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89

2009.06.09

‘조갑제’는 가라, ‘노사모’도 가라

서푼어치 이데올로기로 그의 죽음을 이용하지 마라!

  • 서병훈 숭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입력2009-06-05 10: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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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갑제’는 가라, ‘노사모’도 가라

    촛불을 든 시민은 순수하게 추모를 위해 모였을 따름이다. 정치세력이 그들을 이용하는 게 문제다.

    ‘바보 노무현’은 우리 앞에 혜성처럼 나타났다가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망연자실, 이 와중에 ‘자유론’을 다시 들춰본다. 영국의 사상가 존 스튜어트 밀이 쓴 이 책은 올해로 출간 150년을 맞는다. ‘까마득한’ 옛날에 자유의 본질과 원리에 대해 그토록 깊은 천착을 거듭했다는 것이 놀라울 정도다. 진화론을 담은 다윈의 ‘종의 기원’도 같은 해에 나왔다. 사람의 ‘영과 육’을 뒤흔든 두 책이 비슷한 시기 출판됐다는 것이 그저 우연 같지는 않다.

    ‘자유론’은 ‘차이’의 소중함을 강조한다. 남의 비판을 겸허히 수용할 것을 권면한다. 왜 그럴까. 사람은 누구나 부족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잘난 사람이라도 무엇이 진리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어떻게 해야 진리를 얻을 수 있는가. 자유주의 사상의 대가 밀은 ‘자신에 대한 반대의견이나 듣기 싫은 소리를 피하기보다 자청해서 듣는 것’이 그 지름길이라고 역설한다. 다른 사람의 생각과 자신의 생각을 비교하고 대조하면서, 틀린 것은 고치고 부족한 것은 보충하는 일을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밀은 자기와 생각이 다르다고 타인에게 침묵을 강요하면, 그것은 ‘현세대는 물론 미래의 인류에게까지 강도질하는 것과 같은 셈’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그는 특히 소수파나 비주류의 사회적 입지를 넓히는 문제에 관심을 기울였다. 이 시점에서 우리가 밀의 ‘자유론’을 읽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서로에게 귀 막은, 너무 똑 닮은 좌우

    노무현 전 대통령은 어쩌면 한국 사회의 갖가지 부조리를 속 시원히 처결할 마지막 적임자였는지도 모른다. 많은 사람이 그런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노무현은 논란과 대립만 증폭시킨 채 허망하게 떠나버렸다. 밀의 ‘자유론’은 노무현을 받아들이기는커녕 비웃고 능멸하기까지 한 한국 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가슴 저리게 비쳐준다. 그를 ‘박해’했던 우리의 추악한 현실을 질타한다. ‘나와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해야 한국 민주주의가 살 수 있다는 뼈아픈 교훈을 던져준다.



    ‘노무현’은 한마디로 ‘비주류’의 상징이요, 그 토대였다. 그가 오랜 세월 우리 사회를 규정해온 특정 역사관에 대해 관성적 추종을 거부했다고 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 그는 이른바 ‘힘 있고 돈 많고, 그래서 잘난’ 사람들에게 ‘어깃장’을 놓으려 했다. 이 ‘거역(拒逆)’의 정치사적 의미도 결코 작지 않다.

    그러나 우리가 그를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될 결정적인 이유는 역시 그가 ‘바보’를 자임했다는 데 있다. 노무현은 영악한 시류에 온몸으로 저항했고 이것이 많은 사람의 심금을 울렸다. 약삭빠른 사람들로서는 이해가 안 되는 일이지만, 노무현은 바로 이런 정치적 자산 때문에 대통령이 될 수 있었다. 돌아가는 것이 빠른 길이고, 놓아야 얻을 수 있으며, 정도를 걸어야 끝내 이길 수 있다는 만고의 진리를 이처럼 화끈하게 증명해준 정치인이 또 있던가.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의 ‘바보 됨’에 박수를 보냈던가.

    그러나 우리 사회의 주류는 이런 노무현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대통령으로 인정하지도 않았다. 그의 ‘비상식적 언행’을 비판하며 ‘나라의 품격’ 운운했지만, 이면에는 구겨진 그들의 자존심이 자리잡고 있었다. ‘상고 출신’이 그들의 우두머리가 된다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혹시 닥칠지 모르는 기득권 박탈에 대한 공포심도 발동했다. 그래서 시도 때도 없이 ‘노무현’을 흔들었다. 정치적 내상(內傷)이 깊어가면서 일찌감치 레임덕이 왔다. 이것이 또 다른 비판과 힐난의 빌미가 됐다.

