어질어지고, 임금이 난폭하면 온 백성이 난폭해진다”는 말이 있다. 백성에게 미치는 임금의 영향이 그만큼 크다는 것을 뜻한다. 오늘날의 대통령도 예외가 아니다. 대통령이 거짓말을 하면 온 국민이 따라서 거짓말하고, 대통령이 경솔하면 온 국민이 경솔해진다. 그렇기에 대통령은 한 개인의 차원에서 바라보면 안 된다.

작금의 한국인 자살률을 놓고 많은 사람이 걱정하고 있다. 그 원인을 분석하고 대책 마련에 고심하는 사람이 많다. 한국인이 자살을 많이 하는 원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자존심이 강한 한국인이기에 자존심에 상처가 나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것도 하나의 원인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원인은 생사일여의 뜻이 왜곡돼 형식논리에 빠지는 데 있는 게 아닌가 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삶과 죽음이 자연의 한 조각’이라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했다. 아무리 봐도 생사일여의 뜻이 왜곡된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사실이 자살 풍조가 만연해지는 우리 사회에 기름을 붓는 형국이 되는 것은 아닌지 염려스럽다. 위기에 직면할 때마다 슬기롭게 극복한 우리 민족의 지혜가 필요한 때다.



주간동아 2009.06.09 689호 (p36~37)

  • 이기동 성균관대 유학동양학부 교수 kdyi020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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