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87

2009.05.26

타인의 선택을 유도하는 부드러운 힘

‘넛지(Nudge)’

  • 왕상한 서강대 법학부 교수 shwang@sogang.ac.kr

    입력2009-05-20 17: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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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인의 선택을 유도하는 부드러운 힘

    리처드 탈러·캐스 선스타인 지음/ 안진환 옮김/ 리더스북 펴냄/ 428쪽/ 1만5500원

    오래전 미국 뉴욕에서 공부할 때 일이다. 그곳 남자 소변기 위에 화장실을 청소하는 흑인 아저씨가 흘려 쓴 낙서가 있었다. ‘조준 잘하라(Aim Well)’. 그럼에도 별 효과가 없었다. 그러자 소변기 중앙에 언뜻 보면 파리 같은 작은 스티커 하나가 붙었다. 상황은 그때부터 달라졌다. 모두 그 파리를 잡기 위해 열심히 ‘정조준’했다. 그 결과 청소 아저씨는 소변기 밑을 걸레로 닦는 일이 확실히 줄었다.

    우리나라 남자 화장실 소변기 앞에는 이런저런 문구가 붙어 있다. ‘남자가 흘리지 말아야 할 것은 눈물만이 아니다’ ‘아름다운 사람은 머물다 간 자리도 아름답다’. 하지만 소변기 근처가 청결한 곳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분명한 건 소변기 밖으로 일부러 흘리려는 사람은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그 밑이 흥건한 이유는 대부분 소변기에 바짝 다가서지 않아 볼일을 시작할 때와 끝낼 때 실수 아닌 실수를 하기 때문이다.

    최근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스키폴 공항도 남자 소변기에 벌레 모양의 스티커를 붙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화장실을 깨끗이 사용하라’는 경고 문구를 붙였을 때보다 소변기 밖으로 새나간 소변이 80%나 줄었다고 한다. 내가 유학할 때 그랬던 것처럼 스키폴 공항 화장실을 이용하는 사람들도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했으리라. 벌레를 맞히느냐, 아니면 붙어 있는 벌레를 무시하느냐. 대다수의 이용자는 기꺼이 소변기 가까이 다가가 벌레를 겨냥했다. ‘화장실을 깨끗이 사용하라’는 경고도 없었다. 그렇다고 ‘파리를 맞히면 경품을 준다’는 식의 인센티브도 없었다. 바로 넛지(Nudge)가 제대로 작동한 예다.

    ‘넛지’의 사전적 의미는 ‘(주위를 환기하기 위해) 남을 팔꿈치로 쿡쿡 찌르다’이다. 심리학자들은 넛지란 ‘사람들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부드럽게 유도하되 선택의 자유는 여전히 개인에게 열려 있는 상태’를 말한다고 한다. 이 책 저자들은 ‘강제하거나 금지하지 않고 피해를 주지 않으면서 타인의 선택을 유도하는 부드러운 힘(개입)’이라고 정의한다.

    하버드대 로스쿨 교수로 오바마 행정부에 합류해 규제정보국 일을 돕고 있는 캐스 선스타인과 시카고대 경영대학원 교수로 심리학적 성과를 수용하는 행동경제학 연구를 계속해 ‘행동경제학의 발명가’로 불리는 리처드 탈러가 공동 저자다. 인간의 사고방식과 우리 사회의 작동원리에 대해 주목한 이들은 이를 바탕으로 사람의 의사결정 능력을 향상시키고 세상을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도록 돕고, 재미있으면서도 중요하고 실용적이기까지 한 의견들을 이 책을 통해 상세하게 제시한다.



    이들은 ‘넛지’는 편견 때문에 실수를 반복하는 인간들을 부드럽게 유도함으로써 현명한 선택을 이끌어낼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내일 투표할 예정이냐’라고 묻는 것만으로도 실제 투표율을 높일 수 있다는 일상적인 이야기부터 디폴트 옵션(지정하지 않았을 때 자동적으로 선택되는 옵션)의 설계에 이르기까지, 똑똑한 선택을 유도하는 넛지의 사례들을 담았다.

    저자들은 인간 뇌의 인지능력 상이함에서 오는 시스템적인 오류나 유혹과 자기통제 능력, 무심한 선택, 집단동조 현상 등을 실험적으로 제시함으로써 인간의 선택이 얼마나 어이없고 불완전한지를 보여준다. 가령 베토벤이 청각을 잃고도 ‘합창교향곡’을 작곡했지만 종종 집 열쇠를 어디에 뒀는지 잊어버렸다는 것은 뇌가 담당하는 영역의 차이에서 오는 이중성을 보여주는 한 예라는 것이다. 휴대전화를 구입하면 벨소리, 배경화면 등 많은 것을 선택해서 입력해야 한다. 제조업체는 이들 선택 항목에 대해 미리 디폴트 옵션을 지정해놓는다. 조사 결과에 따르면 많은 사람이 디폴트 옵션과 무관하게 업체가 설정해놓은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그대로 사용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타인의 선택을 적극적으로 설계할 수 있다’는 넛지 이론은 2008년 민주당 대선 후보이던 버락 오바마와 영국 보수당 당수 데이비드 카메론이 이를 활용한 정책을 수용하면서 폭발적으로 유명세를 탔다. 그 결과 저자 선스타인이 오바마 정부에 합류, 자신의 지론을 정부 정책에 반영시키고 있다. 그야말로 넛지의 시대가 온 것처럼 보인다.

    사실 넛지는 우리 실생활에 이미 깊숙이 들어와 있다. 사용자 환경을 편리하게 바꿈으로써 대박을 터뜨린 아이팟이 대표적 예다. 슈퍼마켓 진열대에 특정 식품을 재배열하는 것만으로도 25% 이상의 판매 증가가 나타났다는 조사결과도 그런 예 중 하나다. 이를 공공적인 영역으로 확대하면, 예컨대 위험한 급커브 구간에서 차선 간격을 좁게 그려 속도가 증가하는 느낌을 줌으로써 운전자들이 본능적으로 속도를 늦추게 할 수도 있다. 여기서 선택 설계자들의 역할이 중요해진다. 이 책은 똑똑한 설계법, 선택법도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있다. 법대 교수와 경영대 교수가 쓴 책이지만 ‘경영 냄새’는 나도 ‘법 냄새’는 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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