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88

2009.06.02

“한의계 위기 탈출, 세계화에 길 있다”

최승훈 경희대 한의과대학장 … 영어수업, 고전 읽기 등 ‘파격 커리큘럼’ 화제

  • 강지남 기자 layra@donga.com

    입력2009-05-29 11: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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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의계 위기 탈출, 세계화에 길 있다”

    경희대 한의과대학생들의 독서 프로그램인 ‘독이고’의 독후감 노트. 예과 2년 동안 20권 이상의 독후감을 자필로 써야 한다.

    한의학은 2000년 넘는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학문이다. 그처럼 고색창연한 학문을 익히고 있으며, 훗날 진맥을 하고 탕약을 처방할 한의과대학 학생들이 영어로 수업을 한다?

    뿐만 아니라 ‘노자’ ‘순수이성 비판’ ‘이기적 유전자’ ‘iCon 스티브 잡스’ 등 동서고금의 양서도 의무적으로 읽어야 한단다. 이 모두가 최승훈(52·사진) 경희대 한의과대학장이 몰고 온 개혁의 바람이다. 최 학장은 유엔 세계보건기구(WHO)에서 5년간 전통의학 자문관으로 근무한 뒤 지난해 7월 귀국하자마자 학장을 맡아 변신을 주도했다. “내 모든 것을 걸고 개혁을 실천하고 있다”는 그를 만났다.

    올해 1학기부터 전체 수업의 20%를 영어로 강의하는데, 학생과 교수들의 반응은 어떤가.

    “학생이나 교수 모두 부담스러워한다. 그러나 필요성은 다들 공감하고 있다. 10여 명의 교수가 교양, 자연과학, 서양의학 과목을 영어로 강의하는데, 모두가 흔쾌히 동참해줬다.”

    전통학문인 한의학에 왜 영어수업이 필요한가.



    “한의학의 세계화가 지금 한의계가 처한 위기를 극복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국내 사정과 달리 세계시장에서 전통의학(Traditional Medicine) 시장은 날로 커지고 있다. 세계화의 궁극적 현장은 미국이다. 미국에 진출하려면 영어 실력이 필수다. 또한 전통의학 연구논문들은 모두 영어로 발표된다. 학부 시절부터 영어에 익숙해야 세계무대의 연구 경쟁에서 밀리지 않는다.”

    09학번부터는 예과 2년 동안 100권의 추천도서 중 20권 이상을 읽지 않으면 본과 진학을 못하게 했다. 한 달에 한 권꼴로 두꺼운 책을 읽어야 하는 셈이다.

    “부담이 크겠지만 아직 불만을 들어본 적 없다. 한의학은 질병에 앞서 인간을 다루는 학문이다. 무엇보다 인간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 학생들은 입시 위주의 교육을 받아와서 기본 소양이 부족하다. 이 점을 가장 효율적이고 강력하게 보완할 수 있는 방법은 역시 고전과 양서를 읽는 것이다.”

    추천도서 100권은 어떻게 선정했나.

    “90여 명의 한의과대학 교수에게서 모두 600권의 도서를 추천받아 독서지도전문위원회 교수들이 100권으로 추렸다. 동양고전, 서양고전, 인문학, 사회과학, 자연과학 5개 분야다. 자연과학 서적이 25권으로 가장 많은데, 자연과학을 이해하지 못하고는 한의학이 발전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의계 위기 탈출, 세계화에 길 있다”
    경희대 한의과대학의 개혁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2010년 입시부터 정원의 30%를 인문계 학생들 중에서 선발하기로 했다. 또 대학원생 중심이던 연구 프로그램을 학부생 중심으로 확대했다. 학부생들이 독자적인 프로젝트를 맡아 연구성과를 학술지에 게재하도록 독려한다는 것이다. 앞으로 본과 3학년생들은 국내외 교육·연구·임상기관이나 국제기구, 언론사 등에서 6주간 인턴 생활을 해야 한다.

    졸업 전에 사회 경험을 쌓아 미래에 대한 안목을 키우라는 취지다. 5월 초에는 6개국 7개 한의대와 함께 세계전통의학대학협의회를 발족시켰고, 학술진흥재단의 지원으로 ‘뉴 패러다임 한의학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있다. 한의학 중에서도 병리학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최 학장에게서 긴 겨울이 끝나자마자 부지런히 밭을 갈아엎는 농부의 모습이 비치는 듯했다.

    지난해 7월 귀국하자마자 작정한 듯 여러 개혁을 시도했다. 갑작스런 변화에 반발은 없었나.

    “2003년부터 한의계에 위기가 닥치면서 우리 대학 분위기도 많이 침체됐다. 교수와 학생 모두 현실을 어렵게 생각하고 만족하지 못했기에 변화를 일으킬 좋은 조건이었다. 뜻을 한데 모으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인문계 학생을 선발하기로 한 것은 1965년 대학 설립 이후 처음 시도하는 파격적인 결정인데.

