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88

2009.06.02

국가 1급기밀 ‘인터넷’에 다 있다

극비 운영 AN-2 부대 위치와 부대장 이름까지 떠돌아

  • 이정훈 동아일보 출판국 전문기자 hoon@donga.com

    입력2009-05-29 10: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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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 1급기밀 ‘인터넷’에 다 있다

    5월4일 충북 영동에서 추락한 ‘한국 공군의 AN-2’ 잔해. 작은 사진은 복엽기 형태인 AN-2의 원형이다.

    5월4일 충북 영동군 황간면 소계리 황간나들목 인근 포도밭에 공군의 훈련용 경비행기 L-2가 추락해 거의 타버렸으나 다행히 비행교관 윤모(군무원) 씨와 최모 대위 등 탑승자 2명은 비상 탈출했다는 사실이 사진과 함께 보도됐을 때 군사전문가들은 L-2라는 기종 이름에 의문을 품었다.

    미군 항공기 분류에서 L은 Liaison의 머리글자를 딴 것으로 ‘연락기’로 번역된다. 연락기는 과거에 육군 항공대이던 공군이 육군에서 막 독립하던 시절, 부대 사이에 자료를 주고받거나 지휘관들이 이동할 때 타던 비무장 항공기다. 요즘 육군에선 헬기가 연락기 이상의 구실을 해 L-2가 남아 있을 리 없다.

    그런데 L-2가 비행훈련을 하다 사고를 냈다니 이상하지 않을 수 없다. 흥미로운 것은 제원. 보도에 따르면 L-2의 최대 속도는 시속 250km이고, 1500kg의 화물과 완전무장한 특수부대원 10여 명을 태울 수 있으며, 길이는 13m, 기폭은 18.2m이다. 이러한 제원과 성능을 가진 항공기는 서방국가는 물론 사회주의권에서도 보기 힘들다. 북한에 330여 대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 AN-2뿐이다.

    AN-2는 뼈대를 나무로 만들고 날개는 쇠가죽을 씌웠기에 F-22나 F-35처럼 약간의 스텔스 기능이 있다. 게다가 레이더파가 닿지 못하는 산그늘에 숨어 저공비행하므로 특수부대원을 태워 기습 남침하는 데 적격이다. AN-2를 막으려면 눈으로 보고 요격하는 것이 최선이다. 따라서 육군은 전방 고지에 병사들이 운반하고 조작하는 휴대용 대공미사일 ‘신궁(新弓)’을 배치해놓았다.

    이처럼 한국에게는 공포의 대상이 될 수도 있는 10여 대의 AN-2를 한국 공군이 폴란드 등으로부터 수입해 L-2라는 이름으로 위장해 운용해오다 5월4일 사고를 냈다는 사실을 확인해준 것은 중앙일보 5월9일자였다. 일부 보수단체 사람들은 중앙일보로 몰려와 “왜 국가기밀을 보도했느냐”며 항의했다.



    국방일보도 기밀사항 보도

    한국이 AN-2를 운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공개한 것은 과연 중앙일보뿐일까. 정보기관 종사자들은 필요한 정보의 70~80%를 신문이나 방송, 인터넷 등 공개된 매체에서 구한다고 한다.

    AN-2는 모양이 독특한 복엽기(複葉機)다. L-2가 추락한 곳은 충북 영동군인데,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공군의 ○○비행장이 있다. 군사 마니아 수준의 한 누리꾼이 운영하는 블로그에는 ○○비행장 인근에서 찍은 AN-2 사진과 함께 ‘지금 내가 본 것은 한국군이 비밀리에 도입했다는 AN-2일 것’이라는 설명이 실려 있다.

    L-2로 위장한 AN-2를 운용하는 부대는 공군 ○○전대 예하의 ○○대대인데, 국방부 대변지라고 할 수 있는 국방일보 2007년 ○월○일자에는 이 대대가 27년간 무사고 비행을 기록했다는 기사를 실었다. 이 부대가 하는 일는 ‘특수작전과 훈련’이라고 소개하고, 이 부대의 창설일과 전대장 이름까지 밝혀놓았는데 이 기사는 인터넷에서 쉽게 검색할 수 있다.

    애인을 군대에 보낸 여성은 애가 탈 수밖에 없다. 이러한 여성들이 만든 한 카페에는 애인이 배치된 ○○전대를 찾아가는 길을 묻는 글과 그에 대해 답변을 해준 글이 올라 있다. ○○전대의 이름을 정확히 안다면, 다음이나 네이버 같은 포털사이트에 ‘○○2009-05-272009-05-27전대’를 입력해 이 부대의 위치와 성격에 관한 자료를 얻을 수 있다.

    마니아와 기자는 물론, 애인을 군대에 보낸 여성들까지도 무심결에 국가기밀을 공개하는 것이 현실이다. 감춰야 할 비밀은 많은데, 사방에 번득이는 눈이 있어 비밀은 자꾸 드러난다. 이 현실을 어떻게 돌파할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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