    물론 그의 책임이 컸다. 무엇보다 최고 지도자로서의 여유와 도량을 보여주지 못했다. 정치력도 모자랐다. 이것은 부인할 수가 없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사회가 생각의 차이를 수용하지 못하고 관점의 차이를 용인하지 못했다는 엄연한 사실이 지워지는 것은 아니다. 합법적 절차에 따라 취임한 대통령이라면 정파나 이데올로기와 상관없이 일단 ‘우리 모두’의 대통령이어야 한다. 정해진 임기 동안 그 정치적 권위를 존중하는 미덕을 보여줘야 한다. 그래야 민주주의가 작동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의 주류는 이 기본 틀을 파괴했다. ‘노무현’을 시종일관 부정했다. 탄핵국면으로 몰기까지 했다. 그 결과는 금세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 이쪽이 하는데 저쪽이라고 왜 못하겠는가. 지난해 촛불시위 때, 이명박 정권 퇴진 구호가 연발했다. 취임한 지 몇 달이라고 벌써 물러나라니, 도대체 말이 되는 것인가. 어제 오늘 전국 각지의 분향소에는 현직 대통령에 대한 욕지거리가 만발한다. 대통령은 있어도 대통령의 권위에 대한 존중은 찾아볼 수가 없다. 한국 사회 어디에도 ‘우리 대통령’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비극이 과연 일과성에 그칠까? 무서운 예단이지만, 그렇지 않을 것이다. ‘노무현 흔들기’가 그 원죄의 중심에 있다면 지나친 말일까.

    그러나 ‘조갑제’나 ‘김동길’만이 아니다. 그들의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도 똑같다. 겉으로 떠도는 말은 다를지 몰라도 내면의 의식구조는 놀라울 만큼 닮았다. 민주주의를 욕되게 하고 자유를 고사시키는 일에 톡톡히 일조하고 있다. 이것이 문제다. 한국 사회의 좌파나 진보세력, 특히 ‘노사모’도 밀의 ‘자유론’을 허심탄회하게 읽어야 한다. 노무현의 죽음 앞에서 분해서 견딜 수 없다면, 그럴수록 더 ‘자유론’과 대면해야 한다.

    반론을 들어라, ‘자유론’을 읽어라!

    밀은 안정을 추구하는 정당과 개혁을 추구하는 정당 둘 다 있는 것이 정치 발전에 필수적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명백한 상식’이라고 단정한다. 왜 그럴까. 상반된 인식 틀은 각기 상대방이 지닌 한계 때문에 존재이유가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바로 상대편이 존재하기 때문에 양쪽 모두가 건강한 정신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는 점이다. 비판 듣기를 두려워하지 말고, 오히려 찾아나서야 한다는 주장과 맥락을 같이하는 것이다.

    한국의 ‘노사모’는 자신과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들에게 걸핏하면 ‘보수꼴통’이라고 조롱하며 공격한다. ‘극우 인사들의 극언’이라며 ‘극(極)’자를 함부로 쓴다. ‘조갑제’가 극우라면 반대편에 서 있는 ‘노사모’는 극좌인가? 그런 규정을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전국언론노동조합은 이명박 정권과 검찰, ‘조중동’이 노무현을 죽음으로 내몰았다면서, ‘공모에 의한 정치적 타살’이라는 말까지 썼다. 이런 언사를 내뱉는 사람들이라면, “파렴치한 죄를 짓고 그 돌파구로 자살을 택한 사람이 왜 존경의 대상이 돼야 하는가” 라는 반론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비민주적· 비과학적인 ‘서거’라는 용어보다 ‘노무현 자살’이 흠잡을 데 없는 용법”이라 주장하는 사람의 발언권도 제지해서는 안 된다. 남을 비판하는 잣대를 자신에게도 그대로 적용해야 한다. 아니, 더 엄격하게 스스로를 다스려야 한다. 그래야 도덕적 정당성이 생긴다. ‘조갑제’든 ‘노사모’든 예외가 있을 수 없다.

    한국 사회가 ‘바보 노무현’을, 그의 용법을 빌리자면, ‘도구로 활용’하지 못한 것은 두고두고 통탄할 일이다. 살맛 나는 사회를 만들 수 있는 천재일우(千載一遇)를 놓쳐버린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또 격조 없는 다툼을 벌이고 있다. 서푼어치 이데올로기가 다시 활개를 칠 조짐이다. 부디 ‘조갑제’는 가라. ‘노사모’도 가라. 노무현의 영정 앞에 국화 한 송이 바치고, 흔적 없이 사라져버려라. 그래야 제대로 된 세상이 들어설 수 있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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