    “교과과정에 미적분학이나 물리학이 없다. 문과생도 학업을 따라가기에 큰 어려움이 없을 것으로 본다. 우리 대학에 외고 출신 학생이 제법 있는데, 다들 잘 해내고 있다.”

    최 학장은 WHO에서 전통의학 자문관으로 일하며 전통의학 표준화 작업을 진행했다. 한국, 중국, 일본이 자존심을 내세우며 경쟁하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 전통의학 용어, 침술 시술 부위 등의 표준화를 완료했다. 최 학장은 “인체 361개 경혈 중 무려 92개의 위치가 서로 달라 문제가 심각했다”며 “4년간 11번의 열띤 회의를 거쳐 경혈 위치를 표준화했다”고 회고했다.

    2015년 새로 도입될 ICD(국제질병분류)-11(ICD 11판)부터는 전통의학이 편입된다. 최 학장은 WHO에서 주관하는 ICD-11 개발 작업에 참여하다 중도에 경희대로 돌아왔다. 하루라도 빨리 학교로 돌아가야겠다는 결심을 굳히게 한 것은 2006년 우연히 읽은 자퇴생의 편지였다. 이 학생은 무려 A4 용지 19장에 이르는 글에서 한의계와 대학이 안은 문제점을 열거하며 그로 인한 좌절감에 학교를 떠난다고 썼다. 최 학장은 “가슴이 굉장히 아팠다”며 “교육자로서 우선 우리 대학을 바꿔나가야겠다고 강한 결심을 했다”고 말했다.

    현재 한의계의 위기는 어디서 비롯됐다고 보나.

    “궁극적으로 한의계가 국민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 위기가 닥쳤다고 본다. 특히 탕제 위주의 처방문화가 문제다. 중국산 약재로 인해 신뢰성에 큰 타격을 입었고,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아 비싸다. 복용 또한 불편하다. 한의대 졸업생 대부분이 임상한의사로 진출하면서 연구활동이 저조하고 발전이 더딘 것도 문제다. 한의사가 지나치게 많이 배출됐다는 지적은 소극적 분석에 불과하다. 우리 한의계가 약물 활용 패턴을 바꾼다면 위기에서 탈출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약제문화가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가.

    “복합과립제 위주로 제형이 바뀌어야 한다. 가루 형태의 복합과립제는 효과는 동등하면서도 가격이 저렴하고 복용하기 편하다. 또 약재 생산재배가 표준화되기 때문에 안전성도 확보된다. 이미 대만에는 복합과립제가 보편화돼 있다.”

    연구인력 부족도 한의계 발전을 더디게 하는데.

    “우리 대학 졸업생들도 90% 이상이 임상한의사로 진출한다. 5000여 명의 졸업생 중 대학이나 연구기관에 있는 사람이 200명에 그친다. 적어도 졸업생의 20% 정도가 연구인력으로 진출해야 한의학이 발전하리라고 생각한다.”

    어떻게 해야 한의대생들을 연구인력으로 끌어들일 수 있을까.

    “대학에서 비전을 심어줘야 한다. 경희대는 올 가을 의과대학, 한의과대학, 인문사회과학대학 등이 참여하는 ‘신의학문명원’을 출범시킬 예정이다. 서양의학과 한의학의 협력으로 새로운 의학을 만드는 것이 목표다. 영어수업을 도입하고, 고전을 통해 자질을 함양시키고, 해외 유수 한의대와 협력체를 만드는 등의 노력은 궁극적으로 우수한 연구인력 양성을 위함이다.”

    세계 각국의 전통의학 경쟁이 치열할 텐데.

    “양적으로는 중국의 연구가 가장 활발하다. 그러나 점차 전통의학 연구의 중심이 미국으로 옮겨지고 있다. 전통의학 분야에 대규모 연구비를 지원하고 그 성과를 거둬들이기 때문이다. 미국 한의대 수도 70여 개나 된다. 그러나 한국도 질적으로 우수한 논문을 다수 내놓고 있어 희망이 없지 않다. 특히 한의학은 중의학에서 한발 나아가 사상의학을 바탕으로 사람마다 특성이 다르다는 체질의학적 강점을 가진다.”

    경희대 한의과대학의 ‘파격 개혁’에 대한 국내 한의대들의 관심이 뜨겁다. 학생들이 영어수업을 잘 따라오느냐는 등의 질문이 쏟아진다. 국내 한의계가 위기의식을 공감하고 변화를 갈급한다는 증거일 것이다. 최 학장은 “개혁이 궤도에 오르려면 2~3년이 필요하다”며 “변화를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개선, 보완해나가겠다”고 의지를 다졌다. 일견 돈키호테형으로 여겨질 수도 있는 그의 발상이 한의계를 살리는 적확한 처방으로 입증되는 날을 기다